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포의 평양-서울 나들이(2) : 2009-2010

통일과 의업 두 길을 걸으며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창비, 2010)을 저술한 세계적인 인공고관절수술 전문의, 재미동포 오인동 박사.
1992년 인공관절수술 강연을 위해 평양에 방문한 이래 모국의 분단 현실에 눈뜨게 된 이후 수차례 남과 북을 오갔다. 그가 남과 북, 그리고 미국에서 만난 인연들의 이야기를 담아 ‘해외동포의 평양-서울 나들이’ 연재를 보내왔다.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어 있는 지금, 남북 간 교류·협력이 왕성했던 6.15시대를 떠올려보고 다시 활발해질 남북관계에 대한 의지를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6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뉴욕 조선 유엔대사관 박성일 참사관의 주선에 따라 2009년 5월, 인공관절기, 수술기구, 수술법 책들을 두 대형가방에 가득 넣고 평양공항에 내리니 자그만 몸매의 곱고 이지적인 리화일 안내원이 체재기간 동안 함께 한다고 했다. 그녀는 김일성대학 어문학과 출신으로 영어도 능통했다.

고려호텔에 가방을 풀고 저녁에 그녀를 따라 호텔식당 특실에 가니 민족과학기술협회의 홍종휘 국장과 김책공대 출신 리규섭 과장이 베푸는 환영만찬이었다. 남자끼리 쉽게 통하는 게 군대 얘기라 1967~8년 철원 휴전선 군의관 복무 얘기를 하니 홍 국장도 그 뒤 그 지역에서 인민군으로 복무했던 얘기로 번졌다. 그가 1984년 9월, 남에서 발생한 홍수피해 수재민을 돕기 위해 북이 남에 식량지원을 할 당시 쌀 등의 무게나 부피를 잴 때 전통적인 ‘가마니’, ‘말’ 등을 쓰다 보니 북남 사이에 소통이 잘 되지 않아 힘들었었다며 뒤에 홍 국장이 국제규격으로 정리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 2009년 5월, 평양의학대학병원에 풀어 놓은 필자 고안 인공관절기와 수술도구와 교재들. 왼편부터 김희만 연구실장, 문상민 평양의학대학 병원장, 박송철 외상외과장, 장창호 정형외과 선배님, 오인동, 건너편 우성훈 정형외과장 등.
▲ 2009년 5월, 평양의학대학병원에 풀어 놓은 필자 고안 인공관절기와 수술도구와 교재들. 왼편부터 김희만 연구실장, 문상민 평양의학대학 병원장, 박송철 외상외과장, 장창호 정형외과 선배님, 오인동, 건너편 우성훈 정형외과장 등.

1992년, 고려호텔 강당에서 북 동포의사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강연을 하려는 뜻에서 북의 인공관절수술 현실에 대해 물었다. 솔직한 답을 받지 못해 건방지게 화를 냈던 일이 부끄럽게 되살아왔다. 공개된 자리에서 자신들의 현실을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밤, 내 강연을 들은 장창호 연구실장이 호텔로 와서 그들의 현실과 인공관절기 자체제작에 대한 여러 얘기를 나눴다. 그랬던 장 실장은 연상이신데 건장하셨고, 당시 정형외과 문상민 과장은 평양의학대학 병원장이 되어 반갑게 재회했다. 92년 방문 때 내가 환등기를 가지고 가지 않아 수술기법을 잘 보여 줄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비디오로 최신 수술법을 보여준 뒤 인공관절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 2009년 5월, 평양의학대학병원 인공관절 치환수술 영상 강연. 1992년엔 환등기가 없어 애를 먹었는데 이번엔 모두들 만족했다.
▲ 2009년 5월, 평양의학대학병원 인공관절 치환수술 영상 강연. 1992년엔 환등기가 없어 애를 먹었는데 이번엔 모두들 만족했다.
▲ 2009년 5월, 평양의학대학병원 정형외과 의사들과 인공엉덩이관절 치환수술. 수술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관찰자 의사들과 수술실 외 영상 중계를 했다.
▲ 2009년 5월, 평양의학대학병원 정형외과 의사들과 인공엉덩이관절 치환수술. 수술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관찰자 의사들과 수술실 외 영상 중계를 했다.

수술을 마친 오후,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문영호 소장이 역사연구소 위광남 실장과 리영호 연구사와 함께 찾아왔다. 이들이 누구인가 했더니 지난해 내 <Corea, Korea> 책을 받았다기에 말문이 곧 터졌다. 우리나라 로마자 국호연구를 남가주(USC)대학 Korea 도서관장, Joy Kim의 도움으로 시작했고 그때 로마자 국호 ‘Korea’를 ‘Corea’로 하자는 논의가 활발했다.

▲ 2009년 5월. 북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장 문영호 원사(가운데), 리영구, 위광남 박사. 우리나라 로마자 국호 ‘Corea – Korea’ 연원과 앞으로 우리나라 통일국호에 대한 대화와 토론을 계속하며 남북 학술토론회도 기대하고 있다.
▲ 2009년 5월. 북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장 문영호 원사(가운데), 리영구, 위광남 박사. 우리나라 로마자 국호 ‘Corea – Korea’ 연원과 앞으로 우리나라 통일국호에 대한 대화와 토론을 계속하며 남북 학술토론회도 기대하고 있다.

2003년 봄, 이창주 교수가 마련한 독일 베를린 ‘한민족회의’에서 나는 ‘Corea’ 어원의 역사를 발표했다. 이어 8월1일, LA에서는 김상일 교수가 마련한 <Corea되찾자!> 토론회에서 한신대 서굉일 교수와 강연했다. 8월 김일성대학 ‘영문국호 북남학술회의’ 남측 대표가 나도 만나 뵌 강만길 교수라기에 내 ‘Corea’원고를 보내 드렸다. 평양회의에서 내 원고도 토론되었다고 알려주셨다.

▲ 2003년 8월 1일, 김상일 교수가 마련한 LA에서의 학술회. 우리나라 이름의 로마자 국호 ‘Corea를 되찾자’. 왼편 서굉일 교수, 오인동, 김상일 교수.
▲ 2003년 8월 1일, 김상일 교수가 마련한 LA에서의 학술회. 우리나라 이름의 로마자 국호 ‘Corea를 되찾자’. 왼편 서굉일 교수, 오인동, 김상일 교수.

그해 내 원고는 역사학회지 <역사비평>에 실렸다. 그 뒤 역사논문을 쓰는 게 힘들어 ‘베를린회의’에서 만난 재독 김해순 사회학 교수의 도움으로 출판했고, 남의 문화부 역사 분야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문영호 원사는 2003년 내 원고를 보고 역사학자인 줄 알았는데, 지난해 뉴욕 유엔 대사관의 박 참사로부터 받은 내 책을 보고 의사인 것을 알고 놀랐단다. 이번엔 수술하려고 왔다 해서 또 놀랐고, 반가워 찾아왔다고 했다. 문 소장은 <겨레말 큰사전북남출판위원회> 북측 대표였다.

▲ 2009년 5월. 북 사회과학원, 리영구 박사, 언어학연구소장 문영호 원사, 오인동, 위광남 연구사
▲ 2009년 5월. 북 사회과학원, 리영구 박사, 언어학연구소장 문영호 원사, 오인동, 위광남 연구사

한편, 2007년 말, LA에서 고구려학자 서길수 교수의 강연회를 열고 ‘고구려-고려’의 우리말 발음이 ‘고구리-고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03년에 시작한 나의 로마자 국호연구에서 1514년, Empoli의 ‘Gori’표기가 ‘고리’라는 것과 일치되어 나는 2015년 8.15에 ‘통일국호 [고리- Gori]’를 제안하며 남 언론들에 발표하고 역사학회지 <내일을 여는 역사>에도 게재되었다.

수술 뒤 오후엔 리화일 동무 따라 평양의 여러 사적지와 기념비적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평양 떠나기 전날 저녁엔 양강호텔 근처 ‘소나무 동산’에 오르니 홍종휘 국장과 리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만 들은 조개구이를 맛보는 날이다. 물에 적신 포대를 철판에 깔고 대합조개를 빼곡히 엎어놓고 깡통에 든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니 불꽃이 피어 올랐다. 불이 꺼질라치면 또 뿌리며 구우니 잘 익은 조갯살에선 휘발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 2009년 5월 평양 소나무 동산. 홍종휘 국장, 리규섭 과장, 리화일 안내원과의 송별의 밤에서. 철판 위의 휘발유 조개구이+ 도라지 소주. 남녘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북녘 특유의 야외 조개구이 맛.
▲ 2009년 5월 평양 소나무 동산. 홍종휘 국장, 리규섭 과장, 리화일 안내원과의 송별의 밤에서. 철판 위의 휘발유 조개구이+ 도라지 소주. 남녘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북녘 특유의 야외 조개구이 맛.

그 맛이 입에 착 붙으니 ‘도라지 소주’를 마시며 관절기 자체제작 얘기를 나눴다. 김책공대와 제휴해 <생체공학연구실>을 의대병원에 개설하도록 권했다. 마지막 수술을 마친 날, 함께 수술해온 박송철, 김희만 과장, 장 선생님과 정성을 다한 수술방 간호원들과도 정이 깊이 들어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다.

▲ 2009년. 민족과학기술협회 홍종휘 국장(가운데), 김책공대 출신 리규섭 과장(왼편), 그리고 오인동. 인공관절기 고안과 실험엔 기계공학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평양의학대학병원 정형외과에 김책공대와 함께 생체공학연구소 창설을 추천했다.
▲ 2009년. 민족과학기술협회 홍종휘 국장(가운데), 김책공대 출신 리규섭 과장(왼편), 그리고 오인동. 인공관절기 고안과 실험엔 기계공학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평양의학대학병원 정형외과에 김책공대와 함께 생체공학연구소 창설을 추천했다.
▲ 2009년 5월 장창호 선배님(가운데), 정성을 다해 도와준 간호원, 보조원들과 송별의 정. 뒤편엔 김희만 연구실장, 박송철 과장.
▲ 2009년 5월 장창호 선배님(가운데), 정성을 다해 도와준 간호원, 보조원들과 송별의 정. 뒤편엔 김희만 연구실장, 박송철 과장.

그 저녁, 박철 참사를 따라 해외동포위원회로 가면서 그가 평양 외국어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 했다기에 촘스키 교수를 말했다. 그의 학설이며 논리에 대해 하는 얘기가 하도 깊어서 내가 아주 질려버리고 말았다. 김관기 국장을 만나니, 그는 내가 1998년 평양서 만난 박동근 교수와 1996년 재영동포 장민웅 회장이 마련한 런던 통일토론회에서 강연도 함께 한 분이었다.

남북 교류가 전혀 없던 80~90년대에도 유럽과 미국의 동포들은 북 학자들과 만나 통일토론을 해왔다. 그 밤 김-박 두 분과 가장 깊은 통일 관련 대화를 나눴다. 내가 연상이지만 두 분은 겸손했고 진심 어린 얘기를 나누면서 박학다식의 박철은 아태평화위원회 간부인 것도 알게 됐다.

▲ 2009년 5월, 북 통일전선부 해외동포위원회 김관기 국장(왼쪽), 박철 아태평화위원(오른쪽). 100년 지기처럼 곧 서로 좋아지고마는 북녘 사람들 손 맞잡고.
▲ 2009년 5월, 북 통일전선부 해외동포위원회 김관기 국장(왼쪽), 박철 아태평화위원(오른쪽). 100년 지기처럼 곧 서로 좋아지고마는 북녘 사람들 손 맞잡고.

다음날 리화일 동무와 공항에 가니, 마치 지난 밤에 우린 만리장성이라도 쌓았나? 김관기 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뿐 아니라 6.15미국위의 내부갈등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부탁도 들었다. 지난 한 주일 매일 나와 함께 해온 화일 동무는 내가 추구하는 통일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나의 글들을 관련 부서에 전해 주는 등 크게 도왔다. 헤어지게 되자 미국식의 다정한 포옹으로 이별의 정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저 악수하는 손에 힘을 주고 손을 흔들며 비행기에 올랐다.

11월, 내 칠순 생일에 김관기 국장이 축하글을 보내왔다. 2010년 4월, 유엔 대사관 박성일 참사가 김관기 국장이 중국 심양에 나와 있는데 나를 만나고 싶단다. 수술한 환자에 문제라도 생겼나 해서 곧 국제전화로 물었더니 그냥 보고 싶어서란다. 다행이었지만 ‘심양이 옆집도 아닌데?’ 하다가 언제까지 있겠냐 물었더니 ‘나 올 때까지’라고 능청을 떨었다. 생각해 보니 무릎관절기를 확보해 놓은지라 심양에 가져다주면 6월, 북에 갈 때 나머지를 더 많이 가져갈 수 있겠기에 곧 심양으로 날아갔다. 김 국장은 하루종일 바빴고 저녁에야 북녘동포 식당에서 최순철 참사, 황철호 여행사 대표랑 함께하고 옆 노래방에서 북 노래들을 신나게 불렀다. 나더러 노래하라기에 배호의 ‘안개속에…’는 없다고 해서, 최 참사가 ‘만남’을 아느냐 묻기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하니 모두가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불렀다. 그리고 관절기가 가득 찬 두 가방을 넘겨줬다.

그리고 6월, 관절기, 수술보조기와 고정제들을 가득 넣고 북에 갔다. 비행기가 허용하는 대형가방들을 끌고 다니는 걸 보고 친구들은 북으로 이민 가는 거냐며 놀렸다.

▲ 2010년 6월 평양의학대학 병원. 내가 고안한 인공엉덩이관절기와 수술기구들. 딱딱한 큰 뼈 관절에 고정시키는 쇠붙이와 특수플라스틱 인공관절기들. 사람들 몸 안에 있는 부드러운 조직은 하나도 안 보이고 몽땅 쇠붙이와 플라스틱. 검은 양복을 입은 문상민 평양의학대학 병원장.
▲ 2010년 6월 평양의학대학 병원. 내가 고안한 인공엉덩이관절기와 수술기구들. 딱딱한 큰 뼈 관절에 고정시키는 쇠붙이와 특수플라스틱 인공관절기들. 사람들 몸 안에 있는 부드러운 조직은 하나도 안 보이고 몽땅 쇠붙이와 플라스틱. 검은 양복을 입은 문상민 평양의학대학 병원장.

인공관절기 한 벌이 $5~6,000다. 인공무릎관절 뼈를 들고 과장 선생들과 수술 예행연습을 했다. 다음날부터 무릎관절 치환수술을 거뜬히 해냈다. 이를 본 문 병원장이 정광훈 외사지도원에게 수술실 옆방에 축하 자리를 마련케 해주었다고 했다. 모두들 자랑스러워 과장 선생들과 리규섭 과장도 함께 축배를 들었다. 내가 고안한 인공엉덩이 관절기와 부속기구들을 제작해 상품화한 회사들이 인공무릎 관절기를 기증해준 덕분에 많은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 2010년 6월: 인공무릎관절기 수술시연. 인공 뼈와 관절로 수술 예행연습하는 정형외과 의사들. 왼편부터 우성훈 과장, 김희만 연구실장, 장창호 연구실 고문.
▲ 2010년 6월: 인공무릎관절기 수술시연. 인공 뼈와 관절로 수술 예행연습하는 정형외과 의사들. 왼편부터 우성훈 과장, 김희만 연구실장, 장창호 연구실 고문.
▲ 2010년, 성공적 인공 엉덩이+무릎관절 치환 수술을 마치고 휴게실에서 축배를 들며. 왼편부터 평양의대병원 정광훈 외사부장, 민족과학기술협회 리규섭 과장과 의사 선생들 우성훈, 김희만, 박송철, 오인동, 장창호.
▲ 2010년, 성공적 인공 엉덩이+무릎관절 치환 수술을 마치고 휴게실에서 축배를 들며. 왼편부터 평양의대병원 정광훈 외사부장, 민족과학기술협회 리규섭 과장과 의사 선생들 우성훈, 김희만, 박송철, 오인동, 장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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