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그동안 연재됐던 필화사건 중 '소설분야'에 이어 이번 주부터는 '시 분야' 필화사건을 중심으로 연재한다. '시 분야' 첫 필화사건은 김지하시인의 <오적>이다. 

 김지하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며, 1970년대 유신체제에 저항한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1941년 2월 4일 목포에서 태어났으며,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와 중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미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고,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오적필화사건 및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옥고를 겪었다. 

 

▲ <오적>으로 필화의 고초를 겪은 김지하시인

 1. 사건의 원인과 경과

민주화운동 당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의 작가로 유명한 김지하(金芝河)는 1970년 <사상계> 5월호(통권 205호)에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돼필화사건을 겪는다. 그 후 1972년 4월에는 권력의 횡포를 풍자한 담시 ‘비어(蜚語)’를 발표하여 다시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기도 한다.

초기의 그의 시는 대부분 사회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으로 이뤄져 있고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인물로 부각돼일반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오적’ 필화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8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그는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의 한명으로 각인됐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 특별상’을, 그리고 1981년에는 세계시인대회로부터는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으며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다. 이 칼럼에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 하나/죽음을 제멋대로 이용할 수 있나/슬기롭고 창조적 저항 선택해야”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가운데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표현과 칼럼의 내용은 소위 ‘운동권 젊은이들’이 마치 ‘죽음마저 운동의 방법으로 이용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이런 행보는 민주진보운동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며 심한 비난과 비판을 받았다. 이후 김지하는 최제우․최시형․강일순 등 동학과 증산도 사상에 그 나름의 독자적 해석을 더하여 ‘생명사상’을 제시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든다.

▲ <오적>이 실렸던 잡지 <사상계>

필화사건을 겪은 담시 ‘오적’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로 시작한다. 예언이라도 한 듯 김지하는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는다. 오적은 다섯 가지 도적, 즉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말하는데, 박정희정권의 부패를 풍자한 이 시를 실은 <사상계>는 폐간되고, 김지하 본인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오적’이 처음 <사상계>에 실려 문제가 되었을 때 시판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마무리가 됐다. 그런데 1970년 당시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6월 1일자에 다시 이 시가 전재돼 문제가 재발된다. 이튿날인 6월 2일, 중앙정보부는 신민당사를 수색해 김지하의 ‘오적’을 전재한 <민주전선>을 압수하고, 서울지검은 김지하를 비롯해 <사상계> 대표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을 반공법 제4조 제1항(반국가단체의 찬양 고무동조) 위반 혐의로 구속한다. 검찰이 내세운 구속 사유는, 김지하는 <사상계> 5월호에 담시 ‘오적’을 발표, 장·차관, 고급공무원, 장성, 국회의원, 재벌을 비방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으며, 다른 관련자들은 이 시를 실어준 혐의다. 1970년 9월 8일 병보석으로 석방되기까지 김지하는 100여 일 동안 구금된다.

1972년, 김지하는 가톨릭계 종합잡지 <창조> 4월호에 다시 담시 ‘비어’를 발표한다. ‘오적’과 마찬가지로 이 시도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국은 <창조> 4월호를 압수하는 한편, 김지하를 중앙정보부로 연행하고, 5월 31일에는 서울지검 공안부를 통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가 7월 15일 병원 연금상태에서 비공식적으로 석방했다. 1972년 11월 <창조>는 휴간형식으로 자진폐간하고 만다.

그리고 1974년 4월 25일 김지하는 또다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영장 없이 강제연행돼 불법구금된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의 배후 조종 하에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민중봉기를 획책했다는 것이다(‘민청학련사건’). 구금 나흘 뒤인 4월 29일 구속영장이 발부됐으며, 5월 27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관에 의해 기소돼 김지하는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때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공판 계속 중인 ‘오적필화사건’과 이 사건이 병합되고 1974년 7월 13일 판결로 모두 유죄가 인정돼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7월 22일 국방부장관은 사형이 선고된 이철, 김지하 등 민청학련사건 피고 5명에게 무기징역으로 감형 조치한다. 9월 5일 김지하는 항소를 취하함으로써 이 사건 판결은 1974년 9월 5일자로 확정된다. 그는 영등포교도소로 이송됐다가 1975년 2월 15일자로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이 후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글을 썼다가 또 5년여 간 옥고를 치른다. 

▲ <오적>의 삽화 (사진출처 : 유튜브 켑처)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2010년 11월 김지하는 서울중앙지법에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다. 이에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판사 이원범)는 2013년 1월 4일 민청학련사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오적필화사건에 대해서는 재심사유를 인정할만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전자와는 달리 후자에 대해서는 ‘법리상’ 완전히 누명을 벗지는 못한 셈이다.

민청학련사건의 재심판결에 의거하여 김지하와 그의 아내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및 장남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4년 9월 2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배호근 부장판사)는 “국가는 김씨 등에게 15억 115만여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일부승소 판결(2014가합5324)했다. 김씨 등 원고 측과 배상금을 물어주게 된 정부 측은 1심 판결에 불복해 각각 항소했다. 그러나 2015년 4월 8일 서울고법 민사2부(김대웅 부장판사)는 “원고와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고 선고하여 원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일부승소했다. 이 결과에 대해 검찰이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4월 23일 항소심 판결이 확정됐다.

김지하는 민청학련과 필화사건 등으로 6년 4개월을 복역했다. 다행히 민청학련사건 재심을 통해 억울한 누명도 벗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일부 승소하여 ‘국가의 반민주적 불법행위로 입은 손해’에 대해 금전적으로 배상받았다. 이로써 김지하의 억울함은 ‘법적으로’ 모두 해소되었을까? ‘법적으로’ 또는 ‘금전적으로’ 어느 정도 구제받았다고 해서 지난 40년간 고통 받고 잃어버린 그의 삶까지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그가 고통 받은 삶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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