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작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2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두번 째 연재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혁명가 약산 김원봉 편이다. 

 김원봉이 중국 천진(天津)으로 건너가 독일 사람이 꾸려가는 덕화학당(德華學堂)에 들어간 것은 19살 때인 1916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치러지고 있었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독일로 갈 생각을 하고 덕화학당에 들어갔던 것이니, 독일에 힘을 보태주며 독립을 할 수 있으리라는 그때 선배 애국자들 형편 읽기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말을 배우기 앞서 먼저 중국말을 배우다가 1917년 여름방학을 맞아 조선으로 돌아온다.

▲의열단 단원들(사진출처 나무위키)

그동안 애국자들 꿈과 다르게 중국이 일본 쪽에 붙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덕화학당은 문을 닫고 김원봉은 1년쯤 조선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에 사귀게 되는 사람이 김두전(金枓全)과 이명건(李明鍵)이었다. 고모부인 황상규가 세 사람에게 호를 지어주며 의형제를 맺게 하였고, 세 사람은 바다 밖으로 나가 민족해방운동을 벌이기로 굳게 다짐한다. 황상규는 세 소년에게 어떤 경우에도 조국 산천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산과 물과 별을 속뜻으로 하는 호를 지어주었으니―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女星)이 된다.

1918년 9월, 김약산 · 김약수 · 이여성 세 동지는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에 들어간다. 미국인이 꾸려가는 기독교 갈래 학교로 여운형이 신학과를 마친 것이 그전 해였다. 세 사람이 들어간 곳은 영어과였다. 1919년이 되자 여운형이 나라 안팍 애국동지들을 상해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여운형이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연희전문학교 세운 언더우드 양아들로 영어에 밝고 중국 국적을 갖고 있어 바다 밖 나들이에 걸림이 없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조선 대표로 보내어 조선독립을 세계만방에 비대발괄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강도 나라들이 조선 같은 힘없는 겨레를 위하여 저희들과 같은 자리인 일본제국주의와 싸워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약산은 길림으로 간다. 김약수 · 이여성과 만나 조국독립을 위한 둔전병(屯田兵, 변경에 주둔ㆍ정착시켜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게 하고, 전시에는 전투병으로 동원하였던 군사) 양성을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주 서간도에서 군대를 기르자는 것이 그때 독립운동 두럭(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의 무리, 여러 집들이 한데 모인 집단)들 똑같은 생각이었다.

봉천(奉天)에서 세 사람이 만났을 때 고국에서 일어난 3 · 1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약수 · 이여성은 “독립운동은 반드시 해외에 나와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내로 돌아가 인민대중을 토대로 하여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조선으로 돌아갔고, 약산은 “무장력을 갖췄을 때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며 의군부(義軍府,1919년 4월 만주 북간도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가 있는 길림으로 간다. 의군부 고갱이(핵심)는 「대한광복회」회원이던 황상규 · 김좌진 · 손일민이었다. 

3 · 1운동을 일으킨 인민대중 무서운 힘을 보게 된 약산은 지금까지 품어왔던 생각을 바꾸게 된다. 군대를 길러서 세계 최강인 왜적과 맞싸운다는 것이 이길 수 있고 없고는 다음이고 우선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꿈이 깨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다다른 마무리가 암살 · 파괴 투쟁이었다. 3 · 1운동에서 인민대중 힘을 믿게 되었고, 그 인민대중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불쏘시개 구실을 하자는 것이었다.

작지만 억센 동아리를 만들어 적 한바닥(번화한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곳) 난사람(남들보다 두드러지고 뛰어난 사람)들을 죽여 버리고 적 고갱이 두럭들을 부숴버림으로써 인민대중 속에 들어있는 사나운 혁명깜냥(어떤 일을 가늠해 보아 해낼 만한 능력)을 이끌어내는 불쏘시개가 되자는 것이었다.

1919년 11월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군 반 아무개 집에 약산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였다. 모두 13명인데, 얼추 밀양 · 대구 테두리에서 3 · 1만세시위를 목대 잡다가 만주로 내뺀 사람들이었다.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창립 단원들 단체사진으로 지난해 영화 '암살'이 개봉되면서 서대문형무소 전시관 2층에 전시돼있는 이 사진이 주목받았다. 이 사진은 의열단원인 정이소의 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부착돼 있던 것으로 1920년 3~5월 사이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중화민국의 치외법권 지역) 내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의열단은 신분 노출을 우려해 이외 남긴 사진이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오른쪽부터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 이성우. 앉은 사람은 정이소이며, 오른쪽 하단은 일제 경찰이 따로 붙여 놓은 김익상 사진이다.(자료출처 국사편찬위원회DB)

약산 · 윤세주(尹世冑) · 이성우(李成宇) · 곽 경(郭 敬) · 강세우(姜世宇) · 이종암(李鐘㘙) · 한봉근(韓鳳根) · 한봉인(韓鳳仁) · 김상윤(金相潤) · 신철휴(申喆休) · 배동선(裵東宣) · 서상락(徐相洛) · 권 준(權 俊).

황상규가 의백(義伯, 의로운 일의 우두머리)으로 모셔졌는데, 「의열단(義烈團)」이라는 이름이었다. 공약 제 1조에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 ‘의’와 맹렬 ‘열’을 따온 것이었다.

암살할 사람으로 못 박은 것이 일곱 가지 갈래였으니, 칠가살(七可殺, 일곱 가지 옳은 죽이는 일)이다.

⓵조선총독 이하 고관 ⓶군부 수뇌 ⓷대만총독 ⓸매국적 ⓹친일파 거두 ⓺ 적의 밀정 ⓻ 반민족적 토호열신

다음은 부숴버릴 곳들이다.

⓵조선총독부 ⓶동양척식주식회사 ⓷≪매일신보≫ ⓸각 경찰서 ⓹ 기타 왜적 주요기관

만주 길림(吉林)에 세워진 「의열단」은 바탕자리를 북경으로 옮긴다. 1920년 늦봄에서 초여름쯤이었다. 중국 정치 한바닥인 북경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가 내세우는 외교독립노선에 맞서는 조선인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열단」이 맨 처음 치른 일은 조선총독부를 터뜨려 부수려는 딴이름 ‘밀양폭파사건’이었다. 하지만 곽재기 · 이성우 · 신철휴 · 김수득 · 한봉근 · 윤세주 6명이 서울 인사동 어떤 중국 요릿집에 모여 있다가 독립 운동자를 잡아들이는 것으로 못된 이름을 떨치던 김태석(金泰錫) 경부(지금의 경감)와 그 졸개들에게 붙잡힘으로써 허방치게(뜻대로 되지 않고 실패로 돌아가다) 된다.

▲ 의열단 등 항일무장투쟁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암살'의 한 장면

1920년 6월16일 모두 16명이 붙잡힌 ‘암살 파괴의 대음모 사건’ 주범으로 찍힌 곽재기는 8년 만기를 채웠고, 이성우가 세상 구경을 다시 하게 된 것은 1928년 3월8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황상규 · 이성우 같은 선배들이 붙잡혀 들어감으로써 약산은 ‘의백’이라는 이름의 단장을 맡게 된다.

제2차 거사를 책임 맡은 것은 부산 출신 박재혁(朴載赫)이었다. 「의열단」이 노린 것은 많은 동지들이 잡혀간 부산경찰서였다. 1920년 9월14일, 예전책(오래된 책) 장사꾼으로 꾸미고 서장실로 들어간 박재혁은 고서 속에 숨겨두었던 폭탄을 던졌다. 서장실이 박살나면서 하시모토(橋本) 서장은 중상을 입었고 박재혁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박재혁은 낟알기를 끊기 아흐레 만에 숨을 거두었으니,“왜놈 관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재혁 열사 거사가 있은 지 두 달 뒤인 1920년 11월, 이번에는 밀양경찰서가 폭탄세례를 받았다. 밀양 사람으로 동화학원을 다녔던 약산 친구 최수봉(崔壽鳳)에 의해서였다. 부산경찰서폭파사건 때 밀양에 들어온 의열단원을 만나 단에 들어간 최수봉은 폭탄을 던진 다음 뒤쫓는 왜경을 피해 도망치다가 길이 막히자 단도로 제 목을 찔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21살 나이였다.

1921년 9월12일 상오 10시 10분쯤, 남산 밑 왜성대(倭城臺, 이제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던) 일제 식민통치 총본산인 총독부 건물에서 폭탄이 터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용산 철도국 노동자 출신 김익상(金益相)열사 거사였는데, 경성 얼안(테두리의 안) 모두 계엄령에 버금가게 에워싼 속에 이 잡듯이 뒤졌으나 깜깜속이었다. 누가 어떻게 무시무시한 총독부에 들어와 2층에 있는 회계과를 터뜨려 부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 황포단의거 소식이 실린 독립신문(사진출처 인터넷 백과사전)

1922년 3월28일 하오 3시 반, 상해 황포탄 나루터는 대일본제국 육군대장 다나카기이치(田中義一)를 마중하기 위한 사람들 물결로 백차일을 친 듯하였다. 사다리를 내려온 다나카가 줄지어 늘어선 마중꾼과 손잡으며 걸어 나오는 순간, 총질 솜씨꾼인 오성륜(吳成崙) 단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은 그러나 마침 다나카 앞으로 나서는 서양 여자 가슴에 박혔고, 다나카는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엎드렸다. 제2선을 맡았던 김익상이 아수라장을 이룬 군중을 헤치고 다나카 뒤를 쫓으며 연달아 두 방을 쏘았으나 두 방 모두 다나카가 쓴 모자를 꿰뚫었을 뿐이었다.

재빨리 마차를 타고 도망친 다나카를 제3선을 맡은 이종암이 쫓아가며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일본영사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오성륜은 유치장을 부수고 도망쳤고, 김익상은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던 것이 드러나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에서 다시 20년으로 감형 받아 나온 1942년 뒤로는 자취를 모른다. 오성륜이 한 말이다.

“일본의 대신 · 대장을 암살한다 해서 독립을 성취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암살로 말미암아 자연 사방의 정세가 독립을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암살수단을 채택하게 되었다.”

뛰어난 무장 투쟁가였던 오성륜은 1941년 더러워져 왜경에 붙었는데, 1947년 첫때 임서(林西)에서 죽었다. 팔로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말도 있다.(다음에 계속)

 

작가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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