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계단 오르기]첫 번째 계단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 18

사랑은 월담이다

어느덧 학교 담장 위에 장미가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나는 종종 장미넝쿨이 늘어진 담장에 기대보는 습관이 생겼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담장 밑에서 사랑을 했을까. 누군가는 여기서 등을 기댄 채 첫 키스를 나누었겠지. 사랑의 추억을 많이 흡수한 담장일수록 아름다운 것일까. 그래서 아름다운 담장 아래 등을 대고 있으면 그 사랑의 파동이 전해오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설레는지도 모른다. 

장미꽃넝쿨이 출렁이는 담벼락 아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봄은 자꾸 연착됐고 그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만 그 지도를 보고 말았다. 담벼락에 굵고 작은 실금으로 기록된 방사형 지도를.

이십만 분의 일로 축적된 별빛과 높고 낮은 구릉들. 지난밤의 설렘이 등고선으로 기록된 담벼락은 실시간 사랑을 안내하는 지도다. 천둥이나 번개가 스치고 간 샛길은 위험했지만 뒤안길마다 분홍색 꽃씨가 인쇄돼 있다. 더듬더듬 누구의 고백일까. 담벼락은 때때로 점자로 기록된다. 눈 먼 도마뱀 한 마리 점자를 읽고, 끝내 측량할 수 없는 길 하나 담을 넘어간다.

기다림 앞에서 담벼락은 때때로 하나의 네모난 귀. 구름이 부풀어 오르다 사그라드는 소리. 꽃잎이 후드득 뛰어내리는 소리, 아랫녘 풀벌레가 몸 비비는 소리를 죄다 녹음한. 그래서 담장에서는 우-엉 우-엉 기다림의 속울음이 재생되기도 했다.

과수원 뒤편이나 잠들기 좋은 풀숲, 키스하기 좋은 지번들을 들여다보다 나는 끝내 도착하지 않는 그를 새겨 넣는다.

-졸시 ‘월담의 공식2’ 전문 

사랑해, 따위의 낙서가 새겨진 담벼락은 거대한 연서 같기도 했다. 이런 고백들이 혈관처럼 뻗어 담장을 넘나드는 곳. 사실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는 데는 담장이 제격이다. 넘어야 할 담이 높을수록 사랑은 더 거세게 불타오르지 않던가. 내가 들은 사랑 중 가장 스릴 있는 사랑은 ‘보쌈’이다. 한밤중 담을 넘어 여자를 자루에 넣어 훔쳐가는 것. 그때 그 담장에 장미가 만개해 있지 않았을까. 여자를 보쌈해 갈 때 묶었던 밧줄이 지금 여자가 끼는 반지의 모습으로 남았다는 얘기 때문에 더 그럴듯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막연히 생각했다. 사랑은 어쩌면 담을 넘는 것이라고. 호기심이 가득한 장미가 넝쿨을 사다리처럼 드리운 채 자꾸 담을 넘고 있었다. 

사랑은 벼랑에 핀 꽃이다

단합대회 겸 이른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때마침 강풍을 동반한 태풍이 북상해 날씨가 엉망이었다. 메피스토의 거대한 망토에 휩싸인 것처럼 세상이 어두컴컴했다. 밤인지 낮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국지성 폭우가 여기저기 집중호우를 쏟아 부었다. 유월인데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다. 우리는 비행기 출발이 하루 연기됐다는 소식에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아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다음날 새벽에 나와야 한다는 부담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삼삼오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애들은 낮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어떤 애들은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커피를 연거푸 몇 잔씩 마시고 있었다. 또 버스 정거장 근처에 있는 영화 동시상영관으로 몰려가기도 했다.

나는 동시상영관 쪽이었는데 연달아 몇 시간 영화를 본다는 게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에로영화를 한 편씩 끼워서 상영했는데 판별이 안 될 정도로 확대된 육체의 특정부위가 화면 가득 메우는 게 시각적으로 몹시 피곤했다. 게다가 평일 비 오는 날이었다. 영화관은 관람객보다 쥐새끼가 더 많은 듯했다. 떡 치듯 철퍼덕철퍼덕 소리가 울려 퍼질 때쯤 빠르고 불결한 물체가 발등을 휙 지나가는 느낌이라니.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우리는 동시에 발을 들거나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극장의 불이 켜지자 우리는 서로 낯선 얼굴을 확인했다. 유령처럼 창백한 낯빛이었다. 우리가 본 것이 에로영화인지 공포영화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기대감을 저버리지 못한 성이란 게 어쩌면 불시에 발등을 지나가는 검은 물체처럼 불결하고, 극장 의자의 얼룩처럼 남루하게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 작고 낯설어 보이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장대비는 양철지붕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퍼부었다. 비 냄새에 섞여 어디선가 김치전 부치는 냄새가 났다. 부침개 부칠 때의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가 빗방울 소리 같아서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마침 학교 앞 빈대떡 집에는 K의 무리가 모여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종일 본 대형 스크린의 잔상과 말발굽 소리처럼 몰려드는 장대비 소리 그리고 빈대떡 부치는 소리와 기름 냄새에 취해 그날따라 술이 더욱 오르는 것 같았다.

“사랑의 원형은 헌화가 아닐까. 노인이 절벽에 핀 꽃을 꺾어다 받치잖아. 절벽에 핀 꽃처럼 아슬아슬한 것, 목숨을 걸고 꽃을 꺾는 게 바로 사랑이란 거지.”

태풍으로 기온이 내려갔음에도 술집 안은 후끈 달아 있었다. 뿌연 김이 서린 창밖으로 빗물이 사선으로 흘러내렸다.

“아니 정말 평지보다 비탈의 꽃들이 더 빨리 핀다고 해. 헌화가에 나오는 그 꽃이 진달래라는 설도 있고 철쭉이라는 설도 있는데…. 암튼 봄꽃인 모양인데… 아마도 기암절벽 사이에서 다른 꽃들보다 먼저 피어났을 거야. 일종의 위기감이랄까. 벼랑이 위험하니까 기를 쓰고 먼저 핀 거지. 종족보존의 본능 같은 거 말야.”

“그 얘기 들으니까 어디선가 읽은 글이 생각나네. 조선왕조실록인가에 보면 경술년인가 대기근이 있었대. 당시 조선 인구 5분의 1이 굶어 죽을 정도였다지 아마. 그때 그렇게 꽃이 일시에 피어났다잖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일본 전역에서 모든 꽃들이 그렇게 폭발적으로 피었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알 수 없는 얘기들이 돌았지만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막걸리가 몇 순배 더 돌았다. 말이 끊길 때마다 빗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럴 때마다 마치 노아의 방주를 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홍수가 난 세상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방주 속에 간택되어 종족보존을 이어가야 하는 쌍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꽃은 적당한 일조량이 있어야 피는 것과 일정 시간 암흑기가 있어야 피는 것이 있다더라. 위도가 높은 지역의 식물들은 절대 일조량이 있어야 하고, 암흑기가 있어야 꽃이 피는 식물들은 낮보다 밤이 더 길어야 개화를 할 수 있다고 해.”

꽃의 개화가 사랑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시 나의 개화는 ‘일조량’ 쪽일까 ‘암흑기’ 쪽일까를 생각했다. 학교 담장에 피어 있던 장미부터 시작해 동시상영관에서 보았던 애로영와 벼랑에 핀 꽃까지 사랑이 내게는 너무나 어지럽고 어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사랑은 독이 든 사과다

그날 우리는 술에 취해 쌍쌍이 혹은 남자 여자 나뉘어 학교 앞 여관으로 갔다. 수학여행이 하루 연기된 그날 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서로의 담장을 넘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잠든 그 방의 벽에는 사랑의 담장을 넘는 신음이 몇 개의 실금으로 더 추가되었을 것이다.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깨진 커플이 생겼고 새로 커플이 된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어처구니없는 담을 넘은 것은 J였다.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만 하던 J는, 김치 순두부만 먹던 J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때쯤 임신임을 고백했고 중절수술을 했다. 강제로 자궁을 여는 데는 통증이 수반되는 모양이었다. 촉진제 주사를 맞은 J는 한참 배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하나둘, 셋, 넷…. 숫자를 세면서 정신이 점점 희미해지는데, 정신은 희미한데 유체 이탈한 것처럼 수술기구 달각거리는 소리가 다 들리는 거야. 뭔가 긁어내는 소리. 그 수술대는 너무 치욕적이야. 고문 기구 같아. 양다리를 벌린 채 발목을 묶는 거야. 다시는 올라가고 싶지 않아.”

그녀는 술이 덜 깬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처녀를 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황당한 건 이 애가 누구애인지도 모른다는 거야. 술 취한 나를 누군가 겁탈한 것 같은데…. 어느 새끼인지 물어볼 수도 없잖아. 내 처음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맞고 싶지는 않았는데….”

J는 잠이 들었다.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고 눈에는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고였다. 그녀가 이대로 잠들어 영원히 눈뜨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문득 어릴 때 읽은 동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쩌면 백설공주처럼 독이 든 사과를 삼킨 것인지도 모른다고. 목에 독 사과가 걸려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우리에게 사랑이란 잘못 삼키면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독약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랑에는 그런 치사량의 독이 함유돼 있다. J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교 앞 담장의 장미는 그새 모두 떨어져 담장 밑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J의 하혈색 만큼이나 붉은 색이었다. 나는 가만히 담장에 기대어 보았다. 담장에서 자꾸 우-엉-우-엉 속울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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