[기획연재] 총련과 그 역사를 알아보다(4) 70년대

현장언론 민플러스는 4.27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3대(북▪민족▪미국) 바로알기운동’을 펼치고 있다. 먼저 민족 바로알기 일환으로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 오규상 부소장의 ‘총련과 그 역사를 알아보다’를 기획연재한다. 4세대에 걸쳐 민족성을 지켜온 재일동포들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을 새롭게 알아 나가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흔쾌히 기고해주신 오규상 부소장께 감사드린다.[편집자] 

※ 내용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두음법칙, 띄어쓰기 등 국어 맞춤법을 적용했다.

1974년 4월1일 현재 재일동포 중 조선에서 태어난 동포는 24.1%, 일본에서 태어난 동포는 75.6%를 차지한다(일본 법무성 통계). 다시 말하면 1세는 4분의 1이고, 일본에서 나서 자란 동포가 동포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저한 세대교체는 동포들의 가치관 다양화를 가져왔으며 총련도 그에 상응한 운동을 모색했다. 그 하나가 젊은 상공인운동이며 그 단서를 연 것이 1970년 8월에 가진 《재일조선 젊은 상공인들의 모임》이였다. 이것은 21세기에 활약하는 청상회운동의 시초로 되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지지하여

▲ 총련 도쿄도본부와 민단 도쿄도본부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개최된 8.15광복 27돐 기념하여 남북공동성명을 지지하는 도쿄 전체 동포들의 모임(1972년 8월 15일, 도쿄체육관) [조선화보 1972년 9월호]

1971년 11월부터 남북 당국자의 연락대표들이 비공개 접촉을 진행하고 평양과 서울의 상호방문이 실현되여 1972년 7월4일에 남북 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견해의 일치를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였다. 

총련은 성명이 발표된 지 1시간 후인 11시에 의장 명의의 지지담화, 그후에 민단산하 동포들까지 포함한 전체 재일동포들에게 보내는 상임위원회 성명을 발표하여 공동성명을 지지하고 그 실현에 한결같이 일떠설 것을 호소하였다. 

공동성명을 지지하는 행사는 도쿄도 오따지역 동포들의 모임(7.23)을 비롯하여 일본 각지 330여개소에서 열렸다. 조청중앙과 한청(재일한국청년동맹)중앙이 주최한 중앙대회, 총련도쿄와 민단도쿄가 주최한 지지대회는 대회형태로 처음으로 가진 의의 깊은 대회로 되었다.

통일의 기운이 한때 높아졌으나 박정희는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령을 내려 12월에는 유신체제를 세웠다. 총련은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를 규탄하는 대내외 선전사업을 적극 벌린 것은 두말할 것 없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문세광 사건

1973년 8월8일 백주에 도쿄의 호텔에서 김대중이 납치된 사건이 발생되어 5일 후에 그가 서울에 나타났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마구 체포구금하고 재판에 걸고 엄벌에 처했다. 김대중은 사형선고였으며 조선총련은 반한국적 단체로 지명되었다. 중앙정보부(KCIA) 요원들이 수만명 일본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여론이 국제적으로 높아가던 시기인 1974년 8월15일, 광복절 행사 때 박정희 저격사건이 발생, 륙영수가 총에 맞아 죽는다. 사격한 사람은 문세광이라 하였다. 문세광은 일본 오사까의 경찰파출소의 권총 2정을 탈취하여 저격사건에 썼다고 한다. 수사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그는 북의 지시를 받은 총련지부의 어느 일군의 지도 밑에 도쿄에 있는 동포병원에서 사격훈련을 하였고 3.1절을 비롯해서 기회를 노리다가 광복절 때 일본인의 여권을 빌려 행사에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정부와 박정희 정권 사이의 소위 외교적 결착에 의하여 일본수상 특사가 한국을 방문한다. 《다나까친서》(당시 일본수상의 친서)를 들고 시이나 자민당 부총재가 서울로 간다. 여기에서 문제는 총련 문제를 논의하여 《시이나메모》란 것을 넘긴다. 이것으로 하여 한일 양국은 총련을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약속된다. 

총련은 공화국과 총련을 저격사건과 관련시키려는 박정희 깡패도당의 파렴치한 모략행위를 규탄하는 성명(8.18)과 총련을 파괴하려는 박정희 도당과 일본정부의 흉모를 규탄하며 《협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성명(9.20)도 연달아 발표하여 총련의 립장을 명백히 하였다. 특히 《규제》운운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모독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총련은 어려운 행로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진상조사사업을 본격화

▲ 조선인강제연행조사의 기록 자료집

해방이 되어 4반세기가 경과하여도 일본 정부는 과거 죄행을 스스로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조일국교 정상화를 위해서도 과거청산은 필수적 조건으로 된다. 총련은 사회과학자, 인권전문가들과 일본의 법률가, 학자, 문화인들로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을 발족시켰다. 1972년 8월의 오끼나와에 대한 조사를 시작으로 하여 혹가이도(73. 4), 규슈지방(74. 4), 도호꾸지방(75. 8) 조사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현재까지 계속 조사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조사결과는 자료집 또는 《조선인강제련행조사의 기록 ○○편》이라는 제목으로 지방별 조사결과를 책으로 묶어 발간하고 있다. 2018년 5월에는 일본 각지에 건립되어있는 추도비를 묶은 《자료집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출간하여 과거청산에 이어가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민족권리 옹호를 위한 활동

귀국의 권리를 획득한 재일동포들의 요구는 다음으로 재일조선인들이 공화국에로의 왕래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요구이다. 총련은 조국왕래투쟁도 강력히 벌렸다.

조국왕래를 위한 운동은 1963년 5월경에 시작하였다. 자기 나라에 가서 돌아오는 권리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나,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의 공화국에로의 래왕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도주의를 전면에 내걸어 요청사업, 시위, 서명운동을 강화하는 속에서 1965년 12월에 겨우 3명의 고령동포에게 재입국허가가 내려와 그 중 2명이 가게 되었으나 자기 고향에서 환영모임에 참가한 것을 가지고 정치행사에 참가했다는 구실로 다시 길이 막혔다. 그리하여 총련은 계속 요청사업을 벌리면서도 1968년에는 법정투쟁을 전개하여 도쿄지방재판소와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승소하였으나 최고재판소는 소송의 의미가 없다고 기각하였다. 총련측이 패소하였으나 그 누가 보아도 총련측의 주장이 타당하였다. 그 이후 72년경부터 일본당국에 의한 왕래의 허가대상이 점차 늘어났다. 72년 6월에는 조선국적으로 제3국을 통한 여행 길이 처음으로 열렸다. 해방이 된 지 27년만의 일이다. 투쟁 끝에 쟁취한 것이다.

총련의 권리옹호투쟁에서 60년대말경으로부터 70년대 중반기까지의 중요한 투쟁의 하나가 《출입국관리법》의 조작 반대투쟁이다. 이 법은 출입국관리령이 이미 있으나 외국인의 출입, 재류, 퇴거에 관하여 더 상세히 관리, 규제하려는 법안으로써 특히는 재일동포들의 사회활동 등을 규제하여 문제가 될 경우 강제추방까지 노린 법안이었다. 일본재류외국인, 민단도 함께 반대투쟁에 나서 결국 폐지시켰다. 

일본은 《국제인권규약》이 발효(1976년)된 지 3년후에 겨우 조건부 비준(의정서는 미비준)한 것으로 인권후진국의 오명을 샀으나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여 총련은 동포들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제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특히 총련은 1978년 10월13일에는 재일조선인의 민주주의적 민족권리를 보장할데 대한 7가지 사항으로 된 후쿠다 내각총리 앞의 요망서를 일본 관방장관에게 직접 넘겼으며 1979년 11월29일에는 일본당국이 국제인권규약의 원칙에 따라 재일조선인의 제반 권리를 전면적으로 보장할데 대한 오히라 총리 앞의 요망서를 관방부장관에게 직접 넘겼다. 

70년대 권리옹호운동을 강화한 결과 80년 4월1일부터는 재일동포들도 주택금융공고의 적용,공영주택의 리용 등 일본의 몇 가지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보험적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총련은 민족보험기관을 창설하기 위한 사업도 진행하였다. 있을 수 있는 재해와 사고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각종 보험에 재일조선인은 일정한 제한을 받고 있어서 제대로 가입하지 못했으며 불편을 느끼고있었다. 총련은 1977년 4월18일에 금강보험주식회사를 내오고 동포들의 보험적 권익도 옹호해나갔다. 

조국통일운동을 전개

▲ 조선에서의 핵전쟁 반대, 주한미군 철거 요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도보행진(오사카~도쿄)과 500만명 서명운동(1975.07.27.~08.31)

총련은 7.4남북공동성명 발표 3주년에 즈음하여 미제와 박정희 괴뢰도당의 새 전쟁 도발책동을 규탄하는 재일동포들의 자동차 시위 행진을 아이치, 오사카, 효고, 교토, 후꾸오카, 혹가이도 등에서 진행(75. 7.4)하였다. 

그리고 1975년 7월27일부터 8월말까지 《미제와 박정희도당의 핵전쟁 도발 반대, 남조선으로부터의 미군철거 요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촉진대행진(오사카―도쿄)》과 500만명 서명운동을 대중적으로 벌렸다. 이 행진은 오사카와 도쿄의 기본행진과 함께 모든 도도부현을 걸친 지선행진까지 포함하면 2100여km를 행진한 것으로 통일여론을 크게 환기시키는데 기여했다. 이 두 달 남짓한 기간에 515만명의 서명을 받았으며 이것은 일본의 민주운동, 평화운동에서도 그 예가 없다 한다. 

그리고 총련은 1978년 6월까지 일본의 45도도부현에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연대위원회가 무어지도록 적극 도와 나섰다. 또한 1978년 11월에 일본에서 열린 조선의 통일지지 제2차 세계대회 성공을 위하여 힘썼다. 

1948년12월 가나가와현에서 출생했고, 본적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동포 2세다.
1955년4월 가나가와현 조선학교에 입학해 1967년3월 졸업했다. 1971년3월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6년간 민족교육을 받았다.
1979년7월 김일성종합대학 통신박사원 준박사과정 수료하고, 1998년10월8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국가 학위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학준박사(1979.09.03.), 사회정치학박사(1998.12.0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교수(1991,05.15), 교수(2001.05.02)

오규상 부소장 약력

1971년4월부터 2004년6월까지 조선대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교수, 정치경제학부 학부장, 경영학부 학부장, 교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4년7월부터 재일조선인력사연구소에서 연구부장으로 근무하다, 2010년5월에 부소장이 되었다. 현재 조선대학교 비상근 강사로 출강한다.

저서
『기업권확립의 궤적 재일조선상공인의 바이타리티』朝鮮商工新聞社、1984・2
『재일조선인기업형성사』雄山閣、1992・3 
『아세아를 뛴다 화교・재일코리안』朝鮮青年社、1996・6
『다큐멘트 재일본조선인련맹1945-1949』岩波書店、2009・3
『기록・조선총련60년』2015・12(私家版)

편저
『입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雄山閣、1998.9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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