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복 교수의 ‘한국문학의 필화사건’

장정일은 1962년 1월6일 대구시 달성군에서 태어났으며, 소설가, 작가, 시인, 수필가이자 극작가이다. 그는 중학교(성서중학교) 중퇴라는 최종 학력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독학과 독서를 통해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책읽기는 그가 그토록 무서워하고 미워하는 아버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버지’로 표상되는 권위적인 가부장은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모티브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였고, 1987년에는 희곡 ‘실내극’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그리고 같은 해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다. 1996년 발간한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외설시비에 휘말려 필화를 겪으면서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는다. 

4. 문학으로 법 읽기, 법으로 문학 읽기

▲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장선우감독 '거짓말'의 한 장면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인데, 장정일의 최종 학력이 중학교 중퇴라는 ‘사실’이다. 학력(벌)만능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이 ‘사실’은 장정일이 작가로서 누리고 있는 명성에 비춰보면 ‘벌레가 인간이 된 것과 같은 󰡐하나의 사건󰡑‘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대구에 있는 ‘성서중학교’를 중퇴한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나도 그 학교 출신이니 그와 나는 ‘성서중학교 동문’이다! 중학교를 ‘중퇴’한 때문일까? 나는 그 학교를 다닐 때도, 또 졸업한 후에도 장정일이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한 그와 나-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아니,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또 그의 글(소설) <거짓말>을 읽으면서 그와 나-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됐다. 그는 누구인가? 나는 그가 궁금해졌다.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기획위원회’가 펴낸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는 ‘인간 장정일’과 ‘작가 장정일’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중에 장정일 본인이 쓴 ‘아무 뜻도 없어요’라는 제목의 단상에서 그는 자신이 ‘대인기피증’이 있음을 밝힌다.

“나의 대인기피는 유식은 차치하고 본인이 무척 무식하다는 데 있다. 깨닫지 못하다면 모르되, 바이메탈이 붙었다. 떨어지듯이 5초 상간으로 계속 자신의 무식을 자책해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장정일은 자신의 대인기피 원인을 ‘본인의 무식’에서 찾고 있다. ‘중학교 중퇴’라는 그의 내세울 것 없는 학력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인들의 상식적 판단으로 보면 장정일은 ‘무식’하다. 그런데 그의 자책과는 달리 그는 웬만한 지식인보다 ‘유식’하다. 그는 1993년 1월 1일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서일기를 써서 발간하고 있다. 그가 발간한 <장정일의 독서일기 1~7>과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3>을 읽어보면, 그의 방대하고 체계적인 독서이력을 알 수 있다. 무식한 ‘작가 장정일’을 키운 것은 제도권 교육이 아니라 독서, 즉 책읽기였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의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 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누가 이것을 소박한 꿈이라고 조롱할 수 있으랴.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 없이 읽는다는 건 원대한 꿈이다.”

그의 방대한 독서 이력을 담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어 본 독자라면 어느 누구도 그가 무식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대인기피는 그 자신이 평가하듯 무식에서 연유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천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장정일의 대인기피는 다른 필자들의 경험과 글을 통해 수없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그가 인터뷰나 사진찍히기를 정말 싫어한다는 식이다. 장정일 본인은 그것을 ‘작자로서의 삶의 원칙’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임형옥은 “내가 보기에는 거의 본능이나 결벽증이 아닌가 싶다”고 평가하고 있다.

평소 장정일은 아주 순수하고 순진한 “10대 소년의 얼굴”을 한 ‘소년 장정일’이다. 그러나 인터뷰나 사진찍히기를 거부하는 예에서 보듯이 ‘작가 장정일’은 단호하다. 실제로 장정일은 ‘늘 금기의 경계선에서 사회의 통념과 상식과 싸우며 한국문학의 경계를 해체해 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중학교 중퇴 학력에다 대인기피마저 심한 장정일을 이렇게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가치관은 무엇일까?

<장정일의 독서일기 3>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바로 말함이란 쓸데없는 글”에는 장정일의 ‘소설이 끈질기게 천착했던 두 개의 사항’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이번 소설에서처럼 나라는 개체를 낳아준 아버지를 씹새끼로 만드는 것으로, 다른 또 하나는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 시험된 ‘그는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탁자에 놓았다’ 식의 구문은 물론이고 이야기가 지탱해야 하는 최소한의 개연을 파괴함으로써 나의 실존과 호구의 근거가 되는 소설의 모든 형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장정일에게 있어 ‘나라는 개체’와 그 개체를 낳아 준 ‘아버지’의 관계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쇳말(키워드)이다. 그에게 ‘나라는 개체’는 ‘개새끼!’고, ‘사람도 아닌 나’이다. 그런 ‘개체로서 나’를 낳아 준 ‘아버지’는 ‘신격화된 아버지(신버지)’로서 그가 부정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자 창작의 근원이다. 이에 대해 신철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은 비판의 차원을 넘어 증오의 감정에 이를 정도로 격렬한 것이 되어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화두를 해석해볼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따라서 작가 장정일에게 ‘아버지’는 부정하고 저항해야 하고, 또 극복해야 할 ‘근대성’이다. 즉 ‘나라는 개체’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아버지’는 운명적으로 해체되어야 한다. 그 대상은 도덕, 윤리, 관념, 체제는 물론 ‘또 다른 아버지’다. 마치 그는 ‘아버지’의 해체를 통해 ‘또 다른 아버지 만들기’에 골몰하면서도 끊임없이 ‘모든 아버지’를 해체한다.

장정일의 이러한 정신은 시인 이성복이 노래한 “아버지, 아버지 ......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 중)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는 이성복의 말처럼 ‘아버지 씹새끼’로 표상되는 도덕적 엄숙주의는 ‘가면 뒤의 얼굴’마저도 ‘가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면으로 가린 ‘가짜 얼굴’을 죽이고,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세상에 ‘참 얼굴’을 드러내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장정일은 혁명적 선언을 한다.

“창작을 지속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악한 적을 상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동력을 얻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어떤 필요에서보다 내 성적 환상을 인정받기 위해 내 유년을 압박한 아버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애초에 내게는 그 어떤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 따위의 존재 없이 고독 속에 태어났다.”(<거짓말>, 206~207쪽)

 

▲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포스터

“나는 아버지 따위의 존재 없이 고독 속에 태어났다”

장정일의 이 선언은, “신은 죽었다!‘고 외친 짜라투스트라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이 선언은 개인의 절대자유를 간섭하고 억압하는 모든 사상과 체제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 장정일‘이 재구성 혹은 재탄생(르네상스)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나의 실존과 호구의 근거가 되는 소설의 모든 형식을 부정“한다. 이를테면 <거짓말>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성(sex)이란 ’나의 실존‘과 ’소설의 모든 형식을 부정‘하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이 주장은,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성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쩌면 그의 모든 소설 형식의 ’강한 부정‘은 그에 상응하거나 또는 그 보다 훨씬 ’강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가치관 덕분일까? <거짓말>로 필화사건을 겪고, 또 그 자신이 구속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어도 장정일은 법정소송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받아들인다. 그에 대한 남재일의 회고담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장정일로서는 ‘거짓말’을 둘러싼 상황이 심적으로 부담스런 상태였고, 사회적 반응이 어떻게 귀결될지 궁금해 했다. 나는 ”성적 표현의 수위나 여주인공이 고등학생이란 설정이 금기의 선을 넘어간 것 같다“며 ”내가 판사면 골치 아프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한술 더 떠 ”맞심더, 내가 판사라도 구속 안 시키겠습니까“라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물론 역설적인 표현이었지만 그는 이미 구속을 각오한 것 같았고, 그 소설 자체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던져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왜 이토록 지독한 ‘자기부정과 긍정’을 되풀이하는 것일까? 또 이를 통해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책(문학)의 독자이면서 저자’다. 이에 대해 <장정일의 독서일기 1>의 ‘머리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내가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톨스토이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읽는 모든 책의 양부가 되고 의사(pseudo) 저자가 된다.”

법학교수라는 전문직업인으로 살면서 ‘나의 실존과 호구’를 위해 일반인보다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하지만 나는 진정 행복한 독자이면서 저자일까? 위 책의 ‘머리말’에서 장정일은 “‘행복한 저자’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희망을 밝힌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행복한 저자’는 그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날 누가 얼굴을 똑바로 하고 자기 자신을 쾌락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그 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단호하게 밝힌다.

▲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장선우감독 '거짓말'의 한 장면

“나는 그 단어가 가진 가장 엄밀한 의미를 쫒는, 쾌락주의자가 되고 싶다.”

작가로서, 또 독자로서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가 가진 가장 엄밀한 의미를 쫒는 쾌락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아버지 씹새끼’가 두려워 고개 들지 못하고 평생 노예로서 굴종의 삶을 사는 우리로서는 감히 그를 넘어설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채형복 교수는 프랑스 엑스 마르세유 3대학에서 ‘유럽공동체법’을 전공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시인이기도 하다. <늙은 아내의 마지막 기도>, <저승꽃>, <우리는 늘 혼자다> 등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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