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33) 양병집 : 넋두리(1974)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미국 포크계에 살아있는 전설로 70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음반 발매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밥 딜런. 만약 밥 딜런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가수로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절대로 가수로 활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노랫말이 반전과 평화를 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청년시절 반전 시위 참여 탓일까? 절대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박정희의 유신시대 표현으로 말하면 ‘창법미숙’이다. 

창법미숙이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잣대로 가수들을 재단하고 음반에 불법 낙인을 찍던 시대. 한국 포크계의 거장으로 분류되는 한대수, 서유석, 김민기와 더불어 언더그라운드의 최고 가수인 양병집도 피해자였다. 

양병집은 지난 1972년 '월간팝송‘이 주최한 가요제에서 3위로 입상한 뒤 1974년 번안곡과 자작곡을 함께 묶은 데뷔 앰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음반이 세상과 마주한 건 고작 3개월뿐이었다. 그의 노래 대부분에 금지곡 딱지가 붙여졌고 음반은 전량 폐기처분되었다. 한두 곡이면 이해가 되겠지만 노래 대부분이 금지곡이었다. 대부분 이유가 바로 그 창법미숙이었다. 

그런 탓에 그의 노래는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려졌다. ‘타복네’는 서유석이 ‘타박네’로 불렀고, ‘소낙비’는 이연실이 불렀다. 김광석의 목소리로 더 잘 알려진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도 양병집의 ‘역’을 제목만 바꾼 것이다. 

산업화로 불리는 박정희 시대는 모든 게 중앙집권적이었다.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남자가 머리를 기르는 것은 금지되었다. 여성들이 무릎 위 20cm의 스커트를 입으면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대통령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은 소리를 하면 ‘대통령 모독죄’가 성립되는 시기였다. 

산업화란 이름으로 건설강국을 만든다고 경복궁의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만들고 그 위에 단청을 만들어 고전을 현대로 되살렸다고 자화자찬하던 대통령이 ‘광화문’이란 현판을 매달아 놓은 그 시절이었다. 문화재를 복원한다면서 죄다 콘크리트로 발라버리던 시절.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희망적인 내용만을 노래해야지 세상에 대한 비판이나 암울하고 답답한 현실을 노래하면 무조건 금지 딱지를 붙였다. 그렇게 금지곡을 만들다가 가수 자체에 대해서 ‘창법미숙’이란 말도 안 되는 딱지를 붙여 활동을 금지시킨 것이다. 

음악인으로서 누구보다 뛰어난 감성을 가졌던 양병집은 이후 직장생활을 하다 신촌에서 ‘모노’라는 까페를 만들어 후배 가수들의 음반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죽고 양병집의 노래가 다시 불려질 수 있으리라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80년 이후 발표된 그의 노래들은 전두환이라는 새 군사독재 아래서 방송에 소개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음악을 포기하고 호주로 이민 갔던 양병집은 87년 민주화 이후 자기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발표하고 최근에는 후배들과 함께 언더그라운드에서 자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최현진 담쟁이기자 단국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매체인 ‘코리아포커스’ 기자로 일했으며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의 교육위원을 맡기도 한 DMZ 기행 전문해설사다. 저서는 <아하 DMZ>, <한국사의 중심 DMZ>, <DMZ는 살아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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