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조선 왕가의 아픈 편린 속에서 태어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윤선도가 지목한 명당 수원을 찾아서

1789년까지 수원의 중심지는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 지역이었다. 현재 우리가 통칭하는 수원의 구읍치(舊邑治)인 것이다. 구읍치는 화산(花山)을 주산(主山)으로 남쪽을 향해 자리잡았다. 화산을 등지고 관청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북쪽은 화산과 성황산이, 서남쪽은 도고산, 남쪽은 남산이 둘러싸고 동쪽이 터진 지형이다. 동쪽으로 황구지천이 막아서고 이 천을 지나면 바로 사방 팔방을 조망할 수 있는 요새지이며 수원의 산성 역할을 하는 독산산성이 우뚝 서 있다. 

▲ 수원부지도(水原府地圖, 규10360), 조선후기 지방지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지역은 사람들이 살만한 양택풍수의 장점보다는 무덤자리로서 음택풍수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지역이었다. 먼저 선조가 1608년 2월1일 사망하자 2월14일 기자헌(1562~1624)에 의해서 이 지역에 선조의 능침을 정할 것을 주장한 바 있고, 효종이 1695년 5월 사망하자 윤선도(1587-1671) 등이 ‘진선진미(盡善盡美)’의 명당으로 추천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송시열을 선두로 하는 서인들의 반대로 이곳은 효종의 무덤자리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약 100년 후 사도세자의 무덤이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주변 고금산에 백제의 고분군이 산재되어 있듯이 이 지역은 음택풍수로서 적당한 곳이었다. 이곳은 서울과의 거리가 90리이고 치소의 북쪽산을 화산(花山)이라 하였다. 이 산을 중심으로 800개의 꽃봉오리가 모여드는 형상으로 표현 되는 바 국면이 좁으며 앞이 탁 트인 지형이 아니다. 수원의 구읍치는 적을 방어하는 데 유리하도록 좁고 막힌 지형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조가 이곳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으로 확정하고

이는 곧 신라 국사(新羅國師)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이 이른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盤龍弄珠之形]”이고, 윤선도(尹善道)가 이른바 “용(龍)과 혈(穴)과 사(砂)와 수(水)가 모두 좋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 리를 가도 없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길지(吉地)이다

라며 음택풍수의 대 길지임을 논하였다. 또한 정조는 이 지역 산줄기의 조종산을 광교산으로 보면서

“먼 곳은 다 말할 수 없고, 광교산(光敎山)이 용인(龍仁)ㆍ광주(廣州)ㆍ수원 세 고을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어서 한강 남쪽 여러 산의 뇌(腦)가 되고, 분맥(分脈)의 조종산(祖宗山)이 되며 ……수십 리의 행룡(行龍)이 몸을 뒤틀며 물을 거슬러 올라가 수원부의 뒷산에 솟아 형국의 본신(本身)이 되었으며”

라고 하여 수원의 광교산에서 군포의 수리산을 거처 칠보산 줄기로, 다시 고금산을 지나 사도세자가 묻힌 화산의 혈처를 산줄기의 맥 흐름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에 정조는 아버지 무덤을 잡아준 고산 윤선도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으며 그를 높이고자 ‘윤고산(尹孤山)’이라 높이 부른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산의 자손을 특별 대우해 줄 것을 지시하였다.

▲ 고산 윤선도 영정 (사진 출처 백과사전)

윤선도(尹善道 : 1587~1671)의 후손인 윤지눌을 등용하거나 윤지운 · 윤지섬 · 윤지홍 · 윤지익 · 윤지식 · 윤지상 · 윤지민 등 시권(試券)에 등록된 자 외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찾아내어 윤선도의 직계 후손은 모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또한 식목조(植木條)로 따로 등록한 돈 1000냥을 특별히 떼어 주어 수원에 집을 사주거나 물건을 사주도록 특별 조치를 취하였다.

유형원이 예언한 새수원 실학의 도시

수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789년 10월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양주에서 수원부 구읍치 화산으로 옮기면서 모든 도시가 통째로 팔달산 동쪽 신읍치로 이전한 것이다.

1787년 7월17일 당시 구읍치에서 팔달산 아래 신읍치로 이사할 민호(民戶)는 244호였다. 차차 이전해야 할 호수까지 합하면 300-400여 호 정도였다. 당시 호의 가옥 규모는 3-4칸이 83호로 가장 많고, 5-6칸이 59호, 11칸에서 12칸이 50호, 13칸 이상이 30호, 2칸 이하가 5호였으며 가장 큰집은 27칸이었다. 그리고 기와집은 단 한집이고 나머지 243호는 초가였다. 수원 구읍치의 도시규모는 관청건물을 제외하고 민간의 살림집은 99%가 초가였다. (김동욱, 「18세기 수원 구읍의 주민 구성과 주택 규모」, 『수원시사』7, 2014)

행정기관과 모든 민가도 이곳을 떠나야 했던 상황에서 그 해결책을 밝혀준 사람은 바로 반계 유형원이었다. 정조보다 130년 전에 태어나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수원의 읍치를 북평(北坪)으로 옮기고 성지를 축조할 것으로 주장하였다. 『반계수록』은 1769년(영조45) 간행되었는데 정조는 일찍부터 이 책을 탐독한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 수원시 항공사진 ( 사진출처 수원시 홈페이지)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에 광주(廣州) 아래 지역인 일용면(一用面) 등을 더해 주고 치소(治所)를 평야로 옮겨 내를 끼고 지세를 따르도록 하면 읍성(邑城)을 지을 수 있다. 거기에다 읍치의 규모와 평야의 대승(大勝)을 더하면 진실로 대번진(大藩鎭)의 기상을 가진 땅이 될 것이니 안팎으로 1만 호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을 쌓는 부역은 향군(鄕軍)이 정번(停番)하면서 내는 재물로 충당해야 한다.”

정조는 유형원을 유용한 학문을 하는 학자라고 칭찬하면서 110여 년 전에 사망한 반계 유형원이 주장한 수원의 읍치를 옮겨야 한다는 논의는 오늘을 예상한 것이며 이는 기이하고 오늘날의 일을 훤히 알았던 것이며 세세한 일이 모두 딱 들어맞았다고 찬탄하면서 성균관 좨주를 증직하고 그 자손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795년(정조 19)에는 유형원에게 이조참판 겸 성균관 제주(祭酒)를 증직하였다.

이러한 반계 유형원의 견해는 시대가 변하면 읍치도 넓고 평평한 곳으로 즉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잘 모일 수 있는 평야지대에 세워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는 근대적이고 실학적인 발상으로 새로운 도시는 상공업의 발달과 이를 잘 유통시킬 수 있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조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수원의 신읍치는 좁고 막힌 구읍치에서 넓고 시야가 확 트인 사통팔달하는 팔달산 동쪽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신읍치를 조성하고 정조는 유형원의 의견대로 광주 땅이었던 일용면과 송동면 지역을 수원에 이속시켰다. 이는 토지가 넓어지고 백성이 늘어나서 수원의 군정이 넉넉해지고 요역도 줄어들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 반계 유형원

신읍치 조성 2년 후인 1791년 정조는 새읍치를 돌아보며 작년보다 집들이 즐비하여졌고 그동안 노고에 대해 수원부사 조심태를 칭찬하면서 새로운 도시가 2년도 안되어 두서가 잡힌 것에 대하여 만족해했다.

당시 이 지역은 지금의 팔달산 수원향교 지역에 몇 채의 집만 있는 허허벌판이었다. 신읍치 조성과 관련하여 팔달산 아래에 살고 있던 여주 이씨 이고의 후손들 분묘 5기가 한꺼번에 옮겨짐에 따라 그에 대한 보답의 형식으로 이운행을 비롯하여 이석조(1713~1796)와 이헌조(1760~1820)를 등용하였다.(다음에 계속)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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