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후계자 순조의 탄생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사진 출처 : 나무위키백과사전]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직후인 1790년 묘자리 덕인지 아들 순조가 태어났다. 후계자의 탄생으로 정조에게는 그 동안 구상하고 있던 꿈을 실현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 정조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을 살펴보면,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을 천봉한 후인 1792년(정조 16)에 정조는 대신과 각신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본심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원통함을 삼키면서 30년을 하루처럼 지낸 사람이 있는가. …… 내가 등극한 이후에 모년(某年)의 의리에 대해 감히 한 번도 분명한 말로 유시하지 못했고, 그들을 죽인 것도 다른 일을 인해서였으며, 그들을 성토한 것도 다른 조항에 의탁해서 하였다. 화가 났지만 감히 말을 하지 않았고 말을 하고자 했으나 …… 이는 다름이 아니다. 선대왕께서 숱하게 내리신 간곡한 유시와 엄격한 하교는 …… 본뜻의 대략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존에 대하여 생각은 있었지만 영조께서 숱하게 내린 간곡한 유시와 엄격한 하교 때문에 이를 본인의 손으로는 진행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정조의 애석하고 한탄스런 얘기를 들은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에 대한 응징과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청하였다.

이런 일은 이미 사도세자를 죽인 후 홍봉한이 예상한 바 있었다. 홍봉한은 영조에게 후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변명의 말이 나올 것이고 정조에게 이를 설득하거나 정신을 빼앗는다면 그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며 영조의 모든 신하들은 일망타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즉위 후 역모로 엮어 죽인 사람들은 사도세자와 연관시켜 죽인 것이 아니고 다른 사안으로 죽였다고 하였다. 다만 아버지의 추숭만큼은 영조의 하교 때문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제 순조가 15살이 되는 갑자년에 왕자리를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 내려가서 상왕이 되어 순조에 의해서 사도세자 추숭작업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을 거론하지 못하는 것도 의리이며 다른 날 새 임금의 의리를 받들어 추숭하는 것도 의리라며 본인이 할 수 없는 추숭사업을 아들로 하여금 실현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라 순조가 성인이 되는 1804년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내려와 통치할 터전, 즉 ‘상왕의 도시’를 염두에 두고 수원에 사도세자의 부활을 위한 도시를 본격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조는 1800년(정조 24) 사망함으로써 이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정조가 이루고자 했던 사도세자의 추숭은 약 100년이 지난 고종 대에 와서나 이루어졌다. 고종은 1899년 9월1일(양력) 장헌세자를 장종(莊宗)으로, 능호(陵號)를 융릉(隆陵)으로 추숭하였으며, 이후 11월17일(음력)에 장종을 장조(莊祖)로, 정종(正宗)을 정조(正祖)로 높이면서 황제 칭호로 고쳤다.

정조의 화성건설 준비와 정약용의 기본 설계

▲정약용 영정 [사진 출처 : 백과사전]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인재 양성과 연구사업의 기초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이는 다른 왕들과 구별되는 정조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 중의 하나이다.

특히 즉위 1년 후인 1777년 2월에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중 5020권을 은 2150냥을 지급하고 사오도록 명한 것이다. 원래는 <사고전서>를 사려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부득이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들어진 <도서집성>을 사게 되어 북경에서 502궤짝을 수레에 실어와 규장각에 비치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배다리〔舟橋〕를 만드는데 그 규모와 제도를 올려 성공한 바가 있어 주상께서 성제(城制)에 대해 조목조목 올릴 것을 명하여 본인이 화성을 기본 설계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윤경(尹畊)의 보약(堡約)과 유성룡(柳成龍)의 성설(城說)에서 좋은 제도만 채택하여 모든 초루(譙樓)ㆍ적대(敵臺)ㆍ현안(懸眼)ㆍ오성지(五星池) 등 모든 법을 정리하여 왕에게 올렸다.

또 정조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기기도설(奇器圖說)> 등의 중국책을 다산에게 내려 인중법(引重法)ㆍ기중법(起重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고금도서집성>에는 중국의 성제도 실려 있다. 그리하여 중국 성제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인 벽돌 쌓는 법을 접목시켜 화성에서는 벽돌과 돌이 만나게 된다. 이는 명․청대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북학’의 수용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성설>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 <성설>의 내용은

1. 푼수(分數)로 성곽의 둘레와 높이를 계산하여 이를 근거로 모든 돌의 필요량과 기술자와 인부 및 비용은 모두 이것에 기준으로 합니다.

2. 재료(材料)로는 돌을 사용합니다.

3. 호참(壕塹)을 파서 흙을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4. 축기(築基), 터쌓기로 자갈로 기초를 다집니다.

5. 벌석(伐石)으로 돌을 뜰 때 대략 다듬게 하여 무게를 감소시켜야 실어 나르기가 편리합니다. 또한 돌덩이의 크고 작은 것을 몇 등급으로 나누어 용도에 맞추어 자릅니다. 성을 쌓을 때는 큰 돌은 아래층에 사용하고, 중간 것은 중간층에, 작은 것은 위층에 사용합니다.

6. 치도(治道)로 돌이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성이 있는 곳까지 곧고 평탄하게 하여 수레를 끌고 소를 몰 때 망가지거나 뒤집히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합니다.

7. 조거(造車)로 앞 뒤로 저울같이 기울일 수 있는 유형거(游衡車))의 제도입니다.

8. 성을 쌓는 법인데, 성이 쉽게 무너지는 것은 그 배[腹 성의 중심부]가 튀어나온 때문입니다. 똑바르게 쌓는 법이 오히려 배가 튀어나오는 폐단이 생기므로 점점 안으로 들여서 쌓아 올립니다.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 [사진 출처 : 백과사전]

글이 올려지자 위의 8가지 원칙이 임금이 지은 <어제성화주략>으로 채택되었다. 이어서 규장각의 도서를 내리니, 곧 <기기도설(奇器圖說)>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를 참고로 하여 다음과 같이 성의 제도와 그림을 아울러 작성하여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첫째는 성문을 방비하기 위한 옹성도설(甕城圖說)입니다.

둘째는 포루도설(砲樓圖說) 과 함께 적루(敵樓)ㆍ적대(敵臺)ㆍ포루(鋪樓)ㆍ노대(弩臺) 등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

포루(砲樓) 등과 같이 여러 종류의 누(樓)나 대(臺)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의 부속물로서, 치(雉)를 만드는 제도만은 같다. 따라서 치에 여러 누나 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치는 머리가 성 밖으로 불쑥 튀어 나와서 성벽의 바깥 부분을 한눈에 살필 수 있고, 또 치와 치가 서로 마주 보고 있게 되어서 탄환이나 화살이 서로 미칠 수 있으므로 적병이 성벽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 성 위의 군사들이 안전하고 여유있게 싸울 수가 있으니, 진실로 절묘한 제도입니다.

적루를 만드는 제도는 모나게 하거나 길게 하기도 하며, 또는 몇 층씩도 만듭니다.

“노대(弩臺)는 위쪽은 좁고 아래쪽은 넓으며 높이는 성벽의 높이와 같게 하되 위에는 통로를 넓게 둡니다.

적대(敵臺)를 만드는 제도는, 적대의 전체가 성벽 바깥쪽으로 길게 나오는 것이 좋으며, 옆으로 넓게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 골라, 그 법에 의하여 치(雉)를 만들고, 치마다 포루(砲樓)ㆍ적루(敵樓)ㆍ적대(敵臺)ㆍ포루(鋪樓)ㆍ노대(弩臺) 등을 세우도록 하고

화성에는 포루 7개를 북문의 좌우에 각각 하나씩, 남문의 좌우에 각각 하나씩, 장대(將臺)의 남쪽에 두 군데, 서문의 남쪽에 하나를 설치합니다.

적루 4개는 북문의 좌우에 하나씩, 남문의 좌우에 하나씩을 설치합니다.

적대 9개는 남문과 북문의 좌우에 각각 하나씩, 동문과 서문의 좌우에 각각 하나씩, 동곽문(東郭門)의 북쪽에 하나를 설치합니다.

포루 2개는 북문의 서쪽에 하나, 동문의 북쪽에 하나를 설치합니다.

노대 하나는 . 장대(將臺)의 북쪽에 세웁니다.

각성(角城) 7개는 동암문(東暗門)의 북쪽에 둘, 동곽문의 남쪽에 둘, 동문의 남쪽에 둘, 서문의 북쪽에 둘을 세웁니다.

셋째는 현안도설(懸眼圖說)로 현안이란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성에 부속된 장치입니다. 그 제도는 타안(垜眼 타에 뚫어 놓은 구멍)의 시초(始初)에 불과하지만, 그 쓰임새는 매우 긴요합니다.

그 방법은, 타(垜)마다 가장 중심 부분에 성의 평면으로부터 구멍을 뚫는데, 크기에 알맞게 벽돌을 구어서 쌓되 점점 밑으로 내려가면서 층계를 이루며 좁아지게 쌓아, 적병이 성벽 아래에 이르면 빠짐없이 단번에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화살ㆍ돌ㆍ총 등을 모두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방법입니다.

이제는 옹성과 여러 치의 성벽 전면(前面)에만 각각 몇 개씩의 현안을 두었으니, 그 제도는 아래 그림에 자세합니다.

넷째는 누조도설(漏槽圖說)로 누조는 적병들이 성문을 불태우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문 위에 벽돌로 오성지(五星池)를 만드는데, 모양은 돼지 구유와 같이 길게 성문의 길이와 맞게 설치하여 적병이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려고 하면 물을 내리 쏟을 수도 있고, 예리한 창을 던질 수도 있고, 화살을 쏠 수도 있고, 돌쇠뇌로 돌을 쏠 수도 있다.”

하였습니다. 이제 위의 두 방법을 참고하여 누조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제도는 곧 오성지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문에는 이미 옹성이 있어 적병들이 접근하여 불을 놓을 수가 없으므로 다만 옹성의 문 위에만 설치키로 했습니다. 제도는 아래 그림에 자세합니다.

다섯째는 기중도설(起重圖說)로 성(城)은 돌로 쌓는 것이기에 돌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돌을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돌을 캐내고 운반하는 데 진실로 힘이 들고 경비가 많이 듭니다. 그것은, 무거워 밑으로 떨어지려는 성질을 가진 돌을, 억지로 들어서 높게 올리려는 때문입니다.

성역(城役)을 마친 뒤에 정조는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며 다산을 칭찬하였다.

그렇지만 위에서 올린 모든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성의 둘레 3,600보는 4,600보로 늘어났고 호참은 파지 않았으며 성제도 벽돌을 이용한 옹성, 적대 등이 탄생했다.

특히 현안은 중국의 병서에만 있고 실제 건축되어 본 적이 없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방어시설물이다.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지 않은 장대, 공심돈, 수문, 암문 등이 축성 과정에서 추가 설치되었고 ‘근총안 통천미석’은 조총으로 근접하는 적을 살상하는 동서양 어디에도 없는 방어시설물인 것이다.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