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조선 왕조의 가슴 아픈 가족사 중 하나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얘기다. 정조는 익히 알 듯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관계를 딛고 성군의 길을 걸었던 조선의 22대 임금. 이달호 수원화성연구소 소장이 조선 왕가의 아픈 편린 속에서 태어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에 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편집자]

 

▲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다룬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세손을 위협하는 세력들

나이 들어 판단력이 흐려진 영조를 끼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홍인한과 정후겸 무리들을 한편으로, 세손을 둘러싸고 있는 궁료들로 지칭되는 홍국영(洪國榮), 정민시, 김종수 등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세력들 간에 정치적 갈등은 더욱 치열해져 갔다. 특히 홍인한, 정후겸, 화완옹주 등은 홍국영을 모두 배척 질시하였다.

홍인한이 정후겸에게 왜 아첨하였을까. 이는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사안의 생사여탈권을 쥔 영조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후겸에 대한 영조의 신임은 어디서 왔을까. 이는 영조와 화완옹주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화완옹주에 대한 편파적인 끝없는 사랑이 그녀의 양아들인 정후겸에 대한 신뢰로 발전한 것이다. 영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화완옹주의 위세는 영의정의 권세를 뛰어넘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녀의 양자 정후겸은 19살에 당상 정3품 승지에, 20살의 나이에 개성유수에 임명되는 등 초고속 승진이 상상을 초월하였다.

정조보다 나이도 3살이 위였던 16세의 나이에 궁중을 출입하면서 막 애티를 벗어난 13살의 정조를 대등한 관계로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화완옹주가 영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는 사도세자가 3살 어린 화완옹주를 협박하여 1760년 7월 영조가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기게 한 일과 영조를 설득하여 온양을 다녀온 일은 그녀의 수완도 수완이겠지만 영조와의 관계가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홍인한은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동생으로 출세의 가도를 걷고 있었던 실력자였다. 그 또한 정후겸과 결탁하여 정조를 핍박하였다는 혐의로 정조 즉위년에 사사되었다. 1775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좌의정인 그는

“동궁이 이판과 병판을 알 필요가 없고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라며 왕위 승계에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영조의 마음이 실제 그러하지 않은 줄을 알고 한 것이며 화완옹주가 함정을 놓은 것을 미리 알고 이를 피하려 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따라서 세손을 도우려 한 것이지 권세를 쓰려고 대리청정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같은 집안인 홍국영과의 사적인 알력으로 인해 역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뿐이라는 것이다.

▲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다룬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이 또한 다시 한번 살펴볼 대목이다. 정조 자신은 <존현각일기> 등에서 홍인한을 자신을 반대한 ‘악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중간자 역할을 했던 홍국영의 이간질에 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혜경궁 홍씨는 홍인한과 홍국영은 같은 집안이지만 지울 수 없는 원한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정조 즉위 후 벼락출세한 것이나 그 위세를 믿고 경거망동하다 몰락한 홍국영을 보면 일리 있는 항변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겠다.

혜경궁 홍씨의 변명은 작은 아버지 홍인한이 영조의 알 수 없는 속뜻을 헤아려 영조의 입맛에 맞게 발언한 것뿐이고 대리청정에 대해 영조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격렬하게 화를 내어 세손에게 해가 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화완옹주를 등에 업은 정후겸, 홍인한 등과 결탁한 사람들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집안의 김귀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주 김씨들, 영조의 딸을 둘씩이나 낳은 숙의 문씨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들이 정조의 왕위계승을 방해한 것은 바로 후계자를 바꾸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정조는 스스로 ‘영조의 병세가 더욱 깊어져 외롭고 위태롭던 나로서는 저들의 큰 위세가 두려워 이미 엄준한 말로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온화하고 겸손한 말로써 그 근본을 탐지하는 것이 나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정조는 지난날 홍국영을 중용한 것도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 구덩이에 들어 있는데 흉적의 집안과 원한을 맺은 사람은 오직 홍국영 한 사람이므로 그를 쓴 뒤에야 흉적과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을 발판으로 조정에 설 수 있었다며 그에 대해서는 염려한 바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국영을 총애한 것은 적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며 사람을 잘못 쓴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있다.

▲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을 다룬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정조의 여인들 비운의 먹구름

1786년 병오년은 정조 나이 35살, 즉위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문효세자와 후궁 의빈 성씨가 모두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조는 1762년 11살의 나이에 세손의 신분으로 2월2일 혼례를 치렀다. 세손빈은 청풍부원군 김시묵의 딸이었다. 홍봉한이 청풍부원군 김시묵의 환갑잔치에 갔다가 ‘효의왕후’를 보고 점을 찍은 것이다. 사도세자 또한 마음에 들어 동생 화완옹주를 사주하여 영조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였다. 영조는 윤득양의 딸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데 홍봉한과 화완옹주의 입김이 통하였는지 세자빈에 효의왕후가 낙점되었다.

효의왕후는 정조보다 1살 어린 1753년생으로 세자를 생산하지 못하였는데 이 이유는 화완옹주가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를 이간하였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화완옹주가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를 이간질하여 금슬이 좋지 않았으며 정조가 처갓집에 호의를 갖는 것을 방해까지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더 나아가 화완옹주는 효의왕후가 아들을 낳을까 두려워하였고 정순왕후 쪽에서는 정조가 아들을 못 낳을 병이 있다는 낭설까지 퍼트렸다고 한다. 효의왕후는 1821년에 사망하여 69세까지 장수하였으며 건릉에 정조와 함께 묻혀 있다.

정조가 1776년 3월 즉위하면서 세손빈은 왕비가 되었다. 이때 모든 실권을 장악한 홍국영이 정조의 후사가 없는 틈을 타 외척이 되고자 시도한다. 1788년 효의왕후는 26세로 임신 가능성이 있었지만 홍국영은 배앓이 병이 있다며 정순왕후를 부추겨 후궁을 간택하였다. 1778년 6월27일 열세 살 된 그의 누이를 후궁으로 들여 가례를 거행하였다. 이 여인이 ‘원빈’으로 1년도 못되어 1779년 5월7일에 죽었다. 홍국영은 누이 죽은 것에 중전을 의심하여 중전의 내인들 여럿을 잡아가 칼을 빼들고 무수히 협박까지 하여 조사하였다.

홍국영은 더 나아가 정조의 배다른 동생 인(䄄)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이라 하였다. 결국 담은 정조의 아들이 되어 동궁이 된 셈이었다. 이는 정조가 후계자를 낳을 가능성을 배제한 것으로 홍국영의 끝없는 권력욕이 빚어낸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결국 홍국영은 이 사건으로 몰락하였다.

정조의 세 번째 여인은 화빈 윤씨였다. 1780년 3월10일 판관 윤창윤의 딸 윤씨를 화빈으로 책봉하고 12일에 가례를 올렸다. 1781년 1월 임신하여 11월2일 임신 10개월이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후 일은 알 수 없고 자식 없이 1824년 1월 사망하였다.

1782년 9월7일 화빈윤씨의 지밀나인이었던 의빈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았다. 그리하여 1783년 2월19일에는 소용성씨에서 의빈(宜嬪) 칭호를 받았다. 성씨는 1784년 윤3월20일에 옹주를 낳았으나 5월에 사망하였다. 정조의 여인들 중 의빈성씨와의 금슬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는 대목이다.

1786년 병오년은 정조에게는 비운의 해였다. 31살에 얻은 아들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5살에 사망한 것이다. 먹구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9월14일에 의빈성씨가 6개월 된 아기를 임신한 상태에서 사망한 것이다.

이 비운의 사건에 대해 정순왕후가 빈청(賓廳)에 언문 전교를 내려 이들의 죽음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며 역적 토벌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주모자로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과 포도대장을 지낸 구명겸이 지목되어 처형되고 은언군 이인은 강화부에 정배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홍국영이 누이동생 원빈의 양자로 삼으려고 했던 이담의 어미는 구명겸의 생질이었기 때문이다.

35살에 이른 정조의 후계자 문제는 더욱 암담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정조의 다섯 번째 여인으로 주부 박준원의 딸 18살의 수빈박씨가 간택되어 1787년 2월 가례를 올렸다.

문효세자와 의빈성씨가 같은 해에 동시에 죽은 사건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자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은 1789년 7월11일

“아, 병오년(1786) 5월과 9월의 변고(變故)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생모(生母)인 의빈(宜嬪)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며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을 찾아 새롭게 옮길 것을 건의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게 되는 계기는 바로 ‘병오년의 변고’인 것이다.

1789년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구읍치 화산(花山)으로 옮긴 다음해인 1790년 6월18일 수빈박씨는 순조를 생산하였으며 1822년 12월 5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달호 소장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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