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작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2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두번 째 연재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혁명가 약산 김원봉 편이다. 
▲ 단재 신채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지어준 「조선혁명선언」을 「의열단」 근본철학으로 한 약산은 다시 암살 · 파괴 밑그림에 들어간다. 최종덕 · 이종암을 국내에 들여보내어 공산주의자 김한과 암살 · 파괴 공작을 벌이려는데, 김한이 붙잡힌다.

다시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들었다가 돌아온 김시현(金始顯, 1883~1966)과 김시현이 끌어들인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 옥(黃 鈺)에게 폭탄과 「조선혁명선언」과 단원들을 보내었다. 서울을 사북으로 온 나라 여러 곳에서 넓은 폭동이 일어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염알이꾼(염탐꾼) 김 아무개 쏘개질(있는 일 없는 일을 얽어서 일러바치는 짓)로 꺾여버리고 만다.

빼앗긴 물품만 건물 파괴용 6개, 방호용 17개, 암살용 13개 등 폭탄 36개, 뇌관 6개, 도화선 6개, 도화선과 닿게 되는 시계 6개, 권총 6자루, 실탄 155발, 「조선혁명선언」 361부, 「조선총독부 소속 관공리에게」라는 협박문 548장이었다.

1923년 1월5일,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이 동경으로 갔다. 황궁 정문 앞에 있는 이중교(二重橋) 다리에 폭탄을 던져 북새통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황궁으로 들어가 왜왕을 죽이려고 폭탄을 던지기는 하였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무기징역에서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왜경한테 당한 살인적 족대기질과 단식투쟁으로 몸이 약해져 한 달 보름 만에 옥사하고 말았다. 

▲ 김지섭 열사

김지섭 열사 동경 거사 뒤에도 여러 차례 「의열단」원들이 한 암살 · 파괴 사건이 일어나지만, 동경 거사가 허방 짚으면서 「의열단」 싸움은 막상 가림천을 내린다. 북경으로 단 바탕자리를 옮긴 1924년에는 한 70명 결사단원을 거느릴 만큼 힘이 늘어나―테러리즘의 테두리를 깨닫고 무장투쟁으로 그 운동 노선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조선의용대」였다. 그 때에 김원봉이 부르짖었던 말이다.

“일대 무장투쟁이 아니고서는 강도 일제를 구축할 도리가 없다.!”

「의열단」 싸움만이 아니었으니, 올라간 다음에는 내려오게 마련인 것이 운동법칙인 때문인가. 3 · 1운동과 함께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나라 안팎 독립운동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왜군과 맞붙었던 만주독립군은 홍범도 장군 봉오동대첩(1920년 6월)과 김좌진 장군 청산리대첩(1920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자본주의 힘센 나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비대발괄하는 외교 청원을 주된 노선으로 한 상해임정은 일제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제국주의 힘센 나라들 모르쇠와 집안싸움으로 겉치레만 남았으며, 나라 안에 있는 부르주아계급이 벌이던 실력양성론은 민족해방을 손 떼는 이른바 민족개량주의운동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을 본받아 일어난 공산주의운동은 아직 그 힘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캄캄한 일됨새에서 끈덕지게 이어졌던 「의열단」싸움은 절망 벼랑 끝에 내몰린 조선 인민들에게 비쳐주는 한 점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약산이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들어간 것은 1926년 1월이다. 신 악 · 이영준 · 김 종 · 이인홍 · 양 검 · 이병희 같은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한 투쟁노선 바뀜에 따른 것이니, ‘결사적인 항일군대’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광동(廣東)코뮌이 끔찍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맞섬을 놓고 많은 생각을 하며 상해 거쳐 북경으로 간 약산은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세워 조국해방을 위한 대들보들을 키워낸다. 그들을 나라 안으로 들여보내어 노동자 · 농민 · 학생과 대중운동을 벌이게 하고, 장개석과 합작을 밀고 나갔으나 장개석의 우물쭈물하는 항일노선 탓에 꺾여버린 다음, 남경으로 가서 ‘혁명간부학교’를 세운다.

1935년 7월4일, 독립운동 두럭 9개를 묶어민족혁명당을 만들고 총서기가 되었다. 1938년 10월1일,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만들고 대장이 되었다. 물밀 듯 쳐들어오는 왜병에 맞선 무한 방위전에 들어가는 것을 첫코로 여러 군데를 옮겨 다니며 항일싸움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화북으로 가서 무 정 장군이 얽이잡은 「조선의용군」이 된다. 중경에서 「조선의용대」에 대한 입김을 지키려고 힘쓰던 약산은 김 구가 채잡는 임정에 들어가 군무부장을 맡게 되는데, 일제가 거꾸러질 날이 멀지 않았음을 내다본 것이었다.

▲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약산이 해방을 맞아 개인 감목으로 서울에 온 것은 1945년 12월3일 이었다. 중경과 상해에서부터 임정 보수파들과 싸우며 임정개조론을 펴던 약산은 임정은 조선을 대표하는 정권이 될 수 없다고 보고 반동세력을 뺀 모든 민주주의 세력 모임 두럭인 「민주주의민족전선」얽는 데 들어가 여운형 · 허 헌 · 박헌영 · 백남운과 더불어 공동의장이 되었다. 박헌영이 월북하고 여운형이 좌우 양쪽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셈판에서 허 헌 · 백남운과 함께 민전을 이끌던 약산은 1947년 6월1일 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다시 짠다. 약산이 귀국했을 때 했던 말이다.

나는 작년 8 · 15 그날은 중경 남안에 있었다. 이 남안이란 곳은 중경성 밖 강 하나를 새에 둔 조그만 거리로 우리 조선민족혁명당원들과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나는 그날 오후 7시경 강을 건너 성안에 들어가니 중국인들은 항전승리 만세를 부르며 거리거리 인산인해를 이루어 폭죽을 터뜨리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비로소 일제가 투항한 것을 알고 곧 돌아와 우리 당원과 거주 동포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동맹군의 승리로 조국이 해방된 전축회를 열고 기쁨과 감격 속에 철야로 피차의 감상을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때 나의 심경은 단순한 감격보다는 어떤 공허함과 참괴한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절치액완하며 일제를 우리의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결국 연합군의 힘으로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있어 일제가 투항전야까지 될 수 있는 대로 임정 영도 아래 무장혁명군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그것조차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의 힘을 입어 조국해방이 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감회였다. 그리고 만리이역에서 해방된 조국의 장래가 그때부터 걱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중경에 있는 임정이란 기구가 국내에 들어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혁명정권이 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임정국무위원회를 열어 간수내각(과도적)을 조직해 가지고 국내에 들어가 이 임정의 주권을 전국인민대표 량해(양해) 하에 처리케 하자고 주장하였다.

▲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하는 약산 김원봉

그것은 임정이 해외에 있어 국내 인민과 하등의 연계가 없고 또 국내 인민들은 적의 압박 밑에서 혁명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 해외에 있는 소수 독립운동가라도 비록 3천만을 대표하는 임정을 수립한다는 론거(논거)가 성립되었으나 동맹국의 힘으로 해방이 되고 보니 국내 인민은 연합국의 원조 밑에서 인민 자신의 정권을 건립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니 자연 임정이 과거에 조선 독립을 령도할(영도할) 만한 공적이 없으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북으로 간 약산은 남조선으로 치면 국방장관 자리인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이 된다. 그리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서 푸지위된(예전에, 명령하였던 일을 취소하고 중지시키던 일) 1958년 9월부터 그 이름은 사라져버린다.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는 설, 감옥에서 자결하였다는 설, 그리고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6 · 25가 터지면서 밀양 지역 「보도연맹」 가입자 400여명이 학살당하는데, 약산 형제들인 춘봉 · 작은봉 · 구본 등 네 명이 한밤중에 들이닥친 군경 차에 실려 간 다음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80넘은 약산 부친은 앞뒤 냉갈령(몹시 매정하고 쌀쌀한 태도) 속에 굶어죽었으며, 사촌들까지 잡혀가 오랫동안 수용소에 갇혀있어야 하였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대담, 과격, 치밀하면서도 급진적인 성품의 소유자’로서 ‘거무수룩한 얼굴에 키가 리후리하고 남성답게 잘생긴 투사형’이었던 김원봉 장군 이름은 없다.

(약산 김원봉 편은 4회로 끝맺고, 다음 주부터는 '조국해방전쟁이라며 울먹이던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편이 연재됩니다)

 

작가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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