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조선 왕조의 가슴 아픈 가족사 중 하나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얘기다. 정조는 익히 알 듯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관계를 딛고 성군의 길을 걸었던 조선의 22대 임금. 이달호 수원화성연구소 소장이 조선 왕가의 아픈 편린 속에서 태어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에 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편집자]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정도를 벗어난 모든 행위의 근본 원인을 ‘광증’에서 찾았다. 생모 영빈 이씨 역시 ‘병’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호소하였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정말 미친 것일까. 사도세자가 미쳤는가에 대해 학계에서는 절대긍정과 절대부정의 두 견해로 갈리고 있다. 정조는 아버지가 미쳤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나 부인 혜경궁 홍씨는 ‘광증’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영화 ‘사도’ 중 한 장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풍산 홍씨의 집안일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치우침이 있어 자기합리화의 경지에까지 이르지만 ‘궁중생활’의 세세한 부분에서는 꾸며낸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한중록>에 묘사된 사도세자와 영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면서 사도세자가 정말 미친것인지, 미쳤으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사도세자만 미친 것인가 더듬어 보자.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1744년 혼례를 올리고 어린 나이로 궁중에 들어왔다. 사도세자가 세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할 정도로 느린 행동에 대해 의아해했다.

1748년 영조가 가장 편애하던 화평옹주가 죽자 영조와 영빈 이씨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14살이었다.

혜경궁은 이때 슬픔으로 사도세자를 돌보지 못하여 장난질, 활쏘기, 칼쓰기, 가무, 풍악, 그림 그리기, 기도 주문서, 잡서 등에 빠지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예술적 소질이 많았다고 보여지나,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시각에서는 잡학에 빠져 놀아나는 짓거리였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병증이 1749년 15살 나이에 대리청정을 한 후에 난 탈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대리청정은 영조의 병적인 성격이 사도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걸고넘어지는 그물망이었다. 나랏일 처리하는 데서 사사건건 잘하면 혼자 결단한다고 야단, 잘못하면 자기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지 않았다고 야단, 이처럼 사도세자의 입장에서는 진퇴양난이었던 것이다. 잘해도 욕먹고 잘못해도 욕먹는 상황에서 천재지변마저 사도세자의 탓으로 돌려 두려워 떨게 만들었다.

일반 가정에서도 감당하지 못할 부자간의 갈등관계는 더욱 첨예화되었고, 국가정책의 의사 결정이라는 막중하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더욱 더 심해졌다.

반면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사고한 예는 수없이 많다. 정조가 태어나기 전 1751년 11월에 용꿈을 꾸었으니 귀한 아들을 낳을 징조라고 해석한 예나, 1759년 6월 정조의 왕세손 책봉을 기뻐하여 세손을 귀하게 대하는 행위, 같은 해 6월 영조가 정순왕후를 맞이하여 예를 차릴 때 예절에 어긋나지 않았던 사례 등은 사도세자가 항상 미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광증이 절정에 달했던 1760년 7월18일부터 8월6일까지 온양온천을 다녀온 바가 있었는데 이때의 행동은 모두의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성군의 모습이었다. 이때 사도세자가 훗날인 1789년에 이장되어 묻힐 수원 화산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촌로들과 담화한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져 온다.

반면 영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도 사도세자 못지않았다. <한중록>을 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마음에서 우러나서 가르친 일은 없고, 사람들이 모인 데서 흉을 보거나 여러 대신들이 나랏일 보고할 때나 많이 모인 곳에서 굳이 세자를 불러 글뜻을 물어 자세히 대답을 못하면 추궁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더욱 두렵게 느끼고 겁이 나서 오히려 답을 잘 못하였다는 것이다.

사형 죄인을 심사하는 일이나 형조의 죄인 심문할 때 세자를 자주 곁에 앉히거나 말을 시킨 뒤 귀를 씻는 행위, 1752년 12월 임금 자리를 넘겨주겠다며 사도세자를 시험에 들게 하였고 사도세자의 울화병이 도지는 횟수가 늘어났다.

1755년까지는 임금을 뵐 적과 신하 대할 때는 평상시처럼 예사롭다가 1756년경 광증의 도가 심해지면서 1757년부터 옷을 찢어버리는 의대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를 보러 가려면 의관을 정제하고 가야하는데 이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1757년 6월부터는 광증이 일어나면 내관과 내인들을 죽이기 시작하였다.

▲ 영화 ‘사도’ 중 한 장면

1758년 영조의 첫 번째 부인 정성왕후의 소상 때 사도세자를 숙종 능에 데리고 가다가 비가 쏟아지니 날씨 이런 것이 세자 데려온 탓이라고 다시 궁궐로 쫒아버린 일이 있었다. 영조의 의지와 행동도 ‘미친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758년 2월 영조가 내관들을 죽인 일을 알고 그 이유를 물어보니 사도세자는 마음의 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풀린다고 하였다. 영조가 왜 그러하냐고 물으니 사도세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렇다고 하였다. 영조가 “왜 상하였느냐“고 물으니 ”아버지께서 사랑치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라며 사람 죽인 수를 하나도 감추지 않고 세세히 고하였다.

이와 같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증상을 정확하게 진술하는 모습은 울화가 치밀지 않으면 평상시에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며 정상적으로 사고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자기를 죽이려는 낌새를 1758년경에 알아차렸다. 반면 미친 증상이 심해진 1759년 2월 정조의 왕세손 책봉을 기뻐하는 모습에서 정상적인 태도도 간혹 보였다. 1760년 사도세자의 병환도 더해지고 영조의 꾸지람도 더해지면서 자살 의욕도 내비치고 칠순 노모 영빈 이씨에게도 불손한 말을 하고 1761년 정월에는 자기 자식을 둘이나 난 빙애를 때려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광증의 도가 더해져서 1월부터 3월 사이에는 궁궐 밖으로 나다니고 3월 말에는 몰래 평양에 가서 20일 만인 4월20일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1761년 12월에 세손빈 간택시 영조가 미처 신부가 들어오기도 전에 격노하여 사도세자에게 소리 지르며 간택을 보지 말고 돌아가라는 일이 있었다. 이는 봉건적인 가부장적 권위와 왕권을 한손에 거머쥔 영조의 ‘히스테리’ 이외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행위였다.

1761년경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언급한 대목들은 사도세자가 치밀하게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손을 귀하게 하오시니 세손이 있는 이상,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은가”, “날 미워하시어……나를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1764년에 정조가 효장세자의 후사가 될 일을 미리 헤아린 것이다.

그 수많은 비행을 저지른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끌려가 죽기 바로 직전 혜경궁 홍씨에게

“아마도 이상야릇하이, 자네는 다행히 살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자네 아무래도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고, 내가 오늘 나가 죽게 되었기에 꺼림칙하여, 세손 모자를 아니 쓰게 하려는 그 마음심보를 알겠네.“

▲ 영화 ‘사도’ 중 한 장면

본인은 죽게 되는데 모두 자기의 죽음은 모른 체하고 세손 정조와 오랫동안 잘 살 궁리나 한다며 혜경궁 홍씨를 힐난하고 있다. 이 대목이야말로 정상적인 사고라고 할 만하다. 1762년 윤5월13일 휘령전에 끌려가 자결하라는 영조의 명령에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으니 이제 하라 하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라며 죄를 비는 장면도 정상적인 행위로 보여 진다.

사도세자의 ‘울화병’이란 마음이 답답하여 일어나는 병으로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면 분노가 폭발하면서 제1차 원인제공자인 영조에게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아래 사람들에게 분풀이식으로 비정상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기행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광증은 항상 지속되었던 병이 아니고 심해질 때와 수그러들 때의 기복이 있었다고 보여지며 정상적인 사고를 할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완전히 이성을 잃는 상태를 반복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세자 생애의 후반부에 가서는 울화의 고조 상태가 더욱 커지고 자주 빈발하였겠지만 영조 또한 종류는 다르지만 또 다른 ‘히스테리 병증’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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