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아무책 대잔치]

항상 스무 살에 더 가까울 줄 알았는데 정신차려보니 서른 살에 더 가까워졌다. 본래 책이라곤 원피스, 드래곤볼 같은 만화책만 보던 덕후였다. 어느 날 선배를 따라 한진중공업 파업현장에 간 게 화근이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런 모습일까 궁금했고 일단 아무 책이나 집어 보기로 했다. [필자 주]

3월 11일 토요일, 탄핵이 인용된 바로 다음날 서면 시국대회 현장을 찾았다. 한껏 올라간 분위기, 무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사회자의 구호도 평소보다 더 힘차게 울려 펴졌다. 그런 분위기에 흠뻑 젖어 집회를 바라보다가 무대와 거리를 분리하는 질서유지선이 눈에 띄었다. 술이 잔뜩 되어 문재인을 욕하시던 아저씨가 질서유지선을 넘자 곧장 제재를 당했다. 집회현장이면 곧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시간으로 치면 40초도 안 될 시간, 잠깐이지만 매주 보던 무대가 멀게 느껴졌다.

그냥 스쳐가도 될 일화인데 마음에 걸렸다. 이 위화감에 뭔가 더 생각해볼 거리가 있지 않을까? 얼마 전 <듣도 보도 못한 정치>라는 책에서 봤던 뉴질랜드 이야기가 생각났다. 월가 점령 시위의 영향으로 뉴질랜드 웰링턴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 모두가 돌아가며 ‘이곳에 온 이유’나 ‘실천 사항’들에 대해 발언했다. 말 그대로 민주적 집단토론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크거나 말 잘하는 몇 사람이 발언권을 독점했다. 그러자 토론도 점점 줄었다. 집회에 참여했던 서른 살 벤나이트는 고민에 빠졌다. 정치적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어떻게 모을 것인가? 대형집회가 가지는 비효율성, 정보격차, 상명하달 식 의사결정,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벤과 고민을 같이한 청년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들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협력적 의사결정’ 소프트웨어 ‘루미오’를 개발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찬성, 보류, 반대, 차단을 투표하고 결과를 원그래프로 보여주는 단순한 프로그램이었다. 다만 특이할 점은 투표를 할 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코멘트를 달게 하고 재투표도 가능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읽고 조율하는 과정이 추가된 것이다. 덕분에 개인의 의견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집단적 결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합의점으로 향하는 가능성을 ‘루미오’는 보여줬다.

뉴질랜드 사례만이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정치>는 온라인 기술을 통해 대의제의 한계를 넘으려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미국의 ‘브리게이드’, 아르헨티나의 ‘데모크라시OS’, 스페인의 ‘디사이드 마드리드’ 등이 그것이다. 온라인 플랫폼은 시민들과 정치를 이어주는 창구가 된다. 정당의 정책공약이 온라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시정부의 예산책정, 입법, 행정에 시민들이 참여한다. 웹사이트를 통해 입법발의도 한다. 민주주의를 대표선출, 삼권분립, 다수결의 원칙 정도로만 접하는 우리에겐 생소한 이야기들이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기술, 아이디어는 언제나 자본과 기득권의 몫이었다. 자본과 기득권은 항상 자신들의 ‘세련됨’을 뽐내며 더 좋은 사회를 바라는 운동도,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연대도 무가치한 것으로 깎아내렸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새로움, 색다름, 세련됨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운동이) 안 세련되면 뭐 어때? 마음이 중요하지.”라며 정신승리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시민참여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은 단지 새롭거나 세련된 기술을 만드는 것 이상을 뜻한다. 집단적 수준에서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협력은 가능할까? 개인의 의지와 집단의 의지는 일치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책 속의 인물들은 이런 쉽지 않은 질문들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촛불항쟁을 거치며 우린 대의제의 한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야당이 혹여 다른 생각을 품지 않을까? 탄핵안은 통과될까? 가슴 졸이며 정치인을, 법관을 쳐다만 봐야했다. 그래서일까? 직접 정치, 직접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젠 “약은 약사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라는 패러다임을 뛰어넘을 때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정치’를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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