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포의 평양-서울 나들이(5) : 2013-2017
2013년 9월, 1992년부터 쌓여온 정 때문인가, 평양의학대학 문상민 병원장은 떠나는 날엔 매해 조선민속 예술품이나 고려인삼 등을 선물해 줘 내 서재엔 보배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이번에는 명주에 춘·하·추·동의 저고리, 치마차림의 조선미인도와 북의 독특한 양면수예품을 안겨줬다. 숲속의 백학을 천연색 실들로 수 놓았는데 앞면과 뒷면이 똑같이 아름답다. 그리고 장 선배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병원 앞뜰에 나와 손에 손을 잡으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문득 LA에서 밤늦도록 술잔을 나눈 이래 가까이 지내는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가 울컥 내 가슴을 쳐올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세계 여러나라들에서 강연과 수술을 하고 헤어졌지만 동포들로부터 이런 감동을 느낀 적이 없다. ‘그래! 난 우리 형제들에게만은 따뜻한 사람이었기 바란다’. 그동안 나와의 여정에 통일관료들과의 소통도 재치있게 도와준 화일 동무에 이어, 김미향 안내원의 손짓에 따라 차에 타니 손 흔드는 저들을 밀어내듯 공항으로 달렸다. 또 온다고 기약했던 그 날이 마지막 날일 줄은 몰랐다.
빗발이 조금씩 내리는 서울 삼청동 [윤동주 언덕]에서 박영우 회장으로부터 이정록 시인은 <윤동주 시인상>, 나는 <윤동주 민족상>을 받았다. 윤 시인이 남의 나라 일본 유학 시절,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 한 것이 광복의 염원이었다면, 나 또한 ‘해외동포의 한시적 특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통일의 아침’을 앞당기려 노력하겠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 자리에 안혜숙 소설가, 임헌영, 도종환, 유성호, 강성도, 이재봉 교수도 함께했다.
원광대에 내려가 강연하고 정세현 총장과 만나 맹경일 부부장의 안부를 전하니, “맹-맹- 그 맹-경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판문점에서 그와 수십 번 만나 싸웠다며 깊은 회상에 잠기기도 했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서로 자국을 위해 치열하게 다퉜던 상대가 20여 년 뒤 2018년 4.27 판문점 남북정상선언 뒤풀이에서 반갑게 재회했기 바랐다.
2014년 4월, 6.15남측위 안영욱 본부장이 3주일 전국순회강연을 요청해 왔다. 신은미·정태일 부부와 도시와 날짜를 달리하며 25회의 강연 행군을 해냈다. 제주도 강연 뒤 서울로 가는 비행기가 남해를 나르고 있을 때 아래 바다에서는 수백명 학생들이 탄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었다.
5월엔 권오혁 대담(남북 연합방 겨레의 핵관리 ☞ 영상보기)을 녹화했다. 그해 가을, 북에 가기로 했는데 에볼라 바이러스로 북 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2015년, 우리겨레의 전통 설날에 LA의 [진보의 벗] 이용식 회장이 내게 <늘 푸른 청년상> 패를 안기고 후배들이 세배를 했다. 아마 내가 더 늙지 못하게 하려 그랬나 보다. 미국에 온 지 45년이 된 그해 의업에서 은퇴하는 일 등으로 북에 가지 못했다.
그런데 10월, 북의 리수용 외무상이 유엔총회에 온다기에 뉴욕 북 대사관 박철 참사관(2009년 북에서 처음 만난 뒤 각별히 지내며 수많은 이메일 교신한)을 통해 “북핵은 남북이 함께 품어 안아야 할 ‘겨레의 핵’”이라고 2013년부터 제언하고 언론에 발표해온 내 원고를 전했다. 박 참사관의 답신에 “…… 외무상 동지는 박사님의 글을 읽고 ‘…… 뜨거운 민족애, 통일의 념원 그대로 느꼈다. 글에 쓰신 것처럼 되는 날이 올 것이다’며 박사님께 인사 전해달라 하셨습니다”라고 답해왔다.
2016년 늦가을부터 남에서 연속 5개월 동안 1,700만 민중들이 참가한 ‘촛불시위’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시작되자 북은 축하라도 해 주는 듯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시험을 했다. 북과 먼저 만나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이 6월, 미국에 와서 트럼프와 회담했고 남북 사이엔 이렇다 할 대화도 없었다. 그리고 9월부터 트럼프가 미국 시민들의 북 방문을 금지한다는 소식에 나의 북 방문 계획을 북에도 알렸다. 8월 하순, 서울에서 임동원, 백낙청, 정세현,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와 만나 남북관계 복원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평양에 갔다.
지난 3년, 평양을 방문하지 못했는데 평양의학대학병원에는 새로 부임한 홍석관 병원장, 최명환 부원장과 석춘영 부장이 맞이했다. 동갑인 문 병원장은 나처럼 은퇴했으나 장창호 연구실장과 함께 수술하던 박송철·김희만 과장들은 더 듬직해 보였다. 병원 안과 밖의 시설이 더 발전된 모습이어서 반가웠다. 홍 병원장은 그동안 오래 기다렸다며, 공화국이 내게 김정일 <2.16과학기술상> 수여를 결정했다며, 외국인에 처음 드리는 상이라며 어서 수상하시러 가야 한다고 했다. 언뜻 5년 전 명예의학박사증을 받던 일이 떠올랐다. 더 할 수 없는 영예임을 알면서도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서울서 만난 분들과 연관되어 통일과정에 누가 되어선 안 된다는 나의 소심함에서 “고마우나 수락하지 못하는 무례를 이해하고, 다음 기회에 받게 해 주면 더욱 고맙겠다”고 했다.
장 선생님과 박·김 과장 선생들과 인공관절 재수술을 도왔다. 병원의 모든 여건이 3년 전보다 훨씬 더 좋아진 모습이었다. 당시 북은 여러 면에서 매우 바쁜 일정에 쫓기는듯한 모습이었다. 이번에 나를 안내한 김관순 동무는 내가 ‘김정일 상’을 사양한 것을 매우 섭섭해했다. 그녀는 북핵·미사일 기술의 모태 같은 대동강 쑥섬의 <과학기술전당>을 보여줬다.
그리고 통전부 홍경식이 찾아왔다. 서울에서 만나고 온 분들과의 대화를 알리며 이젠 북과 남이 어디서든 만나 대화를 시작할 데 대한 여러 얘기를 나눴다. …조용히 듣고 난 그가 드디어 “선생님, 우리 공화국이 미국의 기를 먼저 꺾어 놓으면 남조선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좀 더 기다려 보시라우요”란다. 의미심장한 듯 한데, 무엇을 기다려 보라는 건지 알 수 없었고 그는 공손히 인사하고 떠났다. 섭섭하고 허탈했다.
곧 남과 만날 생각이 없는 북에 실망했다. 한편, 밖에서 조국을 보는 해외동포의 처지에서 보니, 미국을 따르기만 한 박근혜 정부의 한심함으로 일어선 민중들의 촛불시위로 문재인 정부가 섰다. 17년 전 김대중 정부가 이뤄낸 6.15남북공동선언 같은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미국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북이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틀 뒤 8월29일, 즉 1910년 대한이 일본에 병합된 국치일에 북은 일본열도를 넘어 태평양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평양서 서울로 가니 9월3일, 북은 ICBM 장착 수소탄기폭장치시험 성공을 발표했다. 홍 국장의 ‘…기다려 보시라우요’가 이런 것을 말하는 건가? 10여 일 전 만났던 네 분과 다시 만나 북과 나눈 얘기를 알렸다. 남이 북과 미국에 대처해야 할 바에 대한 논의를 끝으로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11월29일, 북은 워싱턴·뉴욕에 도달할 13,000km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했다. 그때야 홍 국장이 말한 “…기다려 보시라우요”의 뜻을 확인한 듯 했다. 그 뒤 북·남·미 관련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7년은 그렇게 끝났다. 남과 북은 이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 그리고 2018년, 북-미-남 사이의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