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부*는 사고지부다. 지난 3월부터 새 지부장이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데 선출하지 못했다. 할 만한 분들이 있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나이가 많아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금전적 손실 때문에, 가족이 반대해서,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 중앙-본부-지부로 이어지는 공기업노조의 기초단위. 금속노조에서는 ‘지회’에 해당함

위에 든 이유는 개인적 이유다. 이해할 수 있다. 지부장도 사람이다. 개인적 고충이 어찌 없을까? 그런데 개인적 이유라고 보기 힘든 다른 이유도 있다.

“하고 싶어도 능력이 부족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런 이기적인 조합원들을 위해 헌신해야 하나?” “나는 할 만큼 했어. 그만큼 했으면 됐지.”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는 분은 주로 신진 간부들이다. 원인은 교육과 훈련의 부재다. 지부에서 집행 간부나 대의원을 지부장으로 키우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하지 않고, 다음 임기를 이끌어 갈 후계간부를 계획적으로 준비하지 않아서다. 이런 문제는 원인이 명백하니 해결방도가 몹시 어렵지는 않다.

조합원 대다수를 이기적인 사람들로 보는 생각은 좀 심각하다. 지부 활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한 간부 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많다. 금전적, 시간적 손실과 가족관계를 희생하며 열정을 바쳐 지부에 헌신했지만 남은 것은 활동에 대한 보람과 긍지가 아니라 일부 이기적인 조합원의 불평불만과 민원해결사 역할을 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모든 힘의 원천인 조합원에 대해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면 답이 없다. 이런 간부는 지부장을 해도 큰일이다.

“나는 노조를 위해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은 “노조가 이 정도면 되지 않았어?”라는 생각으로 발전한다. “나는 지부장도 했고 지부 간부도 여러 번 했다.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데 일조했고, 오랜 투쟁결과 조합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도 이 정도면 괜찮다. 노조가 어느 정도 사회적 역할도 하고 있다. 노조가 이 정도면 되지 얼마나 더 해야 해?”라고 말한다. 이건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다. 노조의 역할을 경제적 이해관계에만 국한하는 전형적인 조합주의다.

우리 노조는 수십 년의 어용노조를 깨부수고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민주노조 건설 전 우리 사업장의 노동조건은 정말 열악했다. 철야와 비번만 있고 휴일이 없는 근무를 퇴직할 때까지 반복,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임금, 한 해에 수십 명씩 죽어 나가는 산재, 현장직원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관리자들의 행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밀어붙이는 민영화…….

민주노조는 이 모든 불의와 억압에 저항해 투쟁했고 지금은 공기업 최저수준이긴 하지만 임금도 안정되고, 근무조건도 나아졌다. 산재 사망자도 많이 줄었고, 관리자가 직원을 함부로 대하지도 못한다. 정권이 민영화를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노조를 민주화하려고 발버둥을 쳤던, 그 절박했던 이유를 이룬 셈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노조에 대해 기대감이 사라지고 노조 활동이 활력을 잃었다. 간부를 구하기가 힘들고, 교육을 포함한 일상활동이 지지부진하다. 당면한 경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은 적극적이나 장기적 과제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는 나서지 않으려 한다. “노조가 이 정도면 괜찮지.”라는 생각이 번졌다. 미래를 위해 전진하려는 생각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생각이 더 커졌다. 노조가 조합주의의 포로가 되고 있다.

노조가 조합주의에 사로잡히는 근본 원인은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의 실종이다. 우리 노조는 강성노조라 세상에 소문이 났고, 우리 지부는 그중에서도 초강성 지부로 이름이 났다. 노조로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들이 많았다. 우리 노조가 파업하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했다. 그러나 한때 날렸다는 그들에게서 이제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는 곧 변혁 의지이며 집권 의지다. 노조는 왜 집권 의지를 다져야 할까? 파업의 파괴력이 노조의 가장 강한 힘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노동자 정권의 힘보다 더 클 수는 없다. 노동자는 집권의 힘으로 노동과 경제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분야를 노동자가 바라는 모양대로 개혁하고, 노동자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에 맞서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낸다. 노동자의 집권 의지는 노동자 정당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제2의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 집권의 길에 떨쳐나서야 한다.

노조가 집권 의지를 갖추고 현장에서 당 운동을 활발히 벌일 때 노조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조합원의 의식이 확장되고 높아진다. 사업장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 전체, 사회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소위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이 성장한다. ‘이 정도면 됐지’가 아니라 ‘아직 갈 길이 멀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현상유지가 아니라 더 분발해서 계속 전진하려는 결의가 생긴다.

노조에 당원이 늘어나면 노조 조직이 강해진다. 당은 당원을 교육하고 훈련한다. 더욱더 높고 넓은 안목과 실천력을 가진 당원들이 노조 간부가 된다. 노조와 진보정당은 잇몸과 치아와 같은 관계다. 잇몸이 내려앉으면 치아도 흔들린다. 그래서 현장의 당원은 노조가 잘못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다. 노조가 어려울 때 앞장서서 헤쳐나간다.

노조 활동이 활발해진다. 당원모임을 통해 노조 활동과 당 활동을 함께 밀고 나간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충족하는 것을 넘어 법과 제도를 노동자에게 맞게 바꾸고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사회정치적 활동과 투쟁이 활성화된다.

물론 당원들이 노조를 강화할 목적만으로 현장에서 당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당원들은 집권을 목표로 노조를 앞장에서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 노조도 체질을 개선하고 더 강한 노조로 거듭난다. 

애당심을 장착한 수많은 당원이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 조합주의니, 경제주의니 하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 노조를 바로 세우고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당 운동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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