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elite US institutions created Afghanistan’s neoliberal President Ashraf Ghani, who stole $169 million from his country

미국 엘리트기관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1억6,900만 달러를 훔친 신자유주의적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아프가니스탄의 꼭두각시대통령이었던 아슈라프 가니는, 1억6,900만달러를 훔쳐 불명예스럽게 실패한 국가에서 달아나기 이전에, 미국의 최상류대학에서 양성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세계은행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훈련받았고 언론으로부터 "부패할 수 없는" 기술관료라고 칭송받았습니다.

저자: 벤 노튼
역자: 한원주(영어강사)

미국 엘리트기관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1억6,900만 달러를 훔친 신자유주의적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아프가니스탄의 꼭두각시대통령이었던 아슈라프 가니는, 1억6,900만달러(1970억 원 - 편집자주)를 훔쳐 불명예스럽게 실패한 국가에서 달아났습니다. 그 이전 가니는 미국의 최상류대학에서 양성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세계은행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훈련받았고 언론으로부터 "부패할 수 없는" 기술관료라고 칭송받았습니다. <대서양위원회>와 같은 강력한 미국정부 연구소들의 지도를 받았고 그의 책 <실패한 국가 고치기>는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20년간 지속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중심에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만큼 부패, 범죄, 도덕적 타락을 상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올 8월 탈레반이 그의 나라를 장악하고, 가파른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볼링공의 기세로 전진해가며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고 많은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자 가니 대통령은 수치스럽게도 달아나 버렸습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던 이 꼭두각시 지도자는 전해지는 바로는 국고에서 훔친 1억6,900만달러를 가지고 탈출했다고 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가니 대통령은 4대의 차와 헬리콥터 한대에 현금을 쑤셔 넣은 뒤 아랍에미리트로 날아가 "인도주의적" 이유로 망명을 허가받았습니다.

대통령의 부패는 이전에 이미 드러났었는데, 일례로 가니는, 그의 동생과 미군 관련 민간기업과의 수상한 거래를 중개해서 매장량 1조 달러로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의 광물사업에 그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막판 퇴장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배신을 의미합니다.

가니의 고위 보좌관들과 관료들은 즉시 그를 공격했습니다. 국방장관인 비스밀라 모하마디장군은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며 다음과 같이 트위터에 남겼습니다. “그들은 우리 손을 등 뒤로 묶어 놓고 조국을 팔아넘겼다. 벼락맞을 놈들 같으니!”

가니의 극적인 탈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NATO가 벌인 전쟁의 타락과 그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이 매우 부유해지는 방법을 보여주는 극명한 막장드라마이지만, 사실 그 부패에는 훨씬 더 깊은 배경이 있습니다. 가니 대통령의 집권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평판을 가진 부유한 싱크탱크와 학술기관들에 의해 신중하게 관리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서방 정부들과 그들의 속기사인 언론기업들은 아슈라프 가니와 진정한 정분을 나누었는데, 그는 탈레반의 땅에 신자유주의를 수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가니는 그들이 직접 만든 아프가니스탄의 밀턴 프리드먼*이었고, 그들은 가니의 책을 자랑스럽게 광고해 주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 Milton Friedman - 케인즈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미국의 경제학자. 자유방임주의 시장경제 옹호자. 자유시장 내 정부가 맡는 역할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 진보주의자들로부터는 신제국주의를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이론을 만든 ‘금융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비판받음

** Francis Fukuyama -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1989년 냉전이 종식되는 순간을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라고 함. 이데올로기 대결의 역사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

미국정부는 마침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경제 프로그램을 실행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습니다. 다만, 경기장에서 수많은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희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은 가니의 통치에 감격했습니다. 물론 피노체트의 암살단과 강제수용소, 헬리콥터로 저지르던 암살을 대체한 것은 외국군대에 의한 점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니와 그의 신식민지 수호자들 사이의 거리가 있어보이는 것은 NATO가 아프가니스탄을 마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이라고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남반구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될 수 있었습니다.

* Augusto Pinochet - 1970년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붕괴시키고 1973-1990년 칠레를 지배한 군부 독재자. 강압적인 군사독재로 반대자들을 고문 학살. 자유지상주의적 경제정책 시행.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정부가 민주선거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미국이 칠레 수출의 절반 이상인 구리 가격을 급락시키고(70년 톤당 $66에서 72년 $9로) 친미정권 수립을 위해 CIA가 칠레 쿠데타 세력에 자금지원

** 피노체트 독재시절의 축구경기장은 양심수들이 학살당한 뒤에 화장되는 반인륜적인 만행의 장소였음

시카고 보이즈(남미의 시카고대 출신 경제학자들)의 남아시아 버전이자 미국 교육을 받은 가니는 자유시장의 힘을 깊이 신봉했고 자신의 비전을 발전시키기 위해 워싱턴DC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인 <국가효율성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슬로건은 "국가와 시장에 대한 시민 중심의 접근"이며 자본주의의 경이로움을 전파하는 데 특별히 전념했습니다.

수상 경력이 빛나지만 다소 희극적인 제목의 책 <실패한 국가 고치기>에서 가니는 그의 독선적인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265쪽 분량의 이 책은 “시장”이라는 단어를 무려 219번이나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끌던 국가가 미군철수 후 며칠 만에 무너졌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카불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갑작스럽고도 비참하게 붕괴되자, 서방 정부들과 주류 언론기자들은 광란에 휩싸였고 이들이 비난할 사람을 미친 듯이 찾았습니다. 그 때 가니는 편리한 희생양으로 눈에 띄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사실은, (지금 가니를 비난하고 있는) 이 NATO 회원국들과 언론 매체들이 지난 20년 동안 가니를 부패와 용감하게 싸우는 고귀한 기술관료로 묘사하면서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열렬한 후원자들이었으습니다. 그러나 그가 쓸모가 없어지자 그를 버스 밑으로 던져 버렸고, 마침내 가니가 예전부터 언제나 신뢰할 수 없었던 사기꾼임을 고백했습니다.

아슈라프 가니는, 미 제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직접 뽑아서 육성하고 권력을 맡긴 신자유주의 엘리트의 교과서적인 예이기 때문에 이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슈라프 가니는 미국 제품

아슈라프 가니와 미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겹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즉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니대통령은 하나의 정치적인 산물이며 자랑스럽게도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이기 때문입니다.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프가니스탄 왕가를 위해 일했으며 든든한 정치적 인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니는 젊은 시절에 고향을 떠나 서방세계로 향했습니다.

2001년10월 미국의 아프간 침공 당시, 가니는 인생의 절반을 미국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제국의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2009년까지 미국 시민이었던 가니는 미국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미국시민권을 포기했습니다.

가니의 전기를 보면 그가 미국 엘리트기관들의 배양접시에서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가니대통령 양성과정은 그가 1967년에 졸업한 오레곤주의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졸업 후 가니는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뉴욕타임즈가 표현한 대로, "지중해 해변을 즐기고 댄스파티에 나다니다 레바논계 미국인인 아내 룰라를 만났습니다".

1977년에 가니는 미국으로 돌아가 이후 24년을 더 지내게 됩니다. 그는 뉴욕시의 명문인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분야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인류학 – 미국의 정보기관들과 국방부가 철저히 침투해 있는 학문입니다.

1980년대에 가니는 곧바로 최고의 학교인 UC 버클리, 존스 홉킨스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또한 영국 국영매체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며 정보기관과 연결된, BBC의 다리어 및 파슈튠어 서비스에 대한 주요 논평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1985년 파키스탄에서 이슬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가니에게 권위 있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수여했습니다.

1991년 무렵, 가니는 학계를 떠나 국제정치의 세계로 진출하기로 결정하고, 신자유주의 신념을 전 세계적으로 강제하는 주요 기관인 세계은행에 합류합니다. 정치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이 설명했듯이 이 기관은 미국 군대의 가상의 팔 역할을 합니다.

가니는 세계은행에서 10년 동안 일하면서 파괴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 긴축 조치, 대규모 민영화 등의 집행을 감독했는데, 주로 남반구와 구소련에서 활약했습니다.

2001년12월 가니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후 그는 미국이 만든 카불의 꼭두각시 정부에서 신속히 재무장관으로 임명됩니다. 2004년까지 재무장관, 2014년부터 202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세계 은행에서 자신이 개발한 계략을 사용하여 워싱턴 합의*를 그의 고국에 적용했습니다.

* Washington Consensus -- 1990년대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해 제시했던 미국식 시장 경제 체제의 확산 전략.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대명사로 정부 규모 축소, 관세 인하, 시장 자유화와 개방, 민영화 등의 구조조정 제시. 동구 사회주의국가의 체제 전환과 1990년대 후반 아시아의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채택됨. 세계의 경제시스템을 미국의 자본과 기업이 진출하기 쉽게 만들어 미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

가니를 내세워 미국이 세운 이 정권은 너무도 만화스럽게 신자유주의적이어서 "아프가니스탄의 CEO"라는 고위 관리직을 제정하기까지 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가니는 미국정부의 지원 하에 점진적으로 정치적 등급을 한 단계씩 올려 갔습니다. 그는 2005년 기술관료적 통과의례로 TED 강연*을 했고, 청중들에게 "망가진 국가를 재건하는 방법"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하며 큰 호응을 받게 됩니다.

*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미국의 비영리 재단에서 운영하는 강연회이다. 정기적으로 기술, 오락, 디자인 등과 관련된 강연회를 개최한다.

이 강연은 세계은행에서 훈련받은 제국주의 관료의 생각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가니는 자본주의가 세계에서 도전할 수 없는 형태의 사회 조직이 되었다고 역설하면서, 그의 스승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문제는 더 이상 한 국가가 어떤 체제를 원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와 어떤 유형의 민주적 참여”인가라고 주장했습니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식 방언으로, 가니는 “우리는 자본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국가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동원하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자고 시청자들을 초대했습니다.

같은 해에 가니는 카불대학교 신임총장 자격으로 유럽아이디어네트워크회의에서 연설을 하며 세계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더 깊이 설명했습니다.

가니는 “중도우파”를 찬양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NATO와 세계은행같은 제국주의 기관들을 강화해야 한다고 단언하면서,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세계적 노력의 일환”으로 전 세계로 수출될 수 있는 모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가니는 또한 그의 연설에서 구소련에서 미국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충격 요법"을 실행했던 시간에 대해 애정 어린 회상을 했습니다. : "1990년대에...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고 세계 여타 나라들은 러시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에 저는 러시아에서 5년 동안 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가니는 모스크바에서 세계은행과 함께 일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해서 아프가니스탄정부 웹사이트의 공식 약력에 "러시아 석탄산업의 조정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했다고 자랑했습니다. 이 말인 즉, 이 유라시아 대국의 막대한 탄화수소 매장량을 민영화했다는 것입니다.

가니가 소비에트 이후의 러시아에서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동안 유엔아동기금UNICEF는 2001년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에 의하면 신생자본주의 러시아에 강요된 10년간의 대규모 민영화로 인해 320만 명이라는 엄청난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고 기대수명이 5년이나 단축되었으며 1,800만 명의 어린이가 "높은 수준의 아동영양실조"와 함께 극심한 빈곤에 빠지게 됩니다. 주요 의학저널인 <랜싯>도 비슷한 사실을 밝혔는데, 미국이 만든 경제프로그램이 러시아 성인남성의 사망률을 12.8% 증가시켰습니다. 이는 그 경제프로그램으로 촉발된 56.3%라는 충격적인 남성 실업률 때문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기록들을 감안할 때, 가니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 치솟는 빈곤율과 비참함을 가져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웁살라 대학의 평화 및 분쟁 연구교수이자 유네스코의 국제수자원협력 의장인 아쇼크 스웨인이 지적하기를, 20년간의 미국-NATO 군사점령기간 동안 “빈곤한 상황에 처한 아프간인의 수는 두 배가 되었으며, 양귀비 재배지역은 세 배로 늘었습니다. 아프간인의 3분의 1 이상이 식량이 없고, 절반은 식수도 없고, 3분의 2 이상이 전기가 없습니다.”

"미국은 20년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2조3000억 달러로 무엇을 했는가? 빈곤에 시달리는 아프간인의 수는 2배, 양귀비 재배지역은 3배가 되었습니다. 아프간인의 3분의 1 이상이 식량이 없고, 절반이 식수도 없고, 3분의 2 이상이 전기도 없습니다."
— Ashok Swain(@ashoswai) 2021년 8월 21일

가니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의 목구멍에 밀어 넣은 자유시장이라는 약물은 그와 세계은행 동료들이 구소련 이후 러시아에 강요한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과 비슷한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니 경제학의 가짜 만병통치약은 소위 국제사회에서 열렬한 지지자들을 발견했고, 2006년 무렵 그의 세계적 평판은 정점에 이르러, 가니가 UN사무총장 코피 아난의 후임자로 간주될 정도였습니다.

한편, 가니는 싱크탱크 설립을 위해 NATO 국가들과 억만장자가 후원하는 재단들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고 있었는데, 그 싱크탱크의 이름은 영원히 아이러니의 빛깔을 띠고 있을 겁니다.

최종적로로 실패한 국가 관리자가 엘리트들에게 "실패한 국가 고치기"에 대해 조언합니다

2006년 가니는 소비에트 이후 러시아에서 실시한 "친기업" 정책을 고국에서도 운영한 경험을 활용하여 국가효율성연구소라는 싱크탱크를 공동 설립했습니다.

국가효율성연구소는 IMF 광고책자에나 나올 법한 개념들로 자신을 홍보합니다. "국가효율성연구소의 작업은 1990년대 후반 국가전략과 프로그램 집행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은행 프로그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개혁을 위한 연합체를 구축하고 대규모 정책들을 시행하며 차세대 개발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연구소의 슬로건은 오늘날 기술관료적 상용구의 서투른 모방으로 읽힙니다. "국가와 시장에 대한 시민 중심의 접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역할 외에도, 국가효율성연구소는 동티모르, 아이티, 케냐, 코소보, 네팔, 수단 및 우간다를 포함한 21개국에서 유사한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이들 국가에서, 이 연구소는 "국가의 기능과 정부, 시장, 국민들 사이의 균형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국가효율성연구소에 자금을 지원하는 이들은 워싱턴에 법적인 기반을 두고 있는 싱크탱크 재정담당자들 명단과 같습니다: 서방 정부들(영국, 독일,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엘리트 국제금융기관들(세계은행과 OECD); 및 서구 정보기관과 연관된, 억만장자가 후원하는 기업재단들(록펠러형제기금, 열린사회재단, 폴싱어재단 및 카네기기업)

가니와 함께 국가효율성연구소의 공동설립자는 자유시장 열성파인 클레어 록하트였는데, 그는 전 투자 은행가이자 가니의 세계은행 동료로서, 이후에는 NATO가 창설한 아프간정부의 UN고문으로 일했고, CIA가 지원하는 <아시아재단>의 일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시장에 집착하는 가니와 록하트의 입장은 2008년 국가효율성연구소와 신자유주의 싱크탱크 동지인 아스펜연구소 간  형성된 협력 관계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 협정에 따라, 가니와 록하트는 아스펜연구소의 "시장육성계획"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계획은 "합법적인 시장경제를 구축하는 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대화와 기본체계 및 적극적인 참여를 만들어"내고, "가치사슬을 배치하며 근간이 되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 및 기반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시민들이 세계화되고 있는 세계의 혜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워싱턴DC의 싱크탱크들을 풍자하려는 소설가 누구든지 그러한 국가효율성연구소에 대해 글을 썼다면 너무 성급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2008년, 가니와 록하트가 <실패한 국가 고치기: 부서진 세계 재건을 위한 체계>라는 책에서 기술관료주의적 세계관을 자세히 설명했을 때 최고의 논리적인 모순이 나왔습니다.

앞표지 안에 처음 등장하는 글은 가니의 사상적 지도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추천문인데, 그는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함께 세계가 "역사의 종말"에 이르렀으며, 인간사회는 미국정부 주도의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질서 아래 완성되었다는 선언으로 악명을 떨친 경제학자입니다.

후쿠야마의 찬사에 이어 페루의 우익 경제학자 에르난도 드 소토의 열렬한 지지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자본의 신비: 자본주의가 서양에서 승리하고 다른 곳에서는 실패하는 이유 >(스포일러: 드 소토는 그것이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함)라는 논문의 저자입니다. 이 시카고대학 출신 경제학자는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독재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 정책들을 만든 자입니다.

가니의 책에서 세 번째 추천사는 골드만삭스의 부회장인 로버트 호매츠가 쓴 것인데, 그는 이 책이 훌륭하게 다듬어진 특별히 가치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패한 국가 고치기>라는 미치도록 지루한 독서력을 요구하는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가니의 명제를 장황하게 반복하며 265페이지를 채우고 있습니다. : 실질적으로 세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자본주의 시장이고 국가는 이러한 시장들을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으로 장황하고 상투적인 글에서, 가니와 록하트는 "작동가능한 시장을 구축하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의 창조적 에너지와 기업가적 에너지를 시장경제의 이해당사자로 참여시킨니다. 그리하여 경제조직의 모델이라는 측면에서 경쟁자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어져 왔다"라고 썼습니다.

잠을 부르는 이 신자유주의 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세계은행 소책자 중 아무거나 훑어봤어도 똑같은 양의 지식을 배웠을 겁니다.

이 책은 "시장"이라는 단어를 약간씩 변형해 가며 219번 사용한 것에 더해, "투자하다", "투자" 또는 "투자자"라는 단어들을 159회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어설프고 기계적인 구절들로 반복해서 채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의 전환을 착수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착취적이며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라는 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성공적인 정부는 시민들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국가와 시장 간의 협력 관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이러한 협력 관계는 재정적으로 수익성이 있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합니다.”

가니와 록하트는 심지어 "자본주의와 부패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식의 주장하기까지 하며 자신들의 이념적 광신을 부각시켰습니다. 물론 가니는 이후에 그의 가족이 투자한 미국 회사들에 자신의 조국을 팔아치우고 아프가니스탄의 광물 매장량에 대한 독점 채굴권을 제공한 다음, 국고에서 훔친 1억6900만 달러를 가지고 페르시아만의 한 왕국에 잽싸게 도망치는 것을 통해, 이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벨트웨이*의 자기들만의 엘리트 계층 사이에서, 이 우스운 책은 걸작으로 칭송받았습니다. 2010년에, <실패한 국가 고치기>로 가니와 록하트는 포린 폴리시**의 글로벌 사상가 100인 리스트에 부럽게도 50위나 차지했습니다. 이 저명한 잡지는 그들의 국가효율성연구소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가건설 싱크탱크”로 묘사했습니다.

* Beltway - 미국의 Washington D.C.와 Maryland, Virginia 두 주의 일부를 둘러싼 전장 66마일의 환상 고속도로. 그 안에 특권 계급이 많이 거주함. 워싱턴의 미국정부 로비단체들

** Foreign Policy -미국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1970년부터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외교전문지

실리콘밸리 역시 이에 매료되었는데, 구글은 두 사람을 뉴욕 사무실로 초대하여 그 책의 결론을 설명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NATO의 대서양위원회가 가니를 키워내다

워싱턴DC의 K가에 있는 밀폐된 사무실에서 학자티를 내며 출입증을 매고 타이핑을 하는 전문가들은,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외국의 군사점령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지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어 왔습니다. 그들을 고용한 싱크탱크들은, 전쟁이란 "시대에 뒤진"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와 계몽을 촉진하여, 신식민지를 문명화하는 임무라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1977년부터 2001년까지 24년간 미국에 거주하며, 정치적으로 연결된 미국 싱크탱크들과 대학들의 이 갇혀진 환경속에서 바로 가니라는 정치인이 태어났습니다.

유력한 브루킹스 연구소*는 그에게 매혹되었습니다. 이 연구소의 외교정책 연구책임자이자 진보적 개입론자인 마이클 E. 오핸런은 2012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가니를 "경제 마법사"로 칭송했습니다.

* Brookings Institution : 미국의 사회과학연구소.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3대 연구소 중의 한 곳. 외교정책과 경제정책 및 정부통치에 관한 연구

그러나 가니의 출세를 부추긴 조직들 중 우두머리는 워싱턴DC에 있는, 사실상 NATO의 싱크탱크인 대서양위원회입니다.

가니의 영향력과 후원자들은 그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데, 이 아프간 대통령은 단 16개의 프로필만을 팔로우했습니다. 그 중에는 NATO, NATO의 뮌헨안보회의, 대서양위원회 등이 있습니다.

가니가 대서양위원회와 함께 한 작업은 거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9년 4월, 가니는 대서양 위원회의 의장이자 CEO인 프레데릭 켐프와 그에게 아첨하는 인터뷰를 했는데, 켐프는 두 사람이 2003년부터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다고 밝혔습니다.

켐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제가 대서양 위원회에 왔을 때 우리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업들의 현직 의장들과 CEO들, 주요 국가들에서 저명한 전현직 내각 각료들로 구성된 국제자문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나는, 모든 남아시아 국가의 대표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국제자문위원회에 아프가니스탄 대표룰 포함시킬 결심은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슈라프 가니와는 함께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켐프는 가니가 국제자문위원회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전략자문단이라는 대서양위원회의 영향력있는 실무그룹의 일원이기도 하다고 밝혔습니다. 가니와 함께 그 위원회에 합류한 이들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기업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서방 정부와 군의 전직 고위 관료들입니다.

대서양위원회의 전략자문단의 일원으로서 켐프는 자신과 가니가 버락 오바마 정부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략 수립을 도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아슈라프 가니와 대서양위원회 회장 프레드릭 켐페, 2015년
아슈라프 가니와 대서양위원회 회장 프레드릭 켐페, 2015년

“내가 처음으로 아슈라프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런 모습으로였고, 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기 목표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한 모든 자원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목표들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켐프는 말합니다.

“그 시점에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10년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략을 개발하고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실행계획정도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우리는 이 실행전략을 뒷받침할 오바마대통령의 기획안이 만들게 되었습니다.”

가니는 2009년 <대서양 위원회>에 이 전략을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10년 구상 : 오바마계획의 달성과 그 넘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습니다.

아프카니스탄 10년 구상
아프카니스탄 10년 구상

2009년에 가니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선거에서도 후보였습니다. 자신의 선거운동 관리를 위해 가니는, 빌 클린턴, 존 케리 및 힐러리 클린턴의 민주당 대선캠페인에서의 전략가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 컨설턴트 제임스 카빌을 고용했습니다.

당시 파이낸셜 타임즈는 가니를 “아프간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자 중 가장 서구화되고 기술관료적”이라고 호의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아프간 사람들은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았습니다. 최종적으로 3% 미만의 득표율과 4위의 성적으로, 가니는 대통령 선거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선거 후 가니의 친구 켐프가 그해 10월 인터뷰를 위해 그를 다시 초대했을 때, 이 대서양위원회 회장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의 선거운동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성공적인 선거운동을 펼쳤으나 승리하지는 못했다고 말하겠습니다.”

켐프는 칭찬의 소리를 쏟아냈는데, 가니를 "지구상에서 가장 유능한 관료 중 한 명"이라고 부르며 "이념적으로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켐프는 또한 가니의 연설이 “오바마정부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지적했는데, 대서양 위원회가 오바마정부 정책수립을 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선거 전에는 미국과 아프간의 이중 여권을 가지고 이곳에 올 수 있었겠지만, 대통령직에 출마하기 위해 치른 희생 중 하나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미국-아프간 단일 입국 비자로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경악스럽습니다.”라며 켐프는 덧붙입니다. "그래서 대서양 위원회는 그 문제에 대해 방법을 강구할 것이고 분명히 이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가니는 그 후 몇 년 동안 대서양 위원회와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켐프와 지속적으로 인터뷰 및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그 중 한 인터뷰에서 켐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다 폭로하자면, 나는 아슈라프가 친구, 소중한 친구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2014년까지 가니는 대서양위원회 부속 국제자문위원회의 적극적인 회원이었는데, 이 회의에는 수많은 전직 국가원수들과 미 제국기획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신자유주의 경제 전도사 로렌스 서머스, 레바논계 사우디인 억만장자이자 집권세력인 바하 하리리, 우익 언론계 거물인 루퍼트 머독, 코카콜라, 톰슨 로이터(미국 뉴욕 맨하탄에 본사를 둔 다국적 정보서비스 기업), 블랙스톤 그룹(세계 최대의 사모펀드 운용 회사)., 록히드 마틴(세계 최대의 군수기업)의 CEO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에 기회가 찾아왔고 가니는 자신의 궁극적인 야망이 눈앞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미국의 엘리트 기관들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을 키워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기술관료 개혁가"에 대한 미국정부의 사랑

탈레반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첫 번째 지도자였던 하미드 카르자이는 처음에는 자신이 서구의 충성스러운 꼭두각시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2014년 집권 말기 즈음에 카르자이는 미국 정부에 대한 "가혹한 비평가"가 되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12년의 대통령 재임기간동안 적으로 변한 동지”입니다.

카르자이는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미국-NATO 군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조종당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화가 났고, "아프간인들은 우리들의 전쟁이 아닌 전쟁에서 죽었다"고 한탄하며 더 많은 독립성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미국정부와 NATO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들을 닮은 새 정부를 세우는 데 10년에 걸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꼭두각시인형이 매달린 끈들을 무시하기 시작한 겁니다.

NATO 회원국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슈라프 가니는 카르자이의 완벽한 대체품이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기술 관료의 초상이었으나 한 가지 작은 단점이 있었는데, 아프간인들이 그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2009년 대통령선거에서 3% 미만의 득표를 받았을 때, 가니는 공개적으로 ‘워싱턴 합의’를 대표하며 출마한 것이었고, 카불에 있는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지지했습니다.

그리하여 2014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을 때 가니와 그의 서구 조련사들은 다른 노선을 선택했는데, 가니에게 아프간 전통 의상을 입히고 그의 연설은 민족주의적 미사여구로 채워졌습니다.

뉴욕타임즈는 그가 마침내 최적의 자리를 찾았다고 주장했습니다 : “관료에서 아프간 대중주의자로, 아슈라프 가니가 변모했습니다.” 이 신문은 가니가 기술적 언어라고나 불러야할 모국어로 잡담을 하던 "친서방 지식인"에서 어떻게 “적들과 거래를 성사시키고 라이벌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며 아프가니스탄의 민족적 자부심에 호소하는” 대중영합주의자들의 서투른 모방자"로 변했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브랜드변경 전략은 가니를 2위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2014년 1차 선거에서는 여전히 가볍게 패배했습니다. 그의 경쟁자인 압둘라 압둘라는 가니의 32%에 비해 거의 100만 표를 더 얻어 45%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6월 결선투표에서는 상황이 갑자기 역전됩니다. 결과가 지연되었고 3주 후 최종 결과가 나왔을 때 가니는 56.4%를 얻어, 43.6%의 득표를 받은 압둘라에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압둘라는 가니가 광범위한 사기극을 통해 선거를 훔쳤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직적인 부정행위에 대한 상당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비난이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무장관 켈리가 아프칸 전통복장을 아슈라니 가니(오른쪽)와 압둘라 압둘라(왼쪽)를 사이에서 중재의 악수를 하고 있다.
미국무장관 켈리가 아프칸 전통복장을 아슈라니 가니(오른쪽)와 압둘라 압둘라(왼쪽)를 사이에서 중재의 악수를 하고 있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바마정부는 존 케리 국무장관을 카불로 파견하고 가니와 압둘라 간의 협상을 중재하게 됩니다.

케리의 중재로 가니대통령이 최소한 처음에는 압둘라와 권력을 공유하는 데 동의해서 국가 통합 정부가 탄생합니다. 압둘라는 새로 만들어진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 이름은 워싱턴의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투명하게 반영합니다 : 아프가니스탄의 CEO.

그 해 12월 EU의 선거 관찰자들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6월 선거에서 사기가 만연해 있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전체 투표수의 4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200만 표 이상이 명백한 부정행위가 있는 투표소에서 나왔습니다.

가니가 실제로 결선에서 승리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고, 그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는 이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에 있는 제국의 후원자들은 이 스캔들을 덮어두게 된 것에 더 없이 행복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미국정부는 사기와 실패에 직면한 가니를 치켜세우다

2014년 대통령선거의 명백한 조작에도 불구하고 서방 언론에서 아슈라프 가니의 이미지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BBC는 그를 "개혁가", "기술관료", "부패할 수 없는"이라는 세 가지 용어로 규정했습니다. 이 단어들은 겁을 집어먹고 1억6,900만 달러를 훔쳐 결국 조국을 버린 대통령을 묘사할 때 기자단에서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뉴요커>지는, 가니에 대한 언론의 묘사를 상징하는 과대한 칭찬의 글에서 그가 "부패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를 "20년 앞서 생각하는 선구적인 기술 관료"라고 칭찬했습니다.

2015년 3월, 가니는 최고의 영광의 순간을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갔고 이 신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미 의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일거에 구하기 위해 자유 시장의 마법을 풀 수 있는 영웅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싱크탱크 관계자들과 그들의 언론인 친구들은 아무리해도 가니에게 질리지 않았습니다. 그해 8월, 미국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정권교체 조직인 ‘민주주의 인터내셔널’의 프로그램 수석이사인 제드 오버는 카불에 있는 이 남자와 워싱턴의 지배 계층 사이의 사랑을 반영한 기사를 <포린 폴리시>에 게재했습니다.

“아슈라프 가니가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국제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개혁가라는 평판을 가진 이 전직 세계은행 관료는 아프가니스탄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국제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회복할 적임자임이 분명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을 훌륭한 통치의 새로운 시대로 이끌고, 많은 아프간 시민들이 너무 자주 거부당했던 권리와 자유의 확장을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후보는 없었습니다.”

문서화된 부정선거 의혹에도 동요하지 않고, 대서양위원회는 2015년에 가니에게 추정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간 존엄에 대한 이타적이고 용감한 헌신"을 기념하여 "저명한 국제 리더십 상"을 수여했습니다.

대서양위원회는 가니가 “3월25일 워싱턴에서 NATO 지도자들, 대사와 장군들로 이루어진 청중 앞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무장관이 수여한 상을 직접 수락했다”고 흥분하며 언급했습니다.

한때 미국 주도의 제재조치로 인해, 50만 명이 넘는 이라크의 어린이들이 죽어간 것을 공개적으로 옹호한 올브라이트는, 가니를 "뛰어난 경제학자"로 찬양하며 "그는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세계에 희망을 주었다"고 단언했습니다.

대서양위원회의 공식 시상식은 이후 4월에 열렸지만 가니가 참석하지 못해 그의 딸 마리암이 대신 수상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리암 가니는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로, 사치스러운 브루클린 고급아파트에 자리 잡고 최신 유행을 따르는 급진적 자유주의자의 모든 특성을 완벽하게 구현합니다. 마리암의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은 미니멀리스트 예술과 유사급진적 정치 표현의 조합을 특징으로 합니다.

좌파로 인정되는 정권교체 활동가들의 환경속에서 엘리트의 지위를 가진 마리암 가니는, 2017년 뉴욕대에서 열린 <예술과 난민: 시각적 요소로 갈등과 대적하기>라는 제목의 공개 토론회에 삽화가이자 더러운 전쟁 지지자인 몰리 크랩애플과 함께 참가했습니다. 크랩야플은 미 국무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신 미국 재단’의 특별 연구원인데 그곳에서 그녀는 억만장자이자 구글의 전 CEO인 에릭 슈미트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와 마리암 가니는 2019년 아티스트 컴필레이션(compilation 여러 작가의 작품을 한데 모아 편집한 것)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2015년 대서양위원회 시상식에서 마리암 가니는, 군국주의적인 NATO의 싱크탱크가 아버지에게 주는 최고의 상을 자랑스럽게 받으면서 세 명의 동료 수상자들과 나란히 서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 미국의 최고위급 장군, 록히드마틴의 CEO, 우익 컨트리가수 토비 키스가 그들입니다. 토비 키스는 아랍인과 이슬람교도를 위협하는 호전적인 음악으로 목청을 높여서 이름을 알린 사람인데, "그것이 미국식 방식"이기 때문에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겠다"고 맹세하는 노래를 합니다.

가니대통령을 대신한 대서양위원회의 초대형 마케팅활동은 시상식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5년 6월, 이 연구소는 자신들의 블로그인 <New Atlanticist범대서양주의자>에 "IMF: 가니는 아프가니스탄이 '사업을 위해 열려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시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고위 관료이자 아프가니스탄 IMF 대사인 폴 로스는 "아프가니스탄이 사업을 위해 열려 있고, 새 정부가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는 신호를 가니가 세계에 보냈다"고 대서양 위원회에 말했습니다.

폴 로스는 IMF가 가니의 지도력 아래 "장기적으로 낙관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가니와 그의 미국 꼭두각시 정권은 사실상 대서양위원회와 일종의 회전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UAE 주재 대사인 자비드 아마드는 동시에  대서양위원회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아마드는, 그의 상관이 "아프간 정치에서 시민 논쟁을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온건한 개혁가라고 묘사하는 기고문을 주요 언론 매체에 게재하기 위해 그곳에서 자신의 한직을 이용했습니다.

[OP-ED]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영향력을 사용하여 다가오는 선거에서 비범죄자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아프가니스탄 정치에서 시민 논쟁을 복원하려는 가니 대통령의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 @ahmadjavid.https://t.co/ra89Kdb5Vt — 대서양 위원회(@AtlanticCouncil) 2018년 9월 21일

<포린 폴리시>는 자신들의 잡지에 2014년 6월 아마드에게 지면을 빌려주고 가니를 위한 거의 숨김없는 선거운동 광고를 게시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사는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오래된 부패와 군벌 정치에 대한 고학력, 친서방, 지성적 대안”이라며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시 아마드는 서방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냉전 로비 단체인 미국의 ‘독일 마샬 펀드’(GMF)에서 아시아 프로그램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포린 폴리시의 편집자들은, 아마드의 과대선전에 가니의 공식 약력을 거의 글자 그대로 베낀 구절들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2018년 NATO 정상회담에서 대서양 위원회는 가니와의 또 하나의 아첨하는 인터뷰를 주최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자신의 추정되는 “개혁 노력”을 과시하면서 “안보 부문이 부패 척결을 위한 노력으로 완전히 변모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우리 보안군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대 변화가 있고, 전반적으로 그것이 정말 변혁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자화자찬의 주장은 그리 깊은 생각의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온화한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는, 무기 산업이 지원하는 웹사이트인 <Defense One>의 편집국장인 케빈 바론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군대의 조직적인 부패와 무능하고도 학대하는 특성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바론은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그 행사에서 가니는, 그렇게 오랫동안 개인 선전활동 처리기관 역할을 해 준 대서양위원회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대서양 위원회의 CEO인 프레드 켐프를 칭송하며 가니는 “당신은 좋은 친구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장학금과 경영진 모두에게 큰 존경을 표합니다.”

가니에 대한 대서양위원회의 사랑은 대통령 임기가 끝나던 치욕스러운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가니는 대서양위원회가 지원하고 독일 정부가 후원하는 2019년 ‘뮌헨안보회의’에서 귀빈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귀족 아프간대통령은 심지어 가장 냉소적인 사이비 포퓰리스트조차도 얼굴을 붉히게 만들 연설을 했습니다. “평화는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시민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대서양 위원회는 2020년 6월 CIA와 연계된 미국평화연구소와 록펠러형제기금이 공동 후원하는 행사에 가니를 마지막으로 초청했습니다. 켐프가 가니에게 "민주주의, 자유, 포용을 위한 주도적 목소리"라는 찬사를 보낸데 이어, 전 CIA국장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4성 장군.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사령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령관으로서 [그와] 함께 일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강조하여 가니를 칭찬했습니다.

2021년 8월에 가니가 공개적으로 강도질을 하고 불명예스럽게 조국을 떠나고 나서야 대서양위원회는 결국 그를 공격했습니다. 거의 20년 동안이나 그를 홍보하고, 육성하고, 치켜세우고 난 후, 이 싱크탱크는 결국은 그가 "숨어있던 악당"임을 인정했습니다.

워싱턴의 다른 어떤 기관보다 더 가니를 잘 알고 있던 싱크탱크의 극적인 전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니를 신자유주의 경제의 부하로 만들어온 많은 미국 엘리트기관들의 체면을 차리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습니다.

가니의 악명높은 마지막 시기에도 워싱턴은 자신이 있었다

아슈라프 가니가 기술 관료주의적 천재라는 환상은 그의 비참한 임기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올해 6월 25일, 그의 정부가 무너지기 바로 몇 주 전, 가니는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을 만났고, 그곳에서 미국 대통령은 미국정부의 확고한 지원에 대해 아프간 대통령을 안심시켰습니다.

바이든은 "우리는 당신과 함께 할 것"이라고 가니에게 재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필요한 수단들을 반드시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한 달 후인 7월 23일 바이든 전 부통령은 가니에게 전화를 걸어 워싱턴이 계속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가니의 허울뿐인 정권을 보호하던 수천 명의 NATO군대가 없어지자, 탈레반은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단 며칠 만에 무너졌습니다.

8월 15일이 되자, 가니는 이미 훔친 돈자루들을 가지고 국외로 달아난 뒤였습니다. 2019년 로이터통신이 표현한 것처럼, 가니는 "부패할 수 없고 박식하다"고 언론이 진저리가 날 정도로 반복했던 이야기에 대한 초현실적인 반증이었습니다.

워싱턴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을 부인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설적인 진보적 반부패 활동가인 랄프 네이더 조차도 가니를 “부패할 수 없는 전 미국 시민”이라고 호의적인 말투로 언급하며 부인했습니다.

“부패할 수 없는 전 미국 시민이었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이해하려 한 적이 없는 미국 관료들에 의해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랄프 네이더(@RalphNader) 2021년 8월 20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간 벌인 전쟁의 도덕적, 정치적 부패를 아쉬라프 가니보다 더 잘 요약한 인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이 단독 사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가니를 만든 것은 공식적인 미국정부와 미국의 싱크탱크 기관들, 미국의 수많은 기레기들이었습니다. 이것은 2020년 6월 대서양 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가니가 스스로 인정한 사실입니다. 그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극도의 감사를 표합니다. "먼저 미국 국민, 미국정부, 미 의회, 특히 피와 재산을 희생한 미국 납세자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저자 : 벤 노튼, 저널리스트, 작가 및 영화 제작자입니다. 그는 언론사 그래이존의 부주필이자 편집자

원문보기:
https://thegrayzone.com/2021/09/02/afghanistan-ashraf-ghani-corrupt/?fbclid=IwAR1XSgul6RORaX0rWt8a2w-qt13ruipXTHdApABykDvUVXV2vvL0YDl-U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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