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작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2
조국과 역사 앞에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김성동 작가의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두번 째 연재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혁명가 약산 김원봉 편이다. [편집자] |
김원봉(金元鳳)은 1898년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진보적 중인 집안으로 부농이었다. 서당에서 진서를 배우다가 소학교를 다녔고, 민족주의자 전홍표(全鴻杓, 1869~1928)가 아람치(자기가 차지하는 몫) 털어 세운 동화중학 2학년에 껴들어갔다. 전홍표를 위험인물로 점찍은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이 문 닫자 소년 김원봉은 5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표충사(表忠寺)에 들어가 한 1년 동안 『손자』 『오자』같은 병서를 읽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 이끌고 왜국 침략국을 무찌른 사명대사를 기려 세운 절이다. 대지르는(찌를 듯이 맞서서 달려드는) 얼이 남달리 센 밀양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이 사명대사와 김종직(金宗直)이다. 김종직은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 자리를 빼앗은 세조를 꾸짖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가 연산군한테 부관참시당한 뼈센(예사롭지 않고 보통이 넘는) 선비였다. 김원봉의 억센 무력항쟁이 나오게 되는 뒷그림이다.
서울로 올라가 중앙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이름난 산과 내를 찾아 나그넷길을 떠나니, 열일곱 여덟 살 때였다. 차분하게 배움에만 골똘하기에는 어지러운 시대였다.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무장력을 기르고자 중국 대륙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무엇보다도 애국애족 피가 뜨거웠던 소년이었다.
이 무렵 김원봉 소년을 놀라게 하였던 것은 스승이며 고모부였던 황상규(黃尙奎, 1890~1931)가 세운이 가운데 하나였던 「대한광복회」였다. 경술국치 바로 뒤 가장 덩치가 컸던 「대한광복회」총사령은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었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君師蔣)으로 흥인지문 밖 20리까지 무찔러 들어갔다가 서대문감옥사형수 1호로 자리개미(죄인의 목을 졸라 죽이던 일, 교수형) 당한 왕산(旺山) 허위(許蔿)선생한테 글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던 박상진은 경남 울산 사람이다.
1904년 양정학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판사시험에 입격한 것이 1910년.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부귀공명이 뒷받침된 판사 자리를 버린다. 1913년 「대한광복회」를 얽이잡아 총사령이 되었으니, 중국에 갔을 때 본 신해혁명에서 배운 바가 컸던 탓이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인민대중을 불 지르는 암살·폭동 같은 무장투쟁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100여 군데에 발판을 마련하여 무장독립군으로 하여금 한꺼번에 일어나 일제를 거꾸러뜨리겠다는 밑그림을 잡고 군자금 마련에 나서게 된다.
이름난 친일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내라는 글월을 보낸 다음 내치는 친일 부호는 죽이기로 하고 대구 시내 친일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거두려다 잡혀 6개월 징역을 살게 된다. 「대한광복회」에서는 상동(上東)광산과 직산(稷山)광산 그리고 경주에서 우편차를 덮쳐 군자금을 모았으며 온 나라 부호들 발기를 만들어 돈을 거두어 들였는데― 장승원(張承遠) · 박용하(朴容夏) · 양재학(梁在學:보성) · 서도현(徐道賢:벌교) 같은 못된 부호는 죽여 버렸다. 옥에서 나온 그의 분부로 광복회원들이 벌인 일이 1917년 11월 경북 칠곡 대지주 장승원한테 군자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난 군자금을 내겠다던 다짐을 어기고 왜경에게 찔러박는(남의 잘못이나 비밀 따위를 남에게 고하다) 바람에 군자금을 받으러 갔던 동지만 제삿고기 만든 「대한광복회」에서 경북관찰사였던 장승원을 죽이게 되었고, 1918년 1월에는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죽이게 된다.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에 나오는 대문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몇 사람들의 특징적인 인간 드라마를 생각해본다. 그 하나가 해방 후 군정청××청장에 올랐던 C씨의 에피소드이다.
일제하에서 C씨에게는 본인의 친일행위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부친은 한말의 관찰사 출신으로 경북에서 갑부로 이름이 높았다. 1915년, 광복단 단장 박상진(朴尙鎭)이 군자금을 청하러 갔을 때 C씨의 부친은 형사에게 밀고해서 매복을 하게 하였다.(『중앙일보』,「잃어버린36년」제29회. 복면한 박상진에게 ‘네 정체를 안다’고 말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또 하나의 설도 있다.) 격분한 박상진이 현장에서 그를 사살해 버린 사건 1막이 있었다.
C씨의 부친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장남은 구한국 관료 출신으로 일제하에서 경북 모 은행장이었다. 차남은 중추원참의를 수차 중임했으며, 대구부의(府議) · 대구도의(導議) · 대구상의(商議) 회두(會頭) · 총력련맹 평의원 ·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기타를 한 사람이다. 이러한 계보로서 볼 때 3남인 C씨는 본인의 친일행위는 없었지만, 그 가문이 친일계층에 속했던 것만은 부인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해방 후 C씨가 군정청××청장에 기용됐을 때 몇 사람이 국일관에서 C씨를 만나 말했다.
“이제 군정의 ××권을 가지셨으니 독립운동자에게도 잘해야 안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C씨의 답변은 냉정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수 없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자에게 죽었는데 어떻게 동정하겠는냐 말이오.”(『중앙일보』, 위와 같음.「의열단원」이었던 유석현(劉錫鉉)증언)
친일 면장 박용하를 죽인 것이 「대한광복회」임이 드러나면서 총사령 박상진이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자리개미당하게 되니, 1921년 38살 때였다. 「대한광복회」라는 이름의 암살단 이념과 인맥은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내뺐다가 나중에 들통나자 세차게 싸우던 끝에 왜경 여럿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 끊은 김상옥(金相玉) 열사와 권 준(權 俊)이 그들이다. (다음에 계속)
작가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지효대선사 상좌가 됐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단편 <목탁조>가 당선됐으나 ‘불교계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승적을 박탈당했으나 그에게는 승적이 없었다. 1978년 한국문학신인상에 중편 <만다라>가 당선됐고 이듬해 장편으로 펴내 반향을 일으켰다. 1983년 해방전후사를 밑그림으로 하는 장편소설 <풍적>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중단됐다. 중편 <황야에서>로 소설문학작품상을 받게 됐으나 주관사측의 상업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창작집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집>, <국수>, <꿈>, 우화소설<염소>, 산문집 <미륵세상 꿈나라>, <생명기행> 등이 있다. 지난 3월에는 제1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