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홍콩사태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김정호 박사가 홍콩사태를 중간결산하는 형식의 글입니다. 앞으로 2회에 나누어 올립니다[편집자]

[목차]

1. 홍콩 사태는 민주화운동인가?
2. 홍콩 언론, 학생운동, 외부 언론
3. 홍콩 사태 본질: 미국의 대중국 억제정책
4. 내적조건- 빈부격차
5. 중국의 역할
6. 한국변혁운동과의 관계

 

▲ 홍콩시위 [사진 : 환구시보 캡처]

4. 내적조건-- ‘빈부격차’에 대해

철학에서 우리는 “모든 외인은 내인을 통해 관철 된다”고 배웠다. 따라서 내인은 반드시 중시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말이 내인이 항상 결정적 요소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사물의 운동에 작동하는 여러 가지 힘의 상호 관계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홍콩 사태의 내적 요인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 변혁진영은 대체로 홍콩 사태의 내적 요인을 중시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하의 인용문도 그 중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홍콩민주화 시위의 주요 원인은 서구화된 홍콩인과 중국의 갈등이다. 서구화된 홍콩인 입장에선 중국체제로부터 되도록 멀어지고 싶은 것이다.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중국의 분열을 자초하려는 홍콩인도 문제이지만 인기 없는 중국 사회주의 모델도 문제이다.” (김장민, “제국주의가 만든 정신분열의 홍콩 르노와르를 아십니까?”)

여기서 “서구화된 홍콩인과 중국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장민씨는 그것이 “인기 없는 중국 사회주의 모델” 탓이라고 말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이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이고 또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민중들은 사회주의 사회를 동경해야 하고, 홍콩인들은 중국 사회를 동경해야 한다. 하지만 홍콩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들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혹독한 정치를 기억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장민, 위의 글) 

이 같은 주장은 홍콩인들의 반중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 지금 수준에서 비교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체제가 우월한가 라는 매우 추상적이고 전략적 차원의 문제로 논점을 돌리고 있다고 보여 진다. 직접적으로 그것들을 결정하는 앞서 살펴보았던 요인들, 그리고 본 절에서 곧이어 살펴보게 될 다른 여러 요인들을 무시하고 있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지금 홍콩인들에게는 홍콩의 대부분 매체에 의해 중국 본토에 대한 대량의 왜곡된 사실들이 전달되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말대로 “스탈린과 모택동의 혹독한 정치”만을 기억하게 하는 교육과 홍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내용들은 결코 두 체제의 우월성과는 상관이 없다. 특히 현재적 시점에서 변화된 상황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렇게 추상적인 내적 요인보다도 좀 더 구체적인 요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홍콩 내 ‘빈부격차’ 문제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실제 광범위한 사회불안 요소로 작동하며, 작금의 홍콩 사태에 있어 큰 사회적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필자가 SNS에서 <노동자연대> 소속 한 동지와 논쟁 할 때, 그 동지는 홍콩과 중국의 주된 구성이 한족들이기 때문에 쟁점이 ‘독립문제’가 아니라 그 본질은 ‘계급 양극화’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홍콩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의 문제이며, 2000년대 이후 중국 본토의 노동자 투쟁이 만만찮게 전투적으로 성장한 배경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같은 견해는 <노동자연대> 조직 전반의 견해라고 보여 지며, 홍콩 사태를 바라보는 적지 않은 다른 좌파진영 동지들의 공감을 사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처럼 홍콩 내부의 빈부격차 혹은 ‘계급 양극화’ 문제와 홍콩시위가 ‘반중 성격’을 띤 것과는 직접 상관이 없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동지가 말하였던 중국 본토의 노동자투쟁이 2000년대 들어 전투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판단도 매우 자의적인 것으로 보여진다.(이와 관련해선, “자쓰 공장 분규와 중국 노동문제 관련 보도”, http://www.redian.org/archive/129963 기사 참고) 더더구나 그것이 중국 내 계급 양극화가 더욱 진행된 데 기인한다는 판단도 현실의 객관적 지표와는 상당부분 동떨어져 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중국의 빈부격차는 최근 들어 확대되기보다는 반대로 축소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말이 되면 중국은 전국 95% 가량의 빈곤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바로 내년인 2020년이 되면 중국의 절대빈곤 문제는 역사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엔은 중국을 “빈곤퇴치 기여도 세계 1위국”으로 선정한 바 있다. (http://kr.people.com.cn/n3/2019/1021/c203280-9624850.html 기사 참조) 

논점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홍콩 사태에 집중키 위해 작금의 사태와 홍콩의 빈부격차  관계만을 다루기로 하자.   
홍콩 사회에 내부적으로 빈부격차가 상당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홍콩 반환 후 이가성(李嘉诚)을 비롯한 홍콩의 '4대 패밀리'는 각종 정책적 우위와 영국이 의도적으로 남긴 허점을 이용해 땅을 사재기하고 모든 업종을 독점하며 다른 사람들의 상승 통로를 차단했다. 홍콩 반환 후 경제 전반과 GDP는 1997년 말 발생한 아세아 금융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국 궐기의 빠른 발전에 편승해서 20여 년 만에 이가성 등의 재산은 수십 배가 되었다. 그러나 밑바닥 인민들의 부의 성장은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오히려 의식주에 있어선 독과점 때문에 거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비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홍콩의 빈부격차 문제는 중국정부의 책임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며, 시위대가 공격화살을 중국정부로 향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홍콩은 ‘일국양제’ 하에 자체 화폐발행권을 포함하여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고도한 ‘자치’를 보장받았다. 만약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중국정부가 홍콩의 경제정책이나 분배구조 내지는 소유구조에 직접 개입하려 했다면, 아마도 이번 ‘송환법 개정’ 사태보다 훨씬 더 큰 소동을 일찌감치 겪어야 했을 것이다. 국가안전법, 국민교육법 등 몇 차례 중국정부가 시도한 그보다 약한 개혁들도 현지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홍콩경제는 이가성과 같은 금융·부동산 대자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데, 이들은 ‘일국양제’ 정책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중적인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그 점은 이번 송환법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들은 한편으론 반대파와 시위대에 기대어 홍콩의 자본주의체제가 영원히 보존되길 원한다(참고로 2047년이 되면 ‘일국양제’ 협약기간이 끝난다). 그래서 은근히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자치 혹은 한발 더 나아가서 사실상의 ‘독립’을 바란다. 실제 홍콩 사태가 막판에 이르러 과격한 양상으로 치달을 때, 지하철이 끊기고 스쿨버스가 습격당해 경제가 마비되는 상황에서 이가성 재벌 산하의 백가(百佳) 슈퍼마켓은 학교를 점령한 과격파 학생들을 위해 버스를 동원해 자신의 창고에서 음식과 생수를 대량으로 날랐다고 전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들은 홍콩의 국제금융도시로서의 명성이 이번과 같은 장기적 소요사태로 인해 훼손되는 것을 또한 두려워한다. 이 때문에 지난 10월 경 홍콩 사태가 장기화하는 조짐을 보이자 내내 눈치를 보고 있던 그들은 뒤늦게 양측의 자제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만약 홍콩 빈부격차나 사회문제에 대해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노동자연대> 동지들은 아마도 이들 홍콩 독점자본가계급에게 빈부격차의 주요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연대>가 홍콩의 빈부격차와 이번 홍콩 사태의 反중적 성격을 연계시키는 논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즉, 심각한 홍콩 내 계급모순의 해결을 위해서는 민주화조치—행정장관에 대한 ‘직선제’--가 필요한데, ‘일국양제’를 고수하는 중국정부가 그것을 방해하는 장애요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홍콩 내부의 ‘계급 양극화’라는 모순이 ‘홍콩과 본토’ 간의 대립으로 전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https://wspaper.org/article/22591?utm_source=messenger 참조) 
이는 견강부회식의 논리이다. 지금 홍콩 내부의 사회문제(빈부격차 등 계급갈등)를 해결하는데 있어 과연 직선제가 필수적인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현 홍콩의 정치제도 하에서 개혁파 혹은 서민 대표가 행정장관으로 당선되어 사회개혁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우리는 앞 절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필자가 보기엔 오히려 현 홍콩 내부모순을 ‘홍콩-본토’ 간 대립구도로 몰고 가는 것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핵심 과제라 생각한다. 그럴 때만이 홍콩 내부문제가 보다 정확하게 짚어질 수 있으며, 해결책 역시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모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홍콩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는 (1)주택, 토지, 소득 관련한 내부개혁의 실시 (2)중국과의 동반 성장 (3)궁극적으론 ‘일국일체제(一國一體制)’로의 통일 등이 있을 수 있다.
중국정부는 사실 홍콩정부가 가능한 일찍 이 같은 사회동란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도록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을 몇 차례 주문하였다고 알려진다. 어쨌거나 이 같은 상황을 간과하고 홍콩 자체 내부의 빈부격차와 시위대의 ‘반중정서’를 기계적으로 연계시키는 관점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홍콩사태의 내적조건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감안할 점은, 국제도시인 홍콩의 복잡한 인구 구성이다. 이 역시 앞서 언급한 외부 요인과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현실적’인 반중 요인으로 전환할 수 있다.
홍콩은 일찍이 1949년 중국 본토에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될 때 수많은 국민당의 골수분자와 그 가족 및 지지자들이 밀려왔다. 그리고 1976년 월남이 패망할 무렵에는, 사이공 정부 고위층과 부자들의 많은 부분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망명하였지만, 미국이 미처 못다 수용한 사람들은 영국의 배려로 홍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 그 숫자가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제 40여년이 흐른 지금 그들의 2세와 3세가 홍콩 인구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위의 두 부류는 성향 상 반공 내지는 반중 성향을 띨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현재 홍콩에는 8만5천명의 미국 시민권자와 30만 명이 넘는 영국-홍콩 이중 국적자가 존재한다. 이들 역시도 홍콩 반대파(범민주파)에 대한 지지 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그들도 대부분은 홍콩인(중국인)들인데, 홍콩이 잘못되면 사실 그들에게도 좋을 리가 없다. 집 떠나고 고향 떠나면 미국이나 영국으로 이민 간들 누가 반겨주겠는가? 그런 것은 사실 대부분의 홍콩인들에게는 모두 환상에 불과하지만,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고 떠날 때 이런 시민권을 남발하면서 이후 개입을 위한 ‘복병’을 만들어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아무리 홍콩이 이상과 같은 내적인 사회문제를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래도 홍콩은 전체적으로 본다면 매우 개방되고 다른 외부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생기 차고 발랄한 도시였다. 사실 어느 사회라도 얼마간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들을 크게 확대시킬 경우 작은 문제도 한없이 커보이게 마련이다. 지금처럼 다섯 달 넘게 계속된 소요사태는 외부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밖에 할 수 없다. 

좀 더 직접적으로 언급하자면, 그것은 영국, 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의 개입 때문이다. 그에 관한 많은 증거물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리비아,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최근의 베네수엘라 사태까지 겪으면서 확인되었던 미국의 소요와 교란 능력을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1960년대 이후 이미 국제 통치전략에 있어 ‘소프트웨어’ 방식을 중시하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노하우를 축적시켜 왔다. 전 세계 CIA 직원만 해도 10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많은 인력이 평소 무엇을 하겠는가? 그들이 개입하는 곳곳마다 지구상에는 큰 재앙이 발생한다. 지금 한국처럼 비정규직문제가 심각하고 지역격차가 큰 사회라고 한다면, 미국이 만약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한국에서도 홍콩 사태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아마도 한국의 변혁세력이 향후 이 나라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날 그 같은 경험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을 비롯한 서구 언론이 보내주는 그간의 일방적이고 편파적인 지지가 아니었다면, 홍콩 사태는 아마도 훨씬 일찍 종식되었을 것이며 이렇게까지 풍파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5. 중국의 역할

중국은 홍콩 발전의 걸림돌인가 아니면 추동력인가? 이 문제 역시 홍콩 사태에 있어 중요한 쟁점 중 하나이다. 홍콩 사태를 관찰하는 사람들 중에는 중국이 홍콩 발전에 있어 장애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본토인들이 들어와서 집값을 올려놓고, 관광객들이 생필품을 사재기하여 물가를 높여놓아 서민들의 생활을 팍팍하게 만들고, 본토 유학생들이 좋은 직장을 차지하여 홍콩 현지 청년들의 취업과 장래가 암울해지고 있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이는 홍콩 내 친서구적 언론들이 홍콩인과 중국인을 대립시키고, 특히 청년학생들을 선동하는데 사용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사실을 따지자면 비록 일부 이 같은 현상이 있을지라도, 중국 본토는 홍콩에게 있어선 경쟁 상대이기 보다는 다른 나라에게는 주어지기 어려운 ‘기회의 땅’이라 할 수 있다.

1997년 반환 이후 중앙정부가 홍콩을 위해 실시한 우대 정책은 적지 않았다. 홍콩은 천혜의 초특급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먼저 홍콩정부는 재정적으로 중앙에 전혀 세금을 내지 않는다. 즉 홍콩에는 지방세만 있을 뿐 국세가 없다는 얘기다. 다음으로, 홍콩에 대한 배려를 위해 중국정부는 국제무대에서 홍콩의 특수한 경제적 지위를 인정한다. 즉 중국에 투자하려는 외자는 반드시 홍콩을 거치게 함으로써 홍콩이 먼저 ‘통행료’를 벌 수 있게끔 해주었다. 그밖에, 홍콩 자본은 본토 투자 시에 우대와 특권을 누리는데, 홍콩산 제품이 내륙시장에 진출할 때는 무관세를 적용받는다. 이 밖에도 본토는 아무 조건 없이 인근의 광동성을 통해 홍콩에 수도와 전기, 채소, 육류 등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주고 있다. 홍콩의 시위대와 적지 않은 홍콩 시민들은 마치 평소에 마음껏 호흡하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자신들의 대륙에 대한 이러한 의존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본토 관광객들이 일부러 홍콩을 찾아주는 것에 대해 조금만 자신들의 생활에 불편을 끼쳐도 ‘황충(메뚜기)’ 무리로 비유하며 그들을 경멸한다. 홍콩의 이 같은 우월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지금 해외투자자들이 홍콩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중국 본토 때문이며, 이 때문에 홍콩의 국제금융허브로서의 지위가 가능해졌다. 정반대로 해외투자자가 홍콩의 금융 중심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륙에 투자하러 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것은 기본 상식에 속하며 본말이 전도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홍콩은 중국에 대해 어떤 우월감도 갖지 못하며, 정반대로 본토야말로 홍콩에 대한 실질적인 우월감을 가질 만하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 미국 상하 양원을 통과하여 트럼프가 최종 서명한 소위 ‘홍콩인권법안’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홍콩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위안화 국제화의 전초기지인 눈에 가시 같은 존재 홍콩을 죽이기 위한 법안이다. 이 법안의 핵심 요지는 홍콩특구 정부의 폭동 진압에 반대한다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중국 중앙정부가 나서 홍콩을 구제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가장 주목되는 조항은, 홍콩에 대한 미국의 특수 관세 대우를 ‘자동 연장에서 1년마다 심사’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마치 일본정부가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하고 수출품에 대해 매 건마다 심사해서 수출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되면 홍콩의 국제금융무역항으로서의 매리트는 크게 감소하게 된다. 이러한 조치가 과연 홍콩인들에게 유리할까 불리할까? 그런데도 홍콩 학생운동 지도자 황즈펑 등은 미국에 달려가 하원의장 펠로시의 손을 붙잡고 인권법(사실상 홍콩 제재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애걸하였으며, 그것이 통과되자 시위대가 길거리에서 환호하는 모습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 순진한 홍콩 학생운동 지도부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사례인데, 대다수 중국인들이 왜 그를 ‘현대판 매국노’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사실 이번 홍콩 사태가 발발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홍콩의 전도는 매우 양양하였다.  2018년 10월 23일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인 강주아오(港珠澳)대교가 개통되었다. 홍콩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중국 본토의 광둥(廣東)성과 마카오를 잇는 총연장 55㎞인 이 다리는 2003년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최초 계획을 세운 이래 사전 연구와 준비 작업에만 6년, 착공 후 공사기간은 8년이 걸렸다. 총 공사비 1159억 위안(약166억 달러)이 투여된 이 다리는 해상 구간 22.9㎞와 해저 터널 구간 6.7㎞가 포함된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자동차로 4시간, 배로 1시간이 걸리던 광둥성 주하이(珠海)와 홍콩 간의 거리가 30분대로 단축되었다. 

이 다리의 건설로 중국 제조업의 총본산인 광둥성 9개 도시와 홍콩ㆍ마카오를 포괄하는 광역경제권 건설(대만구(粤港澳大湾区) 사업전략)이 앞으로 본격 궤도에 오를 전망이다. 홍콩은 국제도시로 금융과 교육체계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는 반면, 선전은 혁신과 창의적인 기풍이 뛰어나다. 여기에다 주변의 동관·중산 등은 세계적인 제조업 기지이기 때문에, 이들이 결합된 주삼각지대(珠三角)는 세계에서도 가장 완벽한 산업체계를 갖추었다고 평가 받는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제품의 샘플로 전환하는 속도는 미국 실리콘밸리보다 10배나 빠르며, 비용은 1/10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세 개 지역이 유기적 결합을 이룰 경우 향후 미국 캘리포니아만, 일본의 동경만과 함께 세계 3대 기술혁신 제조벨트 지역이 될 것으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예측되어 왔다. 
현재 중국과 홍콩 정부가 함께 손잡고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이러한 프로젝트의 실현이 과연 홍콩 젊은이들에게 있어선 어두운 재앙일까 아니면 밝은 미래일까?


6. 한국변혁운동과의 관계 

지금까지 우리는 홍콩 사태에 대해 그 본질을 밝히는데 주력해 왔다. 한국 언론은 홍콩 사태를 의도적으로 제2의 광주항쟁으로 묘사하고 독재와 억압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앞서 본대로 홍콩 사태가 제2의 광주항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완전한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시위대의 요구는 ‘일국양제’라는 기존 정치적 협약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된다. 양제(兩制), 즉 본토는 사회주의, 홍콩은 자본주의를 유지키로 한다는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결국 일국(一國)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 변혁운동진영 일각에선 여전히 홍콩 시위대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그 긍정성을 인정하려 한다. 한국 변혁진영 일각의 이 같은 태도는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그 신비화의 결과라 보여 지며, 이는 심각한 정치적 오류를 범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주장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은 대체로 “민중 자신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 것이 민주주의”, “자신들의 신중한 결정으로 자신들의 정치경제체제를 만들어 가는 것”,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체제 문제를 떠나 민주주의. 인권문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등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리하여 홍콩 시위대는 지금 그 같은 투쟁을 하고 있기에 그들의 행위는 정당하며, 그 과정은 열려있어서 그것이 설령 독립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에 상관없이 “민중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매우 선험적이고 규범적 가치로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며, 구체적 정치현실과는 무관하게 그것을 고립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홍콩 시위대의 행정장관에 대한 직선제 요구를 “민중 자신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행위와 일치시킨다. 과연 이 같은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까? 알다시피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선거는 많은 부분 돈과 언론권력에 의해 왜곡된다. 한국에서도 그 같은 선거는 무수히 진행되지만, 그것은 때로는 민의를 반영하기도 하는 반면 또한 이명박, 박근혜 같은 정권을 탄생시킨 것을 보면 항상 그것을 제대로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같은 민주주의(직선제)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니 하면서 신비화할 수 있단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 중동, 남미 등지에서 목격하듯 ‘내란’으로까지 치달으며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거대한 사회적 혼란과 오랜 기간의 후퇴를 야기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참으로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맑스와 레닌이 설파했듯, 계급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계급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로 상징되는 민주주의는 아테네나 로마와 같은 고대시대에도 그러하였고, 근대 부르주아사회의 탄생과 또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계급적’ 성격을 무수히 증명하여 왔다. 프랑스혁명 때는 부르주아지가 그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봉건귀족들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통치체제를 확립하는 무기로 사용하였으며, 1917년 러시아혁명 때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주의국가를 설립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리고 다시 역사는 돌고 돌아 1991년 소련은 서구세력과 결탁한 옐친의 민주주의투쟁에 무릎을 꿇고 해체되고 말았다. 지금 미국은 이 같은 ‘인권’과 ‘민주’의 기치를 내걸고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소위 ‘불량국가’ 들을 하나 둘씩 전복시키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펼치고 있다. 이 같은 엄연한 현실을 놓고 어찌 민주주의 문제를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일까?

끝으로, 한국 변혁운동과 관련하여 좀 더 실천적 관점에서 홍콩 사태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홍콩 사태의 진행은 분명 미국의 의도대로 되어 가는 측면이 있다. 이후 미국은 대만 이외에도 다시 홍콩을 중요한 대중국 카드로 사용하려 할 것이다. 그럴 경우 한국 변혁진영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같은 추세의 강화는 당연히 한국 보수진영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그들의 논리가 우세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즉 한미일 삼각동맹의 구축을 통해 반인권 독재국가인 중국을 견제하자는 논리가 한국에서 대중적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 점이야말로 국내 보수 언론매체가 지금까지 홍콩 사태를 집중 보도하고 이구동성으로 홍콩 시위대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라고 보여 진다. 결과적으로 이들 언론과 함께 홍콩 시위대에 지지와 동정을 보내는 한국 변혁진영은 한편에선 지소미아 반대를 통해 (중국을 가상敵으로 하는)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을 반대하면서도, 정작 중국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 결국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형국이 되고 만다. 

현재 홍콩 사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친시위대 입장에서 중국정부에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국내 좌파세력은 <노동자연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들 동지들은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미국의 책동을 앞장서서 지지하는 셈이 된다. 아마도 문제의 근원은 <노동자연대> 그룹이 갖고 있는 중국사회에 대한 잘못된 시각, 특히 ‘국가자본주의론’ 이라는 이론적 도그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론에 따르면 중국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 관료로 위장한 사실상의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국가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론적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면, 중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 노동자계급이 연대하여 타도해야 할 자본주의국가로 보게 된다. 그러나 사적유물론을 신봉하는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면 중국의 사회주의 성격을 부정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실천적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미국은 남한의 재벌체제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동맹세력으로서, 자한당 등 보수세력과 손잡고 남북 간의 대치상황과 한반도에 직접적인 전쟁위험을 불러일으키는, 한국 민중과 노동자계급에 있어서는 재벌과 함께 제일의 타도대상이다. 그에 비하면 중국은 한국의 민중과 진보진영에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미국의 전 세계적 패권을 약화시켜 줌으로써, 결국 한국사회 내 보수와 진보의 역관계를 심각하게 바꾸어 주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 이 같은 그리 어렵지 않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계급구도를 <노동자연대> 동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김정호 약력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박사 학위 취득,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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