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 동료들에게 듣는 ‘지대장 양회동’ 그리고 ‘인간 양회동’
다 퍼주고, 다 내어준 사람
‘양회동’을 설명하기엔 모자란 단어들
열사가 불을 당긴 이유

“한마디로 ‘멋진’ 사람”
“좋은 단어 다 갖다 붙여도 회동이를 말하기엔 모자라다.”
“‘형 힘내’라고 안아주면, ‘왜 그래’라고 짓궂게 밀쳐 내던 사람. 그런데 그날은 나를 꼭 안아줬다….”

지난 1일 ‘건설노조 탄압 중단’을 외치며 산화한 민주노총 건설노조 양회동 열사. 온몸에 전신 화상을 입고, 하루 만에 운명한 열사의 빈소가 3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날 건설노조는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퇴진’을 위한 총력투쟁 결의를 밝혔고, 그 시간 양 열사와 동고동락한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조합원들이 열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노동조합장(葬)으로 치러지는 장례에서 그들은 상주(喪主)다. 눈이 벌게진 얼굴로 빈소 입구를 지키며 조문객을 맞고 있다.

양회동 열사와 지근거리에서 활동했던지라 열사의 죽음이 믿겨 지지 않았고, 열사의 생전 활동은 또렷하기만 했다.

▲ 양회동 열사 생전 활동 모습 ⓒ 민주노총 건설노조
▲ 양회동 열사 생전 활동 모습 ⓒ 민주노총 건설노조

열사가 불을 당긴 이유

2015년 건설현장 철근노동자로 일을 시작한 열사는 2018년 강원건설지부가 생기고 그 이듬해인 2019년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고성, 속초, 양양, 강릉의 건설 현장을 책임지는 3지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열사의 동료들은 양 열사가 지난달 1공수(하루 일당)밖에 받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열사와 함께 조합원 고용과 교섭 관련 일을 함께 한 윤강희 강원건설지부 조직부장은 “자신은 하루(1공수) 일했으면서, 조합원들에게 ‘몇 공수 일자리 마련해줬다’며 누구보다 기뻐했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열사를 3지대장으로 추천했다는 김기형 강원건설지부 1지대장은 “조합원 아닌 사람들에게도, 주변 기능공들에게도 일자리 소개해 주려고 힘썼던 친구였다. 저녁마다 전화해서 ‘오늘은 5명 일자리 만들었다’고 기쁘니까 소주 한잔하자고 연락하는 동생”이라고 회고했다.

자신은 하루 일당밖에 못 벌면서 양 열사가 건설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뛰어다닌 이유가 있다.

1998년부터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는 임차진 강원건설지부 형틀팀장은 “건설노동자들은 평생토록 일자리 걱정하면서 하루하루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현장에 들어가면 짧게는 한 두 달, 평균 3~4개월 일하면 일거리가 끊긴다. 한 현장에서 1년 이상 일할 수 있는 건 운이 좋았을 때다. 요즘 같아선 일을 못해 8개월 동안 쉬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 생긴 현상이다.

25년을 건설 현장에 있었던 임 팀장은 “윤 정부가 건설사들 편을 들고 건설노조 죽이기에 나서면서 조합원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속초, 강릉엔 대규모 현장도 생기고, 중소 현장도 존재했다. 건설 현장 잔뼈가 굵은 그의 눈에도 ‘내년까지 일자리는 희망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다. “작년 말부터 윤석열 정부를 등에 업은 건설사들이 돌변했다. 건설노조 조합원들의 채용은 족족 거부”당했다.

열사는 조합원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니네(건설노조)가 할 수 있으면 해봐”라는 비아냥과 협박, “(노조)조끼 벗고 와라”, “휴일 수당 포기하면 써줄게” 등의 말을 들어야 했다. “민주노총이랑 같이 일하고 싶은데 대표님이 고용하지 말래요”라는 말까지 들렸다.

시작과 끝에 윤석열 정부가 있다

임 팀장은 “회의 때 지대장이 고용 보고를 올렸다. ‘용건만 얘기하고 가라’고 내치는 건설사들에게 양 지대장은 ‘조합원들 안 굶게 도와달라 사정하면서 나왔다’고 보고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누구한테 하소연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고 반성하는 사람”이었다고 떠올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윤석열 정부가 저렇게 나오는데, 형님은 뭐 한 거 있냐’라고 말할 법도 한데,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가 더 분발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규모가 큰 건설 현장에 여러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만들고서는 자신에 대한 공치사 한번 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 현장에서 일하게 된 조합원들은 양 열사가 서울 화상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병원 앞을 꼬박 지켰다.

김기형 1지대장은 “교섭자리에서 욕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일 좀 시켜달라’고 하는 게 공갈이 되고 협박이 되었으니 그게 얼마나 억울했겠나”라고 분개했다.

“윤석열 정부가 건설노동자의 일자리 갈취했고, 결국 양회동 열사에게 공갈 협박죄를 씌워 억울한 죽음을 만들었다. 시작과 끝에 윤석열 정부가 있었다.”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윤석열 정부 퇴진’을 말하는 이유다.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다 퍼준 사람

동료들의 말처럼 양 열사는 지난 4월, 하루 일했다.

김기형 1지대장은 열사와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통화하고, 가족 간 교류도 하는 끈끈한 사이다. 그래서 열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루 일당으로 4인 가족이 한 달을 살 수가 없으니 800만원 가량 대출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지대장 활동을 시작했던 작년부터 일을 많이 못 했을 테니, 지난해엔 2천만원 대출받았다고 했다.”

임차진 팀장은 “(열사가)철근팀장을 하고 있었으니 일거리만 있으면 꽤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지대장 책임을 다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자기 일당조차 챙기지 못하고 살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임 팀장이 “밥은 먹었냐” 물으면 열사에게선 “생각을 못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길 수차례. 건설현장에서 오래 일한 선배로서, “지금은 의욕이 넘쳐도 사업이 잘 안될 때도 있을텐데 몸까지 버리면 큰일이다. 밥이라도 잘 먹고 다녀라”고 했지만 ‘알겠다’ 하면서도 이 현장, 저 현장 다니느라 매일 굶고 다녔을 것이라고 했다.

임 팀장은 “지금 생각해보니 입맛이 없었던 이유가 일이 잘 안되니까, 건설사에 문전박대 당하고 조합원들이 일을 못 하게 되니까 그 책임감 높던 사람이 입맛도 없어졌을 게다”라고 짐작했다.

양 열사는 자신의 사정은 어려워도 언제든 조합원들을 가족처럼 챙겼다.

지난 여름 열사의 어머니집으로 휴가를 다녀왔다는 김 지대장은 양 열사가 “모든 걸 내어주고 퍼주고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집을 민박집으로 활용하면 얼마라도 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조차 안 하는 친구다. 노조 사람 누구라도, 그리고 조합원 아닌 사람까지 데려와서 쉬다 가라고 하는 동생”이었다.

윤강희 조직부장은 “열사가 담당한 3지대는 여느 곳보다 외지인 영동권 북부지역”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타지에서 일하러 온 사람보다 대부분 열사의 동네 선후배 노동자가 많았다. “열사는 이웃들의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늘 가족처럼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양회동 열사를 조문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뉴시스
▲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양회동 열사를 조문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뉴시스

“동지들 옆에서, 노동조합 옆에서”

“제가 오늘 분신을 하게 된 건 죄없이 정당하게 노조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 되지가 않네요.”
“항상 동지분들 옆에서 힘찬 팔뚝질과 강한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겠습니다.”

열사가 노동조합에 남긴 유서 내용이다.

윤강희 조직부장은 “노동조합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달랐다”고 열사를 추억했다.

“화장실, 휴게시설조차 없고, 잠깐 쉬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게 건설 현장이다. 비조합원으로 오랫동안 현장에서 무시당하면서 일하다가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노조와 투쟁하면서 현장이 바뀌고 팀원들이 하나씩 권리를 누리는 것에 자랑스러워 하셨다.”

열사는 ‘나는 노동조합을 해야 돼, 우리가 바꿔 나가야 돼’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투쟁에 누구보다 먼저 나섰고 솔선수범했다.

김기형 1지대장은 “건설 현장 집회는 아침 6시 반에 시작한다. 회동이는 늘 한 시간 먼저 와서 난로도 켜놓고, 커피물도 끓여놨다. 5시 반에 도착하려면 1시간 전에 집을 떠나야 했을 텐데, 그러면 새벽 4시에 일어났다는 거다.”

임차진 팀장은 2년 전 원주건설노조 투쟁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속초에서 우리가 천막 농성하는 원주까지 오려면 족히 2시간 넘게 걸린다. 어느 날은 농성장에 전기가 끊겼는데, 자기 차에 전선을 꽂아놓고 새벽까지 농성장을 지키다가 아침이 되면 또 현장에 나가고 그런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와라’ 하는 데도, ‘다들 고생하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와야죠’라고 웃어넘기는 사람”이었다. 양 열사의 노조에 대한 애정은 노조 생활을 오래 한 자신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열사는 유서에 ‘항상 동지분들 옆에서 힘찬 팔뚝질과 강한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겠다’면서 먼 곳에서도 노동조합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자를 자기 앞길에 걸림돌로 생각하는 못된 놈 꼭 퇴진시키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꼭 만들어 주세요”라고 당부했다. 

‘양회동’을 설명하기엔 모자란 단어들

‘나보다 동지를, 주변을 먼저 챙기는 사람’, ‘노동조합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책임감이 높았던 사람’ 양회동을 3지대장에 추천했다는 김기형 1지대장. “근면성실, 솔선수범, 헌신과 봉사... 그래서 추천했다. 다른 어떤 단어를 갖다 붙여도 양회동을 설명하기엔 모자라다”고 했다.

“철근공을 시작한 지 3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 반장을 하고 있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노조 들어오고 나서, ‘노조활동 하는 게 가장 보람’이라고 말하는 동지였다.” _임차진 팀장

“최근 강릉에 산불이 났을 때 피해 주민을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자고 지부에 먼저 제안했던 사람, 쉬는 날엔 해변가에 나가 청소 봉사활동 하는 사람이 양회동이다.” _김기형 지대장

김기형 지대장은 “회동이를 지대장으로 괜히 추천했나…”라는 회한이 밀려온다고 했다. 그러나 “분노만 하고, 억울해하고만 있을 새가 없다”는 것도 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열린 추모 촛불문화제 첫날 김현웅 강원건설지부 사무국장은 슬픔을 누르며 또박또박 열사의 마지막 말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탄원서 모으는 얘길 전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가족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내가 아는 게 니가 아는 것이고, 내 마음을 내가 아는데 무슨 탄원서가 필요하겠냐’라고 했다. 열사는 나 자신에 대한 탄원서 대신 유서를 썼다.” 그리고 양 열사는 5월1일 노동절 대회로 가는 동지들을 일일이 안으며 배웅했다.

▲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 걸린 추모 현수막.
▲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 걸린 추모 현수막.

“열사의 억울함, 반드시 되갚아 줄 것”

“제 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여기 오신 모든분들께 감사드리면서 제 동생의 명예 회복을 위해 끝까지 싸워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6일, 장례식장 앞 추모문화제에 양회동 열사 형이 유가족을 대표해 호소했다.

열사의 동료, 동지들은 그럴 참이다. 김 지대장은 “회동이가 먼저 간 것이 비통하고 원통하지만, 큰일을 한거라 생각한다. 53년 전 전태일 열사처럼 우리에게 불씨를 지펴줬다”고 했고, 윤강희 조직부장은 “열사의 뜻을 따르는 데에, 모든 행동의 선두에 설 생각”이라고 힘줘 말했다.

열사가 운명한 후에도 잔인한 강압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열사의 둘도 없는 동료였던 지부 간부들 몇 명이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경찰은 ‘조사하러 나오라’고 재촉했다. 2021년 사건까지 들춰내 소환조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형국이다.

“노동조합, 노사관계를 전혀 모르는 강력계 형사들이 수사에 나섰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신이 ‘다 안고 가겠다’는 열사에게 경찰은 ‘(노조)전임비 받았다고 하자’고 종용하기도 했다. 그때 열사는 ‘그런 거 아니다’라고 말했다. 건설노조를 ‘삥 뜯는 잡범’처럼, 어용노조처럼 취급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현웅 사무국장이 노조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던 열사의 뜻을 전달했다.

“현장 철거비용으로 28만원이 책정되면 뭐하나... 다단계 하도급 중간 착취로 빠지면 우리가 받는 돈은 4만원에 불과하다. 그런 불법은 조사 한번 안하고, 노동조합 때려잡는 데에 1계급 특진을 걸었다. 책임자가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김기형 지대장의 울먹임 속에 결심이 드러났다.

임차진 팀장도 “열사의 억울함을 반드시 되갚아 줄 것”이라고 했다. “다시 현장에 가서 일자리도 되찾고 노조활동 더 열심히 하면서, 저들이 틀렸고 우리 건설노조가 옳았다는 걸 보란 듯이 보여줄 것”이라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열사를 향해 “우리는 죄인이다. 그러나 죄책감에 빠지지 않겠다. 아빠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들딸만은 실망시키지 않도록 싸우겠다”는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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