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치연구(9)

조선노동당 창당 75돐 경축 열병식이 열렸던 김일성광장. 그 광장을 가득 메운 열병식 참가자들과 관중들의 “만세”, “김정은”, “결사옹위”의 함성.

그러나 세간의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고맙습니다!》”라는 김정은 위원장의 인사였다.  《고맙습니다!》라는 단 한마디에 지도자도 울고, 인민도 울고, 군인도 울었다. 일심단결을 핵으로 하는 북한정치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조선은 코로나 바이러스, 혹심한 자연피해,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라는 2020년의 삼중고에 시달렸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는 엄청난 도전과 난관의 한 해였다. 그같은 어려운 시기를 수령과 당과 인민의 혼연일체 속에서 극복을 하고 그들 최고의 명절이라는 당창건 기념일을 맞이했다. 김위원장은 인민이 고마워서 울고, 인민은 김위원장과 당이 고마워서 울었다. 지구상의 가장 아름다운 집단주의의 화폭이 수놓아지는 순간이었다.

조선은 ‘인민’ 공화국이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도, 당과 국가를 창건했던 해방 직후 시기에도, 한국전쟁 시기에도, 전후복구 시기에도, 사회주의 승리를 위해 매진지하는 시기에도, 혹독한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조선과 조선로동당의 좌표는 언제나 인민을 향했다. 이제 그 전통을 김정은 위원장이 이어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인민’ 공화국의 지도자였고, 인민 단결의 중심에 김정은 위원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번 당대회 열병식에서 세계는 확인하게 된다. 

토지 개혁을 당의 첫 의정으로, 사회주의 개혁이 아닌 민주개혁을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를 창설하고 당의 창건을 선포한 후 내린 첫 번째 당의 결정은 토지개혁이었다. 10월 16일 제1차 북조선공산당 확대집행위원회의 첫 번째 안건이 바로 토지개혁이었던 것이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이었던 당시의 형편에서 농민문제는 곧 전 인민적 문제였고, 토지문제는 인민들의 생활에서 가장 간절하고 절실한 식량문제였다. 인민의 가장 절박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김일성 주석과 조선노동당의 인민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부터 인민생활 문제를 제1의 국시로 내세우는 조선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 1946년 3월 실시된 북의 토지개혁
▲ 1946년 3월 실시된 북의 토지개혁

김일성 주석은 공산주의자였고,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수행한 해방 직후의 개혁은 민주개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권력을 장악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사회주의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인민에 대한 고려였다. 수십 년간에 걸친 일제의 반공 선전과 행세식 사회주의자들의 그릇된 처사의 후과로 인해 당시 조선 인민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경우에 따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의식도 존재했다. 김일성 주석과 당은 이같은 인민들의 심리와 준비정도를 고려하여 사회주의 개혁이 아닌 민주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인민들은 인민 정권이야말로 자기들의 이익을 진정으로 옹호하고 대표하는 정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국가 건설의 주인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었다.

깊은 산골 마을을 찾아 인민위원장을 대신하여 사과하고 

고난의 행군 시기의 어느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함경북도의 한 군(郡)을 찾아 군인민위원장과 담화를 하다가 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을의 살림집 세대수와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군인민위원장은 정확한 답을 못하였다. 김정일 위원장은 세대수와 식구 수를 모른다는 것은 그 마을에 소금, 간장, 된장이 한 해에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는 소리이고, 산성이 높아 수질이 좋지 못한 그곳 주민들의 음료수 문제는 대책을 강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소리라고 하며, 대노했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님(김정숙 여사)에게서 들은 어미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 서쪽 나라에서 살던 어미새 한 마리가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와 
어디에 알을 낳으면 새끼들을 잘 키울까 살펴보다가 
어느 한 산기슭 나무 아래 둥지를 틀었다. 
그날부터 어미새는 자기 새끼를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 없이 먹이를 찾아 하늘을 날고 벼랑길을 훑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세찬 바람과 태풍으로 둥지를 뜨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날 어미새는 하루만 쉴까 생각하다가

자기의 귀여운 새끼들을 생각하여 
끝내 먹이를 찾아 먼 길을 떠났다. 
그날의 폭풍우는 왜 그리도 심했는지 비바람에 깃이 뜯기우고
배는 허기져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어미새는 있는 힘을 다해 끝내 모이를 구해

새끼들이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귀여운 새끼새는 어미새가 물어온 모이를 좋아라 먹었지만 
그 시각에 자기 엄마새가 숨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입에 문 먹이를 조금만 넘기면 살수도 있었지만 
어미새는 사랑하는 새끼새를 위해 자기를 깡그리 다 바치고 
새끼들의 즐거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기쁨 속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미새처럼 살 때만이 복무자의 참된 자격을 갖출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인민들을 배반한 동무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그 곳 인민들을 찾아가 대신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겠다고 하며, 산간 마을의 몇 채 안되는 인민들을 찾아 폭우가 쏟아지는 밤길을 떠난다.

‘고아원’을 찾는 지도자와 처녀 어머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 지도에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애육원, 육아원 방문이 많다는 점이다. 애육원, 육아원은 부모 없는 고아들의 교육 시설이다. 조선에서는 고아들의 연령대에 따라 시설을 달리 부르는데, 4세 미만의 시설은 육아원, 4~5세의 시설은 애육원, 6~9세의 시설은 초등학원, 10~15세의 시설은 중등학원이라고 부른다. 

그 첫 시작은 2014년 2월 4일 평양시의 육아원과 애육원 방문이었다. 이때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평양육아원과 애육원을 “대동강 기슭에 새로 일떠세워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조선인민군 제2567군부대를 투입해서 공사를 시작한다. 6월과 8월 두 차례 공사 현장을 현지지도한 자리에서 “부모없는 아이들이 가장 훌륭한 생활조건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크도록 하게 하자는 것이 당중앙의 의도”임을 밝힌다.

10월 26일 평양육아원과 애육원이 완공되었고 김정은 위원장은 완공식에 참석하였다. 아마 이 때 아이들에게 설날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한 모양이다. 2014년 1월 1일 다시 평양육아원과 애육원을 찾아 “신년사를 마치는 길로 찾아왔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부모잃은 아이들을 찾는 김위원장의 발걸음은 2015년 2월 11일 원산시의 육아원, 애육원, 초등학원, 중등학원 건설장으로 옮겨진다. 이미 2014년에 원산의 부모 잃은 아이들의 교육시설 건설을 직접 발기하고, 해군 제863군부대 전투원들을 투입했던 것이다. 지난해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4월 22일 완공을 앞둔 원산육아원과 애육원을 다시 찾았으며, 6월 2일 준공식을 앞두고도 다시 찾아간다. 비록 김위원장이 찾아가지는 않았으나 6월 28일 원산초등학교와 원산중등학교의 준공식도 거행되었다.

김위원장의 발걸음은 다시 평양으로 향한다. 7월 3일 새로 건설된 평양중등학원을 현지지도하고, 2017년 2월 2일에는 새로 건설된 평양초등학원을 현지지도했다고 노동신문은 전한다. ‘고아원 교육시설’을 현대적으로 건설하고자 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적극적인 행보로 조선에서는 새로운 ‘고아원’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건설되었다.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6년 7월 3일 새로 건설된 평양중등학원을 현지지도했다. [사진 : 노동신문캡처문]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6년 7월 3일 새로 건설된 평양중등학원을 현지지도했다. [사진 : 노동신문캡처문]
▲ 평양중등학원이 준공식 [사진 : 노동신문캡처문]
▲ 평양중등학원이 준공식 [사진 : 노동신문캡처문]
▲ 평양중등학원 내외부 모습 [사진 : 노동신문캡처]
▲ 평양중등학원 내외부 모습 [사진 : 노동신문캡처]

2014년 2월 평양 애육원과 육아원 현지지도와 건설을 시작으로 하여 김 위원장이 직접 다녀간 원산시 외에도 청진시, 신의주시, 강계시, 사리원시, 남포시 등에 유사한 시설이 들어섰다. 전국적으로 20개가 넘는 육아원·애육원, 초등학원·중등학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결국 김위원장의 육아원, 애육원 방문은 “원아들이 세상에 부럼없이 마음껏 공부하고 나라의 역군으로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게”하려는 인민 시책의 전략적 행보였다고 할 것이다.

부모없는 아이들에게도 사랑과 믿음을 주기 위한 ‘인민’ 공화국 지도자의 행보는 20개가 넘는 육아원·애육원, 초등학원·중등학원 건설로만 파급효과를 낸 것은 아니었다. 주체철로 유명한 강선제강소가 있는 강선땅에는 2015년 당시 스무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7명의 자식을 둔 ‘처녀 어머니’가 있다. 

남포시 천리마구역 사회급양관리소에서 근무하는 장정화라는 이 아가씨는 김정은 위원장이 육아원과 애육원의 원아들 때문에 늘 마음쓰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버지, 어머니 모두 강선제강소에서 일을 하다가 순직하여 고아가 된 나이 어린 세 자매를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엄마구실은 못해도 그 애들의 큰언니구실이야 할 수 있지 않는가” 하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세 자매를 집으로 데려온 다음 달에는 또 다른 네 명의 부모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문턱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 애들 속에는 2살짜리 어린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정화네 아이들’에 대한 사연은 강선땅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18살 네가 아이들을 품어안고 얼마나 고생이 많겠니. 우리 함께 이 애들을 키우자”며 정화네 집안일을 덜어주고, 아이들의 겨울옷을 선참으로 마련해주고, 남새와 기초식품들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수령의 걱정, 당의 걱정을 자기 아픔처럼 생각하는 고결한 충정”이 강선땅 전체에 메아리치게 되는 ‘사회주의대가정’의 풍경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것이 당중앙으로까지 알려지게 되어, 2015년 제2차 전국청년미풍선구자대회의 높은 연단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처녀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고 노동신문에까지 소개되었다.

▶ '처녀 어머니' 소식을 전하는 2015년 5월 30일자 노동신문
▶ '처녀 어머니' 소식을 전하는 2015년 5월 30일자 노동신문

최고지도자가 고아원을 한 해에만 수 차례 방문하고, 아직 전국에 살림집마저 충분히 건설하지 못한 상황에도 부모 없는 원아들의 교육시설이 먼저 차려지는 ‘인민’의 공화국. 

혁명과 건설을 위해 바쁜 와중에도 원아들이 잘 자라는가 궁금하여 현지지도를 가는 길에 애육원과 보육원에 들러 아이들의 글읽는 소리, 원아들의 꿈이 커가는 소리가 너무 대견하여 오랫동안 애육원 마당가를 걸었다는 ‘인민’ 공화국의 지도자. 

“우리가 얼마나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저 웃음소리, 저 발걸음 소리에 우리의 미래가 있으며, 저들 속에서 과학자도 나오고, 체육인도 나오고, 영웅도 나와야 한다”면서 환하게 웃었다는 조선 지도자의 인민 사랑과 후대 사랑.

김정은 위원장은 주체사상의 본질을 인민대중제일주의라고 규정했다. 조선노동당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갖고 있다. 결국 조선노동당의 최고강령은 인민대중제일주의인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모든 행보는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조선 사회에 구현하려는 전략적 행보이다. 2014년 2월 4일 평양 육아원과 애육원 방문 이후 전국 곳곳에 육아원과 애육원이 새로 건설되었던 것처럼 김정은 위원장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 김위원장이 찾아가는 장소 하나마다 인민대중제일주의가 구현된 조선 공화국을 완성하려는 구상이 담겨져 있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