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아무책 대잔치] ‘지식인을 위한 변명’

치기 반 허세 반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아무렴, 나처럼 불손한 ‘좌파’라면 읽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진짜 좌파’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까?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도서검색을 했다. 어라? <존재와 무> 1130쪽. <변증법적 이성비판1, 2> 두 권 합쳐 1440쪽. 나에게 세상의 책은 두 종류로 나뉜다. 우리 집 베개보다 두꺼운가? 아닌가? 그래 베개보다 두꺼운 책을 읽을 순 없다. 아쉽지만 ‘진짜 좌파’가 되는 건 포기하자. 그런 찰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얇은 소책자가 눈에 띄었다. “165쪽? 이건 읽을 수 있겠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따라가기 버거웠다. 생소하고 난해한 용어들이 이어졌다. 기투? 비-언어? 내화랑 외화? 겨우 다 읽어내고 뿌듯한 마음으로 마지막 옮긴이 글을 펼쳤다.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춘’이라는 옮긴이의 친절한 설명이 보였다. 인터넷에서 본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드립이 생각났다. 책의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춘)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메시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르트르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무장봉기를 테러행위로 규정한다거나 평화를 말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선 중립을 지키는 전문가들을 사이비 지식인으로 규정한다. 이 사이비 지식인들은 거짓된 보편성을 옹호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억압적이지만 알제리 인민들의 저항은 폭력적이라서 안 된다. 세계 평화는 중요하지만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는 베트남이나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한 결정이라 안 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논리였다.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여성혐오를 중단하라는 여성들의 외침에서, 백남기 농민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밀양에서 성주에서 언제나 따라붙었던 꼬리표들이 생각났다. “파업은 좋지만 너희 민주노총은 폭력적이라 안 된다.” “시위는 좋지만 너희는 불법시위라 안 된다.” “남녀평등은 좋지만 여성우월주의는 안 된다.” 법치주의와 평화, 남녀평등이라는 공명정대한 논리들이 저항하는 이들에게 쏟아졌다. 이상하게도 공명정대함은 현실세계에선 견고하고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꼬리표들이 하나씩 붙을 때마다 이런저런 변명을 했다. 파업 요건을 만족한 합법파업입니다. 불법은 사측이 먼저 했습니다. 시위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입니다. 기타 등등. 하지만 변명이 얼마나 논리적인지 혹은 타당한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보단 저들(좌파)은 부당하게 어느 한쪽 편을 든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저들(좌파)은 노동자 편을 들고, 농민 편을 들고, 불법시위자 편을 들고, (떼쓰는)여성들 편을 들고 여기에 모자라 북한 편마저 든다. 법치주의, 평화 그리고 남녀평등, 공명정대한 보편의 논리 앞에서 어느새 우리는 편향되고, 한쪽으로 치우친, 비합리적인 ‘괴물’이 되어있었다.

견고한 보편의 논리를 마주할 때마다 답답한 심정이 들었다. 생소한 용어로 가득했던 사르트르의 글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답답함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한몫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즉 평화, 인권, 자유 따위의 보편성은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인간은 역사를 살아가는 ‘상황 속 존재’이기 때문에 우린 (보편적)명제가 아닌 (구체적)사건을 통해 이념과 부딪힌다. 마주하는 구체적인 것에 구체적인 답을 주는 것, 사르트르는 이것이 지식인의 기능이라 했다. 구체적인 사건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보편성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당파성이 우릴 진리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사르트르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힘이 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그래서 가끔 욕을 먹기도 하지만 적어도 평소 가졌던 막연했던 답답함은 조금 걷어졌다. 지배층은 언제나 스스로를 보편의 수호자로 여겼다. 세계평화를 수호하고, 법을 지키고, 국가경제를 이끈다. 사이비 지식인들은 이런 지배층의 뒤를 따라다니며 거짓된 보편성을 퍼뜨린다. 억압에 맞선 피억압자의 저항을 보편성에 도전하는 부당한 행위로 치부한다. 폭력은 나쁘니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알제리인의 저항은 부당하다. 평화는 좋지만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할 순 없다. 40년 전 사이비 지식인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시 어딘가 시사프로그램에서 “평화 좋지요. 하지만 사드반대는 야당에게, 중국에게, 북한에게 유리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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