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29) 들국화 : 행진(1985)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80년대 음악 시장은 방송에서는 ‘조용필’과 ‘전영록’이 모든 음악을 섭렵하면서 음반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었고, 여기에 트로트 군단이 강력한 대항군으로 자리잡아 방송시장에 더 이상의 새로운 음악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군부독재가 판치던 80년대 젊은이들은 보여주는 문화이외에 새로운 문화를 열망했고 그 열망은 영미 팝이 라디오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음악 시장에 신촌을 중심으로 새롭게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왕 조용필’에 대항할 정도의 노래 실력으로 무장한 ‘가객 김현식’이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한국 블루스의 대부인 ‘엄인호’는 아예 이름을 ‘신촌 블루스’라고 명명하고 한영애, 정서용 등과 함께 신촌을 중심으로 작은 공연 등을 펼치며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 신촌 군단을 세상에 알리며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은 포크 그룹 ‘따로 또 같이’ 출신의 전인권을 필두로 한 ‘들국화’였다.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 ‘Let it be'의 앨범 커버를 모태로 사용하여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허성욱 등의 네 명의 흑백사진을 표지로 사용한 들국화 1집은 당시까지 영미 팝에 빠져있던 젊은 세대에게 우리에게도 들을만한 음악과 소장할 가치가 있는 음반이 있다는 가치를 심어준 음반이었다.

더구나 전인권의 터져 나오는 사우팅 창법은 독재의 그늘에서 억눌려 있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는 희망의 목소리로 들렸고, 신촌에 자리잡은 크리스탈 백화점(지금의 그랜드 마트 건물) 옥상에서 열린 이들의 공연은 연일 만원 행진을 이어갔다.

이들의 성공은 텔레비전이란 매체를 배제하고 일궈낸 성과이기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일반적인 성공의 길은 메이저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내고 이를 계기로 텔레비전에서 데뷔해 성공을 이루는 길이었지만 들국화의 성공은 이 반대였다. ‘동아기획’이라는 기획사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고 공연을 통해 자신들을 알리고 텔레비전이 이들의 출연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들국화의 텔레비전 출연은 몇 번 되지 못했다. 들국화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성공하면서 당시 최고 인기프로였던 가요 톱 10에 잠깐 출연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당시만 해도 전국민이 보는 텔레비전에 장발의 가수들이 나와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들국화 멤버들은 그들의 앨범 자켓에 담긴 모습 그대로 장발을 하고 나와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80년대 들국화에게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 텔레비전 출연이 된 것이다.

머리를 자르고 텔레비전에 나와야 한다는 유신의 망령은 전두환 정권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고 들국화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 대신 공연장 중심의 음악활동을 그대로 이어갔다. 이후 그들의 정규 2집이자 들국화 유일의 라이브 앨범 역시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출판되어야 했다. 당시 출판되는 모든 음반에는 정부에서 권장하는 건전가요라는 것이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라이브 음반에 갑자기 건전가요가 삽입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공연중 ‘우리의 소원’과 ‘앞으로 앞으로’를 불렀고 이 노래들을 건전가요로 그대로 삽입해 라이브 음반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외국의 팝송을 번안하지 않고 끝까지 부르면 안된다는 규정으로 공연장에서 간혹 불렀던 몇몇 노래들을 1절을 원어로 2절은 번안해 부르는 웃지못할 헤프닝을 가져왔다.

그러나 들국화는 당시 시대에서 파격이었고 이 파격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그 열광은 전두환 정권의 억눌린 독재 환경 속에서 찾은 청춘의 탈출구였음이 분명했다.

최현진 담쟁이기자 단국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매체인 ‘코리아포커스’ 기자로 일했으며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의 교육위원을 맡기도 한 DMZ 기행 전문해설사다. 저서는 <아하 DMZ>, <한국사의 중심 DMZ>, <DMZ는 살아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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