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9) - 1950년 7월 14일 청주 쌍수리

청주 남일면 쌍수리에 주둔하던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 18연대(연대장 임충식 대령)는 인민군(2사단)과 전투하던 중국군의 진지 내에 피란하던 민간인들이 있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국군은 피란민들이 자신들의 소개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생긴 피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국군이 진지를 이동하려던 태봉에는 피란민들이 먼저 모여 있었고 이들에게 피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지는 의문이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311~312쪽).

『한국전쟁사』는 국군이 어쩌다가 민간인들이 피란하던 곳까지 진지를 옮기게 되었는지, 피해를 입은 피란민은 누구이며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청주 쌍수리는 20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된 곳이라는 주장이 있어, 국군이 말하는 피란민들이 이들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 『한국전쟁사』 제2권 312쪽. 쌍수리 태봉에는 국군보다 먼저 피란민이 모여 있었다.
▲ 왼쪽으로 새 연립주택이 지어진 부지가 국민보도연맹 사건 집단희생지로 추정된다고 한다. 뒤로 보이는 산이 태봉이고 오른쪽이 남일초등학교이다. (2019년 3월 8일 조사)

민간인 피란지로 사단지휘소를 옮기다

1950년 7월14일 아침 10시, 국군 정찰기가 충북 진천과 오근장 사이의 도로에서 조치원 방면으로 이동하는 인민군 전차와 트럭들을 포착했다. 이들 인민군 무리는 쌍수리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이면 수대리에서는 이미 국군 8연대와 인민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수도사단은 산하에 1연대, 8연대, 18연대가 있었으며 독립기갑연대와 17연대, 20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중에 그나마 전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부대는 18연대 2대대뿐이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276쪽).

전날인 7월13일, 인민군의 수색대로 보이는 한 무리가 청주 남일면 쌍수리까지 잠입했던 것으로 파악한 수도사단장 김석원은 국군 진지의 위치가 노출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새벽 5시 주둔지를 성무봉(△431m고지)에서 쌍수리 남쪽 태봉(△200m고지)으로 옮겼다. 그런데 당시 태봉의 북쪽 중턱에는 이미 그 전부터 많은 피란민이 모여 지내고 있었다.

▲ 쌍수 2리 마을에서 본 태봉. 태봉 중턱에는 이미 피란민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사단장 김석원은 필자가 사진을 찍던 부근에 이미 인민군 수색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고 했다. (2019년 3월 8일 조사)

국군의 진지 가까이 피란민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인지 수도사단 18연대 2대대장 장춘권 소령은 피란민들에게 장교를 보내 피란지를 옮기라고 했지만, 피란민들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태봉으로 옮긴 뒤에 바로 북록의 쌍수리에 많은 피란민이 모여 있다는 첩보를 듣고 대대장 장춘권 소령은 장교를 잠입시켜 ‘격전이 예상되니 다른 곳으로 피란지를 옮기도록’ 두세 번씩이나 요청하였으나 ‘바로 이곳이 정감록에 나오는 피란처’라고 고집하면서 움직이지 않아 끝내는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정감록이 문제였다?

그런데 당시 쌍수리의 상황에 대한 『한국전쟁사』의 설명은 수많은 피란민들의 죽음의 원인과 과정을 얼버무리며 불분명하게 넘어갔다. 18연대는 태봉 자락의 피란민들이 정감록을 근거로 피란 장소를 옮기라는 국군의 요구를 거부하여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마치 피란민들의 종교에 문제가 있었다거나 피란하지 않아서 생긴 피해인 것처럼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피란민 피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태봉에는 이미 피란민들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고 작전상 필요에 의해 갑자기 18연대가 성무봉에서 태봉으로 옮겼다. 이것만으로는 태봉 산자락의 피란민들이 어쩌다가 얼마나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국군의 잘못 때문에 피란민들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면 “인민군의 공격에 의해 많은 피란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라고 명확히 서술했어야 한다. 그런데 기껏 “정감록을 믿은 피란민들이 국군의 요청에 따르지 않아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소극적 설명에 그쳤다. 이는 피란민들의 피해가 인민군의 공격보다는 국군의 의도적 공격 또는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에 의한 피해가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한다.

그날의 전투 과정에 대한 다음 설명에서 피해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약간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태봉으로 진지를 옮긴 사단장 김석원은 다시 공격에 유리해 보인다며 쌍수리 앞산(쌍수리 마을을 사이에 두고 태봉의 건너편에 있는 산으로 인민군 수색대가 있을 수 있었다.)을 전진기지로 삼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인민군이 없는 줄 알고 명령을 받고 산의 능선을 따라 이동하던 국군은 인민군의 직사포 공격을 받게 되었고, 국군은 곡사포로 응사했다고 한다.

전투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였는데 피란민 피해와 관련해 일단 눈에 띄는 부분은 인민군의 직사포 공격을 받게 된 이동 능선에 대한 것이다. 피란민 피해가 인민군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이동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국군의 이동 경로에 피란민들의 은신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단장이 악명 높은 김석원이었으므로 피란민을 방패로 삼았을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다.

국군의 이동 이유도 석연치 않다. 또 한 번의 진지이동 결정은 당시 인민군이 쌍수리까지 오지 않았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므로, 사단장이 바로 조금 전까지 인민군 정찰병이 쌍수리까지 도착했다고 판단했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어느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단장의 결정이 죽 끓듯 변덕이 심했음을 의미한다. 전쟁 전 토벌작전 뿐 아니라 전쟁사에서 묘사되는 사단장 김석원의 전투 중 변태적 행각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피란민 피해가 인민군 공격 때문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다. 당시 피해를 입은 피란민이 누구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있다. 이에 따르면 같은 시기 청주에 소개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이에 따라 청주에 거주하던 시민들이 쌍수리로 피란왔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8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2권, 302쪽). 피해를 입었다는 피란민들은 청주 시내에서 피란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마을 조사 중 전투 중 주민 피해 사실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쌍수 2리가 인민군과 국군의 포격전 사이에 있었으므로 이 전투 중 집에서 나오던 한 노인이 국군의 사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학살지였던 쌍수리

전쟁 전후 청주시내 청주약국 건너편에 CIC사무실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청주CIC는 충북경찰국으로 이동하여 상주했으며 헌병대와 함께 청주경찰서에도 드나들었다. 6월28일경 내무부 치안국에서 충북경찰국에 보도연맹원 소집과 사살에 대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 청주경찰서로, 그리고 다시 각 지서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연행된 주민들은 청주경찰서 체육관인 무심전에 감금되었다가 3~4일 후 청주형무소와 미원초등학교로 이송되었다. 이후 CIC와 헌병의 지휘하에 있는 경찰에 의해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남일면 쌍수리 등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분터골에서는 7월9일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쌍수리는 인근 고은리 분터골과 함께 청주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200여 명이 7월10일 학살당한 곳이다(진실화해위원회 등, 『피해자현황조사 용역사업 결과보고서』, 2007, 181~182쪽).

200여 명이 희생된 쌍수리 현장에서 남편과 함께 총살을 당할뻔했던 강영애 씨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당시의 참상을 증언한 바 있다(박만순, 『기억전쟁』, 2018, 63쪽). 생존자 강 씨의 증언에 따르면 쌍수리 학살이 7월10일 벌어졌으므로 7월14일에 벌어진 이 전투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민군과 국군이 격전을 벌였다는 그 자리는 이미 수백 명의 주민들 시신이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을 것이고, 이 시신들을 국군이 못 봤을 리 없었을 것이다. 국군이 말하는 피란민들의 시신은 이들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 충북사건 조사 전문가 박만순 씨에 따르면, 생존자 강영애 등 20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곳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2018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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