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호 소장의 ‘교과서엔 없는 이야기’

조선 왕조의 가슴 아픈 가족사 중 하나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의 얘기다. 정조는 익히 알 듯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씻을 수 없는 관계를 딛고 성군의 길을 걸었던 조선의 22대 임금. 이달호 수원화성연구소 소장이 조선 왕가의 아픈 편린 속에서 태어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에 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편집자]

수원 시내 중심에서 고적의 향기를 뿜어내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주제로 학위도 받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기저기서 강의도 하고 글도 많이 써왔다. 마흔이 넘어 늦깎이 학예직 공무원이 된 후 ‘화성’이 밥을 먹여준 셈이다. ‘화성’을 주제로 하는 박물관까지 만들고 관장까지 지냈으니 행운이었던 셈이다.

그동안 5.7Km에 달하는 ‘화성’을 수백 번도 더 돌면서 ‘화성’ 건설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글도 발표했다. 지금까지 발표한 글들은 논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글들을 쉽게 풀어 쓴 것을 이번에 희망의 새언론 민플러스에 연재하게 됐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화성’ 건설의 배경은 정조의 어버지 사도세자를 복원하기 위한 ‘사적인 염원’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사적인 염원’이 ‘공적인 신도시’, ‘공적인 문화유산’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글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양파를 벗기듯이 정조의 ‘화성 신도시 건설’에 대해 알아보자.

제1편. 사도세자 진짜 ‘역모’로 죽었나?

임오년(1762년) 정조의 나이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 사도세자는 쌀이 가득 차야할 뒤주에서 8일간 한 톨의 쌀도 못 먹고 28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왜 이런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영조의 성격 형성에 미친 사회역사적 조건은 커다랗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조는 개인 가족사로 보면 터럭 하나 꽂을 곳도 없는 생모 숙빈 최씨의 미천한 출신성분에 대한 열등감이 가슴에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러기에 첫 번째 아들 효장세자의 빈은 소론계 명문 조문명의 딸을 간택하였고 두 번째 아들 사도세자의 빈은 선조의 부마인 풍산 홍씨 홍주원의 집안에서 취하였다.

또한 영조의 어깨를 짓눌렀던 또 다른 바위 같은 중압감은 ‘경조 독살설’이었다. 즉위하자 4년 만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조 정권의 정통성에 치명타였다. 언제든지 권좌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압박감은 영조로 하여금 항상 역모의 가능성과 신변의 위험성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혜경궁도 <한중록>에서 “영조께서 이런 일들을 세세하게 신경을 써 영조께서 병환이 되신 듯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첫 번째 아들 효장세자가 1728년 10살에 요절하고 7년이 지난 1735년 영조 나이 42살에 태어난 사도세자는 영빈 이씨가 옹주 다섯을 낳은 뒤 귀하게 태어난 아들이었다. 이는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을 이을 보배 같은 피붙이였다. 오랫동안 후계자가 없어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원자(元子)가 탄생한 것이다.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거나 돌도 지나지 않아 일어서는 등 바라보는 모습에서 그 기국과 도량이 이미 드러나 우뚝하게 덕을 성취하기에 부합하였다고 한다. 장성하여 총명하고 인효(仁孝)함을 꼭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

그리하여 1년이 지난 1736년 3월5일 원자를 왕세자로 삼았으며 10살도 안된 1743년 3월17일 관례를 거행하였다. 영조를 이을 후계자로서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광증을 얻게 된 원인의 시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집복헌에서 백일 만에 멀리 떨어진 ‘저승전’으로 옮겨져 보모에게 맡겨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환관과 궁첩으로, 경종과 그 부인 어대비가 부리던 기가 승하고 정이 없는 인간들인데 그들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다.”

여기서 상궁들이 사도세자를 병정놀이에 빠져들게 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도 독특하게 분석하였는데 영조는 꼼꼼하고 민첩하며, 사도세자는 과묵하고 행동이 날래지 못한 성격으로 영조는 자신이 묻는 말에 사도세자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여 답답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로써 사도세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영조는 머리끝까지 화를 내는(책망하심이 자애에 앞서시고) 등 부자 사이는 ‘사랑(애)’에서 ‘증오’의 관계로 치달아 갔던 것이다.

급기야 1762년 5월22일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허물 10가지’를 알려 영조가 그의 비행을 알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나경언과의 대면을 요구하였지만 묵살되고 그 배후도 밝혀지지 않은 채 나경언은 참수 당하게 되었다. 이는 나경언을 이용하여 사도세자를 음해하려는 세력들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세력은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홍계희, 김상로,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등으로 추정된다.

▲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이후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로서도 차선책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세자의 누이이자 친딸 화협옹주의 남편 신광수를 죽이려 한 일과 사도세자가 수구를 통하여 영조가 사는 윗 대궐 경희궁으로 가겠다고 한 말이나 칼과 무기로 영조를 죽이겠다는 의사표시가 자주 반복되었다. 이는 일상적인 부자 사이에서의 ‘살의’가 아니라 군신 관계에서의 ‘역모’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빈 이씨는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살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세손을 구하는 일이 옳다고 판단하여 영조에게 대처분을 건의하게 된다.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없으니 임금님의 몸을 보호하시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 하는 일이 옳다며 대처분을 건의하였다. 아울러 사도세자가 병으로 그리된 것이니 세손 모자에 대한 배려 또한 부탁하였다.

이때만 해도 영빈 이씨도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굶어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세자는 1762년 윤5월 13일에 뒤주에 갇혀 윤5월 21일 8일 만에 28살의 젊은 나이로 굶어죽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한나라 왕위를 찬탈한 왕망이 노예를 죽인 아들에게 법의 준엄함을 알리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예,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알렉세이의 황태자 지위를 박탈하고 감옥에 감금, 고문으로 죽인 예들이 있지만 아들을 ‘굶겨 죽인’ 예는 영조가 유일하지 않을까?

이달호 소장은 역사학 박사로 수원화성박물관장을 역임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장을 맡고 있다. 학위논문으로 <화성 건설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18세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화성건설>, <선각자 이준열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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