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12)

국립오페라단이 혹은 서울시향이 수해 복구 현장으로 달려와 공연을 한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수시로 목격되는 광경이다. 지금도 함경북도 홍수 피해 현장에는 북한의 예술인들의 공연과 시 낭송 등이 이어지며 복구 작업을 독려하고 있다.

예술인들이 현장에서 기동성 있게 인민들에게 영웅심을 고취시키고 현장의 생산성을 높이는 등 당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사업이 바로 ‘화선(火線)식 경제선동’인데, 북에서는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일이다. 그래서 회령시, 무산군, 연사군 등 피해지역으로 피바다가극단, 국립교예단 등 중앙예술단과 특히 ‘청년중앙예술선전대’와 ‘여맹기동예술선동대원’ 등이 현지에서 예술공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 연주하는 모란봉악단 [유튜브 켑처]

자본주의 체제의 문화정책은 기본적으로 문화적인 맥락에서 결정되고 집행되는 반면, 사회주의 문화정책은 정치적 맥락에서 결정되고 집행된다. 이에 따라 북측의 인민들은 각 직장과 현장에서 조직된 문예 활동을 통해 문화생활을 체험한다. 이와 같은 예술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적 가치와 생활에 대해서 이해하게 돼, 정치적 참여를 하고 있다.

이는 북한의 체제도 그러하지만 역사적 배경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북측은 해방 후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계몽을 위해 문화예술을 교육의 일환이자 정체성 확보를 위한 주요한 도구로 활용했다. 당연히 엘리트 위주의 문화보다는 대중적 친화력이 높으며 반식민지 민족주의적 문화를 지향했다. 여기에 항일투쟁과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경험한 정치 동원의 방법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선동과 선전에 익숙하다. 북한은 이러한 이유로 예술적 행위를 통해 체제와 정책에 대해 인민의 이해를 구했고, 주요한 정치적 통제의 방안으로 문화예술을 활용해 왔다.

그 최 일선에 ‘예술선전대’가 있다. 예술선전대는 공장, 기업, 농장, 군부대 등 현장에 파견되어 공연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경제적 동원을 격려하고 있다. 북한은 체제 유지와 지속을 위해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교양하며 당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문화정책을 펼쳐 왔으며, 구체적으로 문예공연이라는 형식으로 인민들의 생활 곳곳에 예술선전대를 파견하고 있다.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으로 태어난 사회주의 정권이 백위군과 외세로부터 혁명을 지키고,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며, 혁명의 주체세력인 노동자와 농민이 정치, 경제, 등 전 영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있어서 문예 조직과 활동을 통해 인민을 계몽했다.

이 과정에서 미학적으로는 비판적 사실주의를 대체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채택됐다. 맑스-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예술관을 기초로 한 이 미학은 구체적인 사실을 주제로 삼아 현실성, 혁명성, 사회주의 건설상 및 영웅적 인물을 작품 소재로 해 혁명적 낙관주의와 집단적 영웅주의를 추구해 왔다. 이념적 기초로는 당파성, 사상성, 인민성의 원칙을 고수했다.

소련의 문예정책의 목표는 당 정책의 구현 및 선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정치사상의 주입에 있으며, 문예 활동을 통해 인민을 교양하고 의식을 변혁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레닌은 “변화를 강제하는 유효한 힘은 대중의 혁명적인 에너지이다”라고 설파했고, 북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북측은 정권 초기에 일제의 잔재 극복, 사회주의 사상으로의 의식개조, 새 사회 건설의 고무추동이 문예정책의 중심이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전쟁 승리를 위해 복무케 했고, 전후에는 복구 및 건설, 사회주의 애국 교양과 주체사상화에 이바지하는 문화예술로, 그리고 천리마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문예정책을 전개했다.

70년대에서는 주체의 혁명적 세계관의 무장을 주창했으며, 이 시기에 ‘주체문예이론’이 정립됐고, ‘종자론’ 등의 실천적 지침이 마련됐다. 또 피바다식 가극과 성황당식 연극 등이 창조되는 등 새로운 예술형식을 선보였다. 80년대로 넘어와서 후계자 문제가 해결되고 체제가 안정화되면서 여유가 생기자 생활밀착형 소재가 선보이기도 했다.

풍경화가 등장하고, 전자밴드가 생기고, 대중가요가 본격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88년 서울올림픽에 대응해 개최한 평양축전 이후 헤이해진 사상무장을 다잡기 위해 사회주의적 내용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강성대국’ 건설과 ‘선군정치’를 앞세운 김정일의 음악정치가 사회 전반을 주도했다.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는 구호가 나온 것이 이 즈음이다.

▲ 연주하는 모란봉악단 [유튜브 켑처]

‘주체사실주의’로 발전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창작이 자리를 잡았고, ‘조선민족제일주의’가 주창됐다. 그리고 인민이 좋아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현대적 미감’이 강조가 됐다. 이러한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핵병진 노선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강성대국’과 ‘선군정치’의 강화와 동시에 당과 인민을 위한 훌륭한 문예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명작폭포’가 최고의 화두로 등장했다.

이러한 문예정책을 구현하는 선봉이 예술선전대로서, 인민을 교양하는 ‘군중문화사업’을 구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 건설을 위한 노력 동원과 생산성 향상 역시 선전대의 중요한 기능이다.

북측에서는 예술선전대의 기원을 김일성 주석이 조선공산주의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반제민족해방과 공산주의 투쟁을 전개하던 만주시기에 군중 계몽을 위해 1927년부터 시작한 ‘연예선전대’라고 보고 있다. 당시의 기억을 술회한 김 주석에 따르면 1927년 겨울방학 때 무송의 연예선전대에는 새날소년동맹원들과 백산청년동맹원들, 부녀회원들이 망라가 됐다고 한다. 이들이 무송과 그 주변의 농촌을 다니며 한 달여 순회공연을 가진 것이다.

이후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중앙 및 각도, 사회단체별로 이동예술대가 조직이 됐다. 1946년 5월24일 북조선 정부와 제반 단체의 선전원, 문화예술인 대회에서 “문화인들은 문화전선의 투사가 돼야 합니다”라는 연설이 그 출발이다.

1951년 4월 전쟁 시기에는 김 주석의 지시로 군악대를 모체로 한 ‘군단화선예술선전대’가 조직돼 전투 현장에서 ‘나팔전투원’이라 불리며 전투와 공연을 병행키도 했다. 1961년 10월16일에는 김 주석이 ‘전국청년기동선전대’ 종합공연을 관람한 후 창립을 지시해 전국적으로 운영된 기동예술선전대가 현장 중심으로 활동했다.

1973년 1월 26일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설립된 시도 예술선전대가 현장에서 순회공연을 개최했으며, 조선직업총동맹 중앙노동자예술선전대와 청년중앙예술선전대와 학생소년선동대가 운용됐다. 1980년에는 정무원(현재 문화성) 문화예술부 산하에 중앙예술선동대를 조직했다.

“예술선전대들의 사업이 지금 무산군내 산간벽지 농촌 림산직장들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언사면 지방에서 순회중인 박경상 동무를 대장으로 한 5명의 문화선전원들은 지난 12월21일부터 시작해 1월 4일까지만 해도 벌써 연내 7개리에서 38회에 걸쳐 2,266명의 산간벽지 주민들과 임산 노동자들에게 문화선전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지방주민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노래보급지도원 박지식 동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인민군행진곡’‘조국통일행진곡’ 등을 보급시키고 있으며, 무용보급지도원 김인순 양은 ‘밭갈이 타령’‘한강수 타령’ 등 우리조국의 고전 무용과 새로운 선전 무용 등을 보급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술선전대는 령하 35~40도의 설한을 극복하며 백두산록 일대의 산간벽지에서 주민들의 향토 건설의욕을 고무하며, 조국통일 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그들의 투쟁을 힘차게 추동시키고 있다” (로동신문, 1950년 1월18일)

현장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예술선전대의 활동에 따라 시기별로 관련 작품도 다수 창작이 됐다. 전쟁 시기에는 노래 <문경새재>, <내 고향의 정든 집>, <압록강 2천리>, <샘물터에서> 등이 애창됐고, 군무 <고지의 기발>이 인기를 끌었다. 전후 복구기에는 이동 영사기를 통한 영화보급 사업이 활발했고, 희곡 <꽃피는 마을>, 노래 <복구 건설의 노래>와 <풍년맞이 도리깨>, 무용 <씨 뿌리는 안해(아내)>가 유행했다.

▲ 연주하는 모란봉악단 [유튜브 켑처]

천리마 운동시기에는 ‘천리마 기동유방선동대’가 유선 방송기를 차에 싣고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을 격려 고무했다. 이때 나온 단막극 <붉은 용해공>은 기술혁신운동을 소재로 한 것으로, 큰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는 재단 <두 작업반장>과 무용 <통신병과 처녀들>이 호평을 받았다.

1992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평양에서는 각도 예술선전대 창립 20주년 기념 예술축전이 열려, 송시와 노래 <영원한 신념의 노래>, 노래와 춤 <축원의 꽃보라>, <내 나라에 와보시라>, 여성독창 <그이 따라 나갈 때>, 무용 <우리를 보라> 등의 연목을 선보였다. 1998년 5월26일에는 “군대를 중시하고 그를 강화하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는 정치”로 정의되는 ‘선군정치’가 로동신문에 처음 등장하면서, 어느 때보다 군부대의 예술선전대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혁명의 수뇌부 결사 옹위하리라>가 불려지고, <결전의 길로>가 연주됐다.

“1970년대 하루를 백일처럼 질풍같이 내달리며 사회주의 경제건설에서 기적과 혁신을 창조한 것은 전투적이며 박력 있는 경제선동의 위력에 기인한다”는 경험과 “당이 결심하면 우리가 한다”는 당과 일군들의 결사관철의 의지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주체사상탑과 서해갑문 등 노동당 시대의 기념비적인 창조물들의 건설을 고무한 경제선동과 예술선전대의 활동이 긍지와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술선전대가 비록 김 주석으로부터 시작이 됐지만, 체계화하고 조직화해 북한의 주요한 선전 선동의 수단이 된 것은 김정일 위원장과 무관하지 않다.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및 선전선동부 지도원(1966년 2월), 당선전선동부 영화예술과장(1968년 2월), 당조직지도부 부부장(1969년 9월), 당선전선동부 부부장(1969년 9월), 당선전선동부 문화예술담당 부부장(1970년 10월), 당선전선동부 부장(1972년)을 역임한 김 위원장의 경력과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지금의 예술선전대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

▲ 연주하는 모란봉악단 [유튜브 켑처]

예술선전대와 군중문화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단숨에”라는 노래이다. “산을 넘어도 단숨에, 강을 건너도 단숨에, 위훈을 세워도, 승리를 떨쳐도 번개같이 불이 번쩍 단숨에 하자”는 고무 추동의 결정판이 바로 “단숨에”이다. 2011년 5월28일 김정일 위원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과 함께 군인들이 동원된 희천발전소 건설 현장을 찾았다.

당시 김정일 부자는 군인 건설자들이 희천발전소 건설현장에 새겨 넣은 `단숨에'란 구호를 보고 큰 감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3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인민군 장병들이 단숨에의 기상으로 강성국가 건설의 돌파구를 열었다”고 강조하면서, “단숨에 정신”는 김정일 시대의 “혁명적 군인정신”을 계승한 김정은 체제의 시대정신으로 부각하며. “단숨에”는 ‘시대의 행진곡’이 된 것이다.

 

* 압록강 2천리...독창 손대원 https://www.youtube.com/watch?v=d0IJxlrKOPM

* 결전의 길로... 연주 / 모란봉악단 https://www.youtube.com/watch?v=vvmasEiTgGI

* 단숨에... 연주 / 모란봉악단 https://www.youtube.com/watch?v=tZ8EHQycD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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