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10)
북측 클래식계의 전설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백고산이 우선할 것이다. 북측 클래식의 수준을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연주자이자 북측 바이올린 연주자의 영원한 멘토로서 여전히 그 이름은 회자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그의 무반주 연주곡은 단연 압권이다.
무반주 음악의 묘미는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집중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무반주 합창인 ‘아카펠라’가 성악에서 무반주 음악이라면, 기악에 있어서는 한 악기의 독주 연주 음악이 무반주 음악으로 지칭된다. 무반주 음악은 단조로움의 이면에 기교의 화려함과 연주자의 내적 감성이 속살처럼 드러나는 매력이 있다.
무반주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연주자들에게 혼자의 힘으로 곡을 해석하고 달랑 악기 하나로 객석을 압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서 쉽게 연주할 엄두를 못 내곤 한다. 하지만 감상하는 이의 입장에서의 무반주 음악은 기본 주제의 멜로디를 몇 가지 형식의 리듬과 박자로 계속 변주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진 바, 멜로디만 파악하면 퍼즐을 풀듯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묘미가 있다.
무반주 음악으로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비롯하여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코다이의 첼로 소나타,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주목하고 싶은 것은 우리 민족의 가락이 어우러진 <무반주 아리랑 변주곡>이다. 아직 이 작품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고 우리에게도 생소한 작품이지만, 이 곡을 작곡하고 직접 연주한 연주자는 일찍이 권위 있는 국제적 음악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당시 손꼽히는 클래식 거장이 손수 제자로 삼은 불세출의 바이올린의 거장(virtuoso)인 ‘백고산’ 이다.
평양시 중국역의 바이올린 제작가 가정에서 태어난 백고산(1930–1997년)은 일찍부터 바이올린 신동으로 유명세를 탔다. 3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6살 때에 평양공회당에서 첫 독주회를 가졌다. 1943년부터 4년간 중국 하얼빈 제1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중국 조선의용군 선전대에서 근무하였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조선인민군협주단 악장 겸 바이올린 독주가로 활동하였다.
1951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여 독주 부문 3등으로 입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은 그는 1951년 11월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의 특별연구생으로 가게 된다. 평가를 위해 모인 소련의 대표적인 음악가들 앞에서 교내 연주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이때 연주한 작품이 본인이 창작하고 초연한 <무반주 아리랑 변주곡>이다.
당시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의 교수이자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수석 독주자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백고산의 연주를 격찬하며, 그를 직접 가르치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Fyodorovich Oistrakh, 1908~1974)로 말하자면, 20세기 서방세계의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와 쌍벽을 이룬 바이올린계의 전설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1954년 7월 유학생활을 통해 음악적 기량이 크게 향상된 백고산은 1957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였으며, 이것을 인연으로 1974년부터 심사위원으로 참여를 하였고, 1978년 이 콩쿠르의 바이올린 부문 종신심사위원으로 위촉이 되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전 세계 클래식계에 명망 있는 연주자들을 탄생시킨 국제음악콩쿠르로 모스크바에서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최고 권위의 음악상 중에 하나이다. 역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한국계 입상자는 1974년 정명훈이 미국 국적으로 참가하여 피아노 부문 공동 2위에 입상한 것과, 백혜선이 94년 한국 국적으로는 최초로 1위없는 공동 3위 입상을 한 것처럼, 해외파는 70년대에 국내파는 90년대가 되어서야 수상을 할 정도의 수준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경연장이었다.
86년 바이올린 부문에서는 데이비드 김이 5위없는 공동 6위 입상을 하였는데, 당시 삼시위원으로 백고산이 참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국계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것은 94년 지휘자 정명훈을 비롯하여 2000년 이후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 피아니스트 백건우 정도이니, 20여 년 이전에 벌써 국제적 입지를 다진 백고산의 경력은 우리 민족으로서 본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0년 남북 교류의 시대가 열리면서, 소개된 한 장의 음반 “백고산 – Violin Solo”(신나라레코드)에 수록된 <무반주 아리랑 변주곡>은 그의 진가를 알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던 남쪽 사람들에게 이미 세계에서 인정한 민족의 예술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거친 음반녹음 상태에서 수록된 작품들이지만, ‘아리랑’에 대한 민족의 메아리는 거침없는 손놀림과 진솔한 울림으로 연주되고 있어, 거장 오이스트라흐도 반하게 한 그 곡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이었다. 2015년 필자가 총감독으로 있는 성동 겨레의 소리 축제에서 국내 바이올린계의 라이징 스타인 김 봄소리가 아리랑 변주곡을 초연한 바 있다.
백고산은 1954년 8월 소련에서 귀국한 후 국립교향악단의 독주가로 있으면서 바이올린협주곡 ‘결전의 길로’(1962), 민요를 주제로 한 소품 ‘돈돌라리’(1965)를 비롯한 근 20편의 바이올린 곡을 직접 창작 및 연주하였다. 그 외 대표곡으로는 바이올린 독주곡 ‘고향길’, ‘굴진공’, ‘고향마을’, ‘대를 이어 충성하렵니다’, ‘닐리리’ 등이 있다.
그는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만수대예술단에서 ‘기술지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능한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키워냈고, 1989년부터 평양음악무용대학 기악학 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교육자의 길로 들어섰다. 1991년부터 대학의 특설학부에서 신인 바이올린 독주가 양성에 매진하였다. 1979년 인민배우가 되었다.
백고산에게는 특별한 음악적 ‘동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작곡가 박민혁(1922-1988년)이다. 함경북도 어랑군 지방리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박민혁은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서울로 돌아와 교향악단의 단원으로 활동을 하다가 징용에 끌려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경성고급중학교 음악교원을 시작으로, 함경북도 도립악단 단장(1947), 조선인민군 해군협주단 단장(1949), 최고사령부군악대 악장(1952), 조선인민군협주단 예술부단장(1957)으로 활약하였다. 1961년 4월부터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 작곡가 및 작곡실장으로, 그 후에는 ‘영화 및 방송음악단’ 작곡가로 복무를 하였다. 1968년 공훈예술가가 되었다.
박민혁은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 등 대표적인 영화음악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바이올린 창작에도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주제의 성격이 명백하고 선율이 아름다우며 형식구조가 탄탄한” 작곡가로 알려진 그의 첫 바이올린 창작곡은 ‘민요를 주제로 한 독주곡’(1958)으로 경쾌하면서도 진취적이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곡이다.
이후 그를 바이올린 작곡가로 명성을 다지게 한 것이 바로 바이올린협주곡 ‘굴진공’(1960)으로, 송암탄광 탄부(광부)들의 투쟁을 다룬 작품으로 백고산이 초연을 하였다. 북측의 대표적인 통일곡인 바이올린협주곡 ‘통일의 염원’(1966)을 작곡해 이 역시 백고산이 초연하였고, 마침내 1976년 3월10일 북측 바이올린협주곡의 본보기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는 바이올린협주곡 ‘사향가’를 편곡 및 창작해 세상에 내놓았다.
박민혁은 1945년 사향가 노래를 처음 접한 이후, 교원시절 학생들 앞에서 사향가를 수시로 연주하면서 언젠가는 이 곡으로 협주곡을 창작하리라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6년 1월 백고산과 의기투합해 백고산의 집에 머물며 2달여 간 사향가 편곡과 창작에 매달렸다. 백고산이 연주하고 다시 고치기를 수차례 한 끝에 지금의 바이올린협주곡 ‘사향가’를 완성하게 되었다.
백고산을 떠올린 때면 늘 같이 생각나는 것은 재미음악가이자 통일운동가였던 안용구 선생이다. 안용구 선생은 서양음악 도입기에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의 첫 기수로 입학하여 독일, 영국 등에서 유학한 뒤 60년대 국내에서 ‘실내악' 바람을 일으키며 현악 교육의 큰 축을 담당하였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강동석, 김영욱, 정경화 등 유명 연주자들을 길러낸 ‘현의 거목’으로 불리는 예술 교육자이기도 하다. 68년 피바디 음악대학의 초청으로 도미, 당시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으로 폐간 위기에 처한 동아일보 후원 음악회를 개최한 것이 빌미가 되어 ‘반체제 인사’, ‘친공산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이후 윤이상 선생과 인연을 맺어 통일운동에 앞장서며 남북 문화교류 행사를 진행하였다.
백고산을 직접 만났던 안 선생의 방북 일화는 유명하다. 1990년 10월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할 당시, 동행한 재미 첼로 연주가 이방은은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남쪽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아버지인 이인형의 소식을 접한다. 아버지 이인형은 이미 작고한 상태였지만, 아버지가 새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남긴 혈육을 만날 수 있었다. 아들 리민섭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피아노를 전공하였고, 평양무용음악대학 교수와 왕재산 경음악단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날 이 두 남매의 연주는 많은 이들에게 잠시나마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일의 희망과 화해의 감동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통일 없이는 우리 민족의 미래는 없다. 조국의 운명이 통일에 있다. 우리의 염원인 통일은 오로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기희생이 선행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는 안용구 선생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 박민혁 작곡 바이올린협주곡 [사향가]
https://www.youtube.com/watch?v=KoG81ra9HV0
* 바이올린 연주 [매혹과 홈모] (연주, 모란봉악단 선우향희)
https://www.youtube.com/watch?v=6Lc6G4vEX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