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아무책 대잔치

얼마 전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도 정확히 모른 채 덜컥 책을 샀다. <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 이정희라는 이름을 들으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참 이상하다. 동경, 실망, 냉소, 안타까움, 아련함 등 여러 감정이 뒤섞여 ‘이상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미묘한 감정이 관통한다. 아마도 ‘진보정당’이라는 놈이 내 일상에 작게나마 비집고 들어온 것 때문인 듯하다.     

첫 인연은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TV에서 정치인 모습이 나왔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정치인이었다. 개량한복 차림의 한 아저씨가 국회 연단에 하이킥을 날리고 있었다. 이후 인터넷에서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접했다. “민주노동당? 이름 어렵네. 노동은 왜 넣었지? 민주당이랑 다른 건가?” 이름보단 소속 의원들이 더 인상 깊었다. 하이킥 날리던 농민 아저씨와 선한 인상의 여성 정치인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당시 내가 민주노동당에게 가진 첫 인상은 다음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바로 농민, 여성, 노동.

왠지 민주노동당에 호감이 갔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는 대통령은 박정희, 지지하는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라는 끔찍한 혼종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이상하게 민주노동당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동아리 선배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했고, 캠퍼스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이름의 홍보물도 눈에 띄었다. 당에 가입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정당은 상품진열대에서 물건을 선택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품선택은 신중해야 된다. 합리적 소비자로서 판매자에게 빈틈을 보이면 안 된다. 그래서 마치 MT방을 예약할 때 “다른 곳 좀 둘러보고 올게요”라고 하듯 “다른 (진보)정당도 알아보고요”라며 답을 피했다. (진보)정당을 단지 이미지, 기호, 정체성을 소비하는 정도로 바라봤고, 그래서 2012년 통합진보당이 분당 위기를 겪을 때 외면했다. 마치 유행지난 물건을 외면하듯.

2012년 박근혜가 당선됐다. 개표를 보며 망했다고 친구들과 욕을 했다. 얼마 뒤 한진중공업의 최강서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선배를 따라 영도다리를 건넜다. 한 겨울 영도의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발언을 들었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 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 ”라는 최강서 열사의 유서. 나에게 정치는 욕하거나 외면하면 그만인 문제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을 전부 내던져야 할 문제였다. 그 후 밀양의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행진하면서, 한상균 위원장이 경찰에 체포되는 걸 목격하면서 진보정치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고민할 수 있었다. 어떤 보호막도 없이 홀몸으로 민중들은 국가기구의 폭력을, 제도화된 권력을 맞닥트렸다. 뿔뿔이 흩어져 고통을 감당했다. 책의 표현처럼 “인간의 존엄이 유지될 수 없는 위기상황”이 계속 일어났다.  

과연 진보정치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 책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인지 책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과 청년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다. 세 살 아기를 둔 KTX 여승무원은 대법원 판결에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구의역에선 19살 청년 노동자가 전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고3 학생은 사고로 척추를 다쳐 2년간 병원 신세를 졌지만 산재인정의 길은 멀다. 매년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만 1800여 명, 오늘 하루도 5명이 출근을 하겠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만약 비정규직의 노동3권이 보장되었다면, 그래서 자기 권리를 외칠 수 있었다면, 진보정당이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얼마 전 사드가 기습적으로 반입됐다. 8000명의 경찰이 소성리 주민들을 막아섰다. 현대중공업의 하청노동자는 고가도로 위로 올라갔다. 차별금지법은 고사하고 동성애 찬반이 입에 오르내린다. 촛불의 기억은 아직 생생한데, 아픔은 그대로다. 진보정치가 부재할 때 사회가 치러야할 고통은 이처럼 크고 깊다. 단순히 정책역량이나 의석수, 의제설정 능력 등으로 진보정치를 환원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일까? 진보정치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이정희의 대화신청이 너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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