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로 읽다(11)

▲ 북한의 작곡가 문경옥

 

 김일성 주석이 평양 시민을 만나는 자리였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는 김일성 장군의 환영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어 3천만 겨레가 한마음으로 새조국 건설에 떨쳐나섭시다” 김 주석의 연설을 듣고 있던 청중 속에 여류 피아니스트인 문경옥이 있었다.

조국 해방의 기쁨 속에서 항일 혁명 투쟁의 영웅을 보았다는 흥분을 다스릴 수 없었던 문경옥은 그 날의 벅찬 감동을 오선지에 옮겼는데, 단 보름 만에 완성했다는 그녀의 처녀작 <8.15 환상곡>이 그것이다. 그녀는 1946년 11월 19일부터 이틀 간 평양시공관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개최, 해방된 북측에서 최초의 독주회이기도 한 여기서 베토벤, 쇼팽의 곡들과 함께 이 곡을 연주해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문경옥은 1920년 2월 1일 황해도 해주 부용당 출신으로,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아버지의 불륜의 결과로 태어났다. 4살 때 장래를 걱정한 어머니의 결심으로 평양의 아버지를 찾아가 아랫채 집 아이로 성장했다.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여준 그녀는 1933년 평양 제3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피아노를 접하게 됐다. 두각을 나타낸 문경옥은 학교 창립 이래 처음으로 음악회에 참가하는 조선인 학생이 됐고, 서해지구 여자중학교 음악경연대회에서 1등에 입상하기도 했다. 1937년 중학교를 마친 문경옥은 평생의 절친인 백운복과 함께 일본 동경의 무사시노(武藏野) 음악학교 피아노과로 진학해 1942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귀화를 하지 않거나 친일파가 아닌 음악가에게 무대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던 시절, 문경옥은 쓸쓸히 귀국을 해야만 했다. 북측의 유명 미술가로 올라선 친오빠인 문학수의 권유로 다시금 도일을 해 작곡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여자이자 그것도 조선인이 작곡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전무 하다시피 해 결국 독학을 결심한다. 그러던 와중에 ‘여자 정신대’에 끌려갈 위기의 순간이 왔고, 한 정신대모집원이 준 조선행 차표를 가지고 극적으로 평양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독주회와 순회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문경옥은 1946년에 국립교향악단의 피아노 연주가로, 평양음악학교 피아노 교원으로 활동을 했다.

1947년 2월 28일은 문경옥에게 있어 생의 전환점이 되는 날이었다. 평양시 예술인들의 종합공연을 마치고 관람을 한 김 주석이 출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덕담을 하며, 특히 문경옥의 <8.15환상곡>에 대해 호평을 한 것이다. “문경옥 동무의 곡이 힘도 있고 화려하여 좋습니다. 이런 동무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예술가들도 새 민주조국을 위하여 단결하고 힘을 합치여 훌륭한 작품을 더 많이 창작하고 공연하여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전체 근로자들의 건국 투쟁을 힘 있게 고무하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 문경옥씨의 유고작품 악보

김 주석과의 이 인연이 단초가 돼 아버지가 일제에 부역한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떠날 수가 있었다. 유학 응모에 떨어진 후 당돌하게도 김일성 주석을 찾아가 간청한 그녀의 호소를 김 주석이 받아들인 것이다. 1947년 8월28일 제2기 소련 유학생의 일원으로 평양을 떠나 마침내 레닌그라드 음악대학에 진학을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난관은 있었다. 입학 초 아시아 최초의 유학생이었던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감복한 교수들이 그녀의 작곡 전공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작곡과 피아노 복수 전공의 1년 과정을 지켜본 후 결정을 하자는 결론이 났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기의 열망을 실현할 사람”이라는 평가 속에서 과제물로 <대동강의 저녁>을 창작했다. 후에 <고향의 밤>으로 알려진 이 곡은 그녀가 조국에 있던 1946년 작곡한 것을 다시 쓴 곡으로 나중에 가사를 붙여 서정가요로서 널리 사랑을 받았다. 이후 <단오명절>, <갈매기 바다로 춤출 때>, <내고향>, <봄바람> 등을 연이어 창작해 서정가요집 <아름다운 내고향>을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출판했다.

결국 1년의 시간이 지난 총화(평가) 시간에 모인 교수들은 문경옥의 작곡 전공을 찬성했으며, 다만 피아노의 탁월한 재능도 발전시켜 나갈 것을 주문했다. 쇼팽이나 리스트 같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훌륭한 작곡가로도 영원히 사랑받아 온 것처럼 문경옥의 재능과 가능성을 헤아린 것이다.

1949년의 봄, 김일성 주석이 모스크바를 거쳐 레닌그라드에 방문했다. 문경옥을 비롯한 유학생들은 역까지 나가 당시 수상이던 김 주석을 환영했고, 이 자리에서 김 주석은 문경옥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포기했던 유학의 길을 열어준 것도, 유학 생활의 어려움을 살펴준 것도 김 주석이었다. 환송식에서까지 작곡을 많이 하라며 챙겨준 김 주석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나온 곡이 1950년 8월 창작한 피아노소나타 <영웅>이다. 3학년 시기에 창작한 곡이었지만 소련작곡가동맹회관 공연에 초청되어 크게 환호를 받았으며, 소련의 언론에서조차 조선의 어린 여성 작곡가의 출연을 신선한 충격이라 보도를 했다.

1951년 발표한 곡은 <승리>이다. 조국이 전화에 불타고 있는 현실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작곡한 곡으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교향시 서곡이다. 이 곡은 1951년 12월 소련작곡가동맹 제6차 대회 작품발표회에서 쇼스타코비치 등 세계적인 작곡가들의 작품과 함께 연주가 됐다. 첫 외국인 작곡가의 작품으로서 청중의 반응이 뜨거워 그녀는 무대에 3번이나 올라 인사를 해야 했다. 이 곡은 1954년 모란봉극장 개관작으로 연주가 됐다. 1952년에는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을 기본으로 가곡을 써서 모스크바대극장으로부터 무대화를 제안받기도 했다.

최우등으로 영예롭게 졸업을 한 문경옥은 1953년 7월 19일 귀국길에 올라, 평양국립예술극장에 배치가 됐다. 귀국해 첫 번째 작품은 조소 친선을 다룬 <친선의 노래>였고, 두 번째 작품은 교성곡 <평화의 노래>였다. 그리고 1954년 문경옥 평생의 역작이 된 가극 <솔개골 사람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전작인 <백두산>을 새롭게 고친 작품으로 김일성 주석의 항일 빨치산 투쟁을 최초로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1956년 6월에 초연을 했다.

이 시절 그녀는 그녀를 귀향길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영화 <소년 빨치산에 노래>의 작곡가인 리건우를 만나게 된다. 동경 유학시절부터 일본 작곡계에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리건우가 마침 국립예술극장에 같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가극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방조(협력)한 것이 인연이 됐고, 1955년 1월 4일 결혼해 평생의 길동무가 됐다.

▲ 리건우 작곡 '동백꽃' 노래말

김순남과 더불어 근현대 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는 리건우는 1919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했다. 유학 시절 중인 1940년 제9차 마이니치신문 콩쿨에서 <바이올린 조곡>으로 3등, 졸업 후인 1942년 요미우리신문 주최 제1회 빅타 관현악 콩쿨에서 교향시 <청년>으로 1등 없는 2등으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1945년 9월 귀국해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을 하다가 전쟁 시기에 월북을 했다.

1988년 11월 28일 예술의전당에서 월북 작곡가인 안기영, 김순남과 함께 리건우의 작품이 소개되면서 남측에 알려진 리건우는 불멸의 가곡 <동백꽃>으로 유명하다. 본인이 이산가족으로 월북 당시 어머니와 두 자녀를 남측에 두고 왔다. 그 절절한 사연을 들은 월북시인 박세영이 가사를 쓰고, 공훈배우인 김점순이 평양대극장에서 초연을 해 절찬을 받았다. 이 곡은 1990년 8월 10일 북측에서 발간한 통일노래 백곡집에 수록이 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동백꽃 외에 ‘몽금포의 배노래’(박산운 작사), ‘새별을 따라’(최종수 작사), ‘통일의 봄맞이’(강위조 작사), ‘바이올린과 관현악 조곡-행복한 마을에서’ 등이 소개됐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음악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서양음악을 전공한 두 사람이 민족적 전통과 양식에 있어 고민을 나눈 끝에 민족음악유산 연구에 뜻을 모은 것이다. 그 성과로 문경옥은 피아노독주곡 <옹헤야>와 민족악기인 저대와 양악기의 배합을 시도한 작품 <청성곡>, 피아노독주곡 ‘민요를 주제로 한 환상곡’, ‘민요를 주제로 한 관현악조곡’ 등을 창작했다. 또 1975년 가을, 북측의 개령악기로 유명한 옥류금의 첫 독주회를 위해 창작한 <눈이 내린다>를 초연해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작곡가로서 문경옥의 절정은 1960년부터 시작된 교향곡 창작의 시기이다. 백두산 혁명전적지 답사를 마치고 작곡해 ‘항일무장투쟁 선렬들에게 드림’이란 부제가 붙은 교향곡 제1번, ‘사회주의 조국에 바침’이란 부제의 교향곡 제2번, 제3번 <영웅>까지 연이어 교향곡을 완성한다. 1962년 평양음악대학 작곡학부에서 교편을 잡고서도 그 열정은 이어져, 교향곡 제4번과 제5번을 작곡했는데, 특히 제5번 <광명>은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은 곡이다. 1966년 다시 국립교향악단으로 복귀한 문경옥은 1969년 가을 제6번 교향곡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를 창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남편 리건우와 함께 통일의 열망을 담은 가극 <원한의 분계선>을 완성하기도 했다.

1974년 봄, 부부가 함께 활동하던 조선음악가동맹 창작실이 해산하자, 두 사람은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예술단 작곡가실로 옮겨서 창작열을 불태웠다. 1979년 3월 11일 뇌진탕으로 쓰러진 그녀는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리건우는 평양으로 돌아와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명예연구원으로 활동을 하며 후진 양성을 하다가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97년 12월 리건우는 본인의 작곡집 <동백꽃>을 발간했다. 2001년 4월에는 최영학이 문경옥을 모델로 한 중편소설 <그의 교향곡>을 평양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간하기도 했다.

식민지 시기의 참담함과 한국 전쟁의 비극 그리고 여전한 분단의 고통 속에서 음악을 통해 굴절되고 왜곡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해 왔던 이 음악가 부부의 소망을 오로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었으리라.

 

“뒷동산 동백꽃 피는 내 어머니 사시는 그 곳 / 맑은 시내물도 정을 담아 흘렀네 /

산이 첩첩 높아서 넘지 못하나 / 넓은 바다 막히어 내사 못가나 /

가시덩굴 엉키인 고향이기에 / 붉게 타는 동백꽃 내 마음인줄 아시라“ ... 노래 <동백꽃>

 

* 리건우 작 <동백꽃> _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가수 김송미

https://www.youtube.com/watch?v=h-oLRPfPiJo

* 문경옥 편곡 옥류금 변주곡 <눈이 내린다> _ 연주 김계옥(중앙대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ByJEKUsr6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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