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35) 문주란 : 공항의 이별(1972)

▲사진 : 유튜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4년 서독을 방문하였을 때 뤼브케 서독 대통령과 기술 원조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 정부는 광업 기술을 향상시킨다는 명목 아래 1963년 12월 서독 석탄광산협회와 협정을 맺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의 경공업 육성책으로 인해 농촌은 붕괴되고 도시에서는 실업과 외화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독의 부족한 노동력과 한국의 실업 및 외화부족 현상이 만나 이뤄진 결과가 한국 노동력의 서독 광산 파견이었다.

최초 서독 광산 파견은 3년 계약으로 500명을 모집하였다. 당시의 실업난과 한 달 160달러의 높은 월급으로 인해 4만 명이 넘는 신청자들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서독 광부로 신청한 사람 대부분은 대학 졸업생이나 대학 중퇴생 등으로 채광 작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파견 초기 이들은 생소한 작업환경 속에서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66년 1차 파견이 끝나고 돌아온 146명의 파견자 전원이 1회 이상의 골절 등 병을 앓고 있었다.

65년부터는 서독과 간호사 파견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국 여성들이 간호조무사로 나갔다. 이들은 간호사라고 하지만 정식 간호사의 업무가 아닌 시체를 닦는 일이나 환자의 대소변을 받는 등 대부분 간호조무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는 63년부터 78년까지 2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이 매년 한국에 송금한 금액이 5000만 달러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한국 GDP의 2%에 이르는 액수로 한국 산업화의 기반을 다졌다.

서독으로 간 광부는 계약직으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간호사의 경우 계약을 연장하면서 독일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계약이 끝나가는 광부들이 파독 간호사와 결혼하는 방법 등으로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 이민자로 남는 경우도 생겼다.

이렇게 못사는 나라의 설움을 안고 서독으로 파견되는 광부, 간호사들과 가족의 이별을 담은 노래가 바로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이었다. 이 노래는 1972년 발표되었는데 서독으로 떠나는 이들과 가족의 이별의 아픔을 담아 널리 애창되었다. 그 뒤 문주란은 ‘공항대합실’, ‘공항에 부는 바람’, ‘공항으로 가는 길’, 잘있거라 공항이여‘ 등 공항 시리즈를 연이어 히트시키게 된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애달픈 삶은 박정희의 서독 방문 당시 그들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일화 뒤에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서독 파견 노동자들을 활용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박정희가 서독 파견 노동자들의 월급을 담보로 빌렸다는 차관이 사실은 장면 정부 당시 이미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또 간호사 파견도 정부 차원에서 진행한 사업이 아니라 독일에 거주하던 이수길 박사의 요청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수길 박사는 그 뒤 박정희 정부가 조작한 이른바 ‘동백림’ 독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두 다리를 못 쓰게 됐다고 한다. 67년에 일어난 동백림 사건은 이후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 독일 내 한국인 이민자 사이에 서로를 반목하고 의심하게 만들어 독일 이민자 사회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이런 이민자 사회의 반목과 갈등은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다고 하며, 박정희 정권은 당시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해 한국 산업화의 밑천을 마련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또 ‘20세기 최악의 노예계약’이란 비판도 동시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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