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8) - 1950년 7월 11일 공주 유구

『한국전쟁사』는 미 24사단 34연대에 배속된 국군 독립기갑연대 기갑6중대(중대장 박익균 중위) 2개 소대 100여 명이 7월 11일 아침 7시 공주를 출발하여 예산을 향하던 중 정오 충남 공주시 유구읍 석남리 유구초등학교에서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고 있던 2개 중대 규모 300여 명의 인민군을 1시간 동안 공격하여 60여 명을 살해했다고 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104~105쪽)
문제는 소대장 조돈철 소위의 일방적인 증언이 유일한 근거였다는 점에 있었지만 전사편찬연구자들은 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게다가 인민군 6사단이 공주 유구에 진입한 날이 7월 12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당시 유구에는 인민군이 진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민군이 없었다면 인민군 환영대회에서 사살당했다는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림 1) 국군이 공격을 시작했다는 옛 과수원에서 본 유구초등학교. 학교까지는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전투 직전의 예산과 공주 유구

7월 5일 오산과 평택의 미군을 물리친 인민군 4사단이 7월 8일 천안에 진입하자 곧 예산에도 곧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 예산경찰서가 같은 날 홍성으로 후퇴했다. 당시 예산경찰서는 충남도경의 지시에 따라 7월 초부터 지역 내 국민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소집하여 유치장에 감금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후퇴했으므로 이들을 총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인민군 6사단 주력은 7월 9일 먼저 전의, 정안을 통해 공주로 향하는 길을 택했고 인민군 6사단 13연대 등 나머지 후발부대가 아산을 지나 서해 연안인 예산, 홍성 방면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정안 방면에 비해 예산 방면으로 다가오는 인민군의 진입 속도가 늦게 되었으니 예산경찰서의 후퇴는 때 이른 행동이 되어버렸다.
예산경찰서는 후퇴 하루만인 7월 9일 복귀했다. 『한국전쟁사』는 예산경찰서가 너무 일찍 후퇴했다는 질책을 받았다고 서술했지만 경찰서의 후퇴는 충남도경 등 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니 실제 그 책임은 단위 경찰서가 아니라 국방부 등 지휘부에게 있는 것이었다. 비겁해 보이는 이런 방식의 서술은 수도 없이 반복된다.  
복귀한 예산경찰서와 각 지서는 유치장을 탈출한 주민들을 다시 잡아들였다가 두 번째 후퇴하면서 7월 11일 예산군 대술면 화천리 뒷산(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이전까지 차동고개로 알려졌다)와 예산읍내 시장 근처 예산천 쌍소무배기 등에서 사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2)」,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4권, 518~519쪽. 윤택림, 『인류학자의 과거여행-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역사비평사, 2004, 136쪽 재인용) 광시면에서는 체포된 주민들을 지서 유치장에서, 응봉면에서는 주민들을 체포하여 응봉지서로 이송하는 도중에 학살했다고 한다.(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2009년 피해자현황조사 연구용역사업 최종결과 보고서』, 94쪽) 9일부터 11일까지 학살 사건을 저지른 예산경찰서는 7월 12일 홍성 쪽으로 후퇴했고 같은 날 인민군이 예산에 진입했다.
같은 시기 공주에 주둔하던 미 34연대는 7월 9일 천안 방면에서 내려오는 인민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연대의 전방지휘소를 공주읍내 봉황초등학교에 설치했고 이틀 뒤인 7월 11일 인민군이 공주시 의당면에 진입하기 시작하자 광정리(현 정안면 광정리)에 배치되었던 3대대가 늦은 저녁 금강을 넘어 철수했다. 금강 가까이 위쪽에 있던 의당면 수촌리에는 1대대가 남아 인민군의 공격에 대비했다지만 같은 날 저녁 1대대 역시 인민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12일 금강선으로 후퇴하였다.(허종호, 앞의 책, 61쪽) 같은 시간 예산 방향에서는 아직 인민군이 진입하지 않고 있었다. 

국군 기갑중대가 적진을 향하다

기갑연대 기병연대 7중대장이었던 김촌성 중위에 따르면, 전쟁발발 전부터 어느 사단에도 속해있지 않았던 독립기갑연대가 확보하고 있던 말은 경주에 있던 종마목장의 것까지 합쳐 300여 필이었으며 이에 따라 편성할 수 있는 기병중대는 5중대와 6중대 등 2개 중대에 그쳤다고 한다. 그는 7중대는 6월 27일 김포를 방위하기 위해 새로 편성되었다고 했다.(국방부, 앞의 책 제1권, 700~701쪽) 
한편, 후퇴하여 대전비행장에 집결했던 국군 기갑연대 기병대대 6중대(중대장 박익균 중위)는 7월 8일 밤 미 24사단장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7월 9일 아침 공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오후에 공주에 도착했다. 미 34연대에 배속된 기병중대는 34연대장으로부터 “공주를 기점으로 예산 청양의 삼각지점을 수색 정찰하여 적정을 수집,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95쪽)
공주사범학교에 중대본부를 둔 기갑 6중대장은 7월 10일 1소대(소대장 김관섭 소위)를 이끌고 예산을 향했다. 『한국전쟁사』는 이들이 유구를 통과했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당시 공주에서 예산을 향하는 가장 빠르게 가려면 유구를 지나야 했으므로 이들이 유구를 통과했음이 분명하다.
예산에 도착한 6중대장 일행은 예산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천안과 예산 사이의 도로를 수색한 뒤 아직 인민군이 오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예산경찰서의 전화를 이용하여 기갑중대 주력을 예산으로 집결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을 통해 예산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할 당시 기갑 6중대 1소대가 예산경찰서와 함께 있었던 사실은 분명히 확인된다. 
7월 11일 아침 7시 미군은 소속 주력 부대인 2개 소대가 예산을 다녀오도록 명령했다. 전날 기갑 6중대장의 보고를 받았을 것이고, 100여 명에 이를 중대원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산에 아직 인민군이 진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중대장이 이들을 예산으로 집결시킨 이유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예산지역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7월 11일 자행된 것으로 보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예산경찰서 주력은 온양, 당진, 서산경찰서와 함께 아산 송악면 유곡리 봉곡사와 신창면 읍내리 학성산에 집결한 인민군을 견제하다가 7월 12일 새벽 1시 예산읍 신례원리와 대술면 시산리로 진입하는 인민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어 새벽 6시 30분 후퇴했다고 한다.(예산경찰서 경찰연혁사, 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2009년 피해자현황조사 연구용역사업 최종결과보고서(충청남도 예산군)』, 93쪽 재인용)

국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시신을 발견했으나

기갑 6중대의 유구읍 공격은 국군에게 살해당했다는 한 주민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조돈철 소위는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공주에는 중대본부 요원만 남겨놓고 주력은 모두 예산으로 출발했는데, 금강을 건너 산정리(유구 남쪽 4km) 부근에 이르니 어느 다리 밑에 민간인 한 사람이 죽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국군이 죽이고 갔다.’라고 했으나 탄피를 조사해보니 다발총이었다. 다시 확인해 보니 적이 우리 지프차를 타고 와서 살해한 것이었다.”라고 했다. 
『한국전쟁사』는 다리 밑에서 한 주민이 사망하게 된 경위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지만 당시는 군과 경찰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하고 후퇴할 때였으니 이 죽음 역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연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국전쟁사』는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림 2) 『한국전쟁사』 제2권 104쪽. 유구에서 최초로 발견된 시체에 대해 주민들은 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증언했지만 조 소위는 살펴본 결과 탄피가 인민군 총탄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바로 하루 전날 국군 같은 부대가 유구를 지났을 것이므로 이 주장은 조작의 출발점처럼 느껴진다.

 기갑소대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산정리는 공주 신풍면 산정리를 말하며 다리 밑이었다고 하므로 이 다리는 지금의 산정교를 말할 것이다. 이 다리는 지금도 유구읍내와 4km정도 떨어져 있다. 
‘국군이 죽이고 갔다’는 진술을 보면 이를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아마 총살자들의 복장을 보고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지만 기갑연대 조 소위는 탄피를 보고 국군의 지프차를 빼앗은 인민군이 죽이고 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기갑소대의 임무가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이들은 적어도 당시 인민군이 예산에 진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여정을 떠났던 것이다. 따라서 인민군이 유구까지 와서 민간인을 살해했을 것이라는 예단은 사실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게다가 앞에서 보았듯이 당시 유구에 국군이 있었다면 그들은 7월 10일 공주를 출발한 기갑연대 6중대장 1소대였을 것이다. 공주에서 예산을 향하는 길은 유구를 거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병중대가 인민군 복장을 한 것이 아니라면 말을 타고 총으로 무장한 국군들 앞에 공포에 눌린 복수의 주민들이 가해자를 “국군”이라고 지목한 것은 진실일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이 지목한 국군은 같은 기갑중대원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 3) 산정교. 이 다리 아래에서 발견된 시신에 대해 당시 주민들은 국군이 총살했다고 증언했지만 조 소위는 인민군이 죽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인민군 환영대회장을 공격하다

판단의 근거도 없어 보이지만 조 소위는 “그래서 적이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 도로를 따라 도보로 전진하였다. 얼마 안 가서 지프차가 앞에서 달려오는 것이 보여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을 한 결과 적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사로잡았다. 그 자를 신문해보니 ‘제6사단 유격 백 몇 부대인데, 2개 중대로서 유구를 해방시켰다’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지프차를 탄 인민군을 만나자 기다려 공격했는데 이들이 정규군이 아니라 유격대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증언은 계속되었다. “그때 마침 어느 주민이 ‘인민군이 지금 유구우체국장과 의용소방대장을 인민재판해서 죽인 다음, 유구국민학교에서 환영식을 열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최문호 소위와 함께 유구마을 남쪽 어구에 기관총 2정을 추진시켜 이의 엄호 하에 먼저 마을 서남쪽으로 과수원이 있는 작은 고지를 점령한 다음 마을을 공격키로 하고.”라고 했다. 
이는 인민군 유격대가 주민들을 학교로 소집한 다음 인민재판을 열어 주민 두 명을 학살한 다음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고 있다는 정보였고, 이에 대한 국군의 대응은 기관총 2정을 동원하여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아마 이 정보대로라면 마을 주민 대부분과 3백여 명에 이를 2개 중대 규모의 인민군 유격대가 학교에 모여 있을 것이니 대략 5백여 명은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국군이 다가갔지만 보초는 술에 취해 졸고 있었고 공격이 시작되자 인민군 유격대라고 하는 자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도로에 연한 제방을 따라 은밀히 과수원고지를 점령하고 보니 적 보초 2명이 술에 취해서 졸고 있었다. 그 보초를 처치한 뒤 고지에서 마을을 내려다 본 즉, 국민학교 교정에 2개 중대 규모의 적병이 모여 있었다. 그 환영식장으로 접근해서 일제 사격을 가하면서 들이치니 적이 당황해서 저항도 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졸면서 경계를 태만히 한 경계병의 존재는 성공한 습격의 전제 조건이었을까? 여지없이 경계에 실패한 인민군들이 이번에는 술까지 마셨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검증할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이 다음은 더 어이없다. 
인민군 환영식에는 2개 중대 규모의 적병이 모여 있었다고 했다. 인민군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주민들도 모여 있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 설명도 없다.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민군 유격대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조 소위의 이어지는 증언은 운동장에 모여 있던 이들이 민간인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총탄이 떨어지자 “덮어놓고 큰 소리로 ‘이놈들, 손들어라!’하고 호령하자 그 기세에 놀랐던지 적이 엉겁결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결국 그 적병들은 뒤따라오던 소대원에게 사살되었지만.”이라고 했다.
조 소위는 이 공격의 결과에 대해서 “한 시간만인 13:00에 우리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는데, 전장을 정리해보니 적의 시체 60여 구가 확인되었고, 소총도 60여 정이나 노획하였다. 그리고 우리 것인 지프차 1대를 회수하고 차량 2대를 파괴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쪽의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고, 소대의 김성경 하사 1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라고 했다. 마치 무협소설을 보는 듯한 서술이지만 그래도 60여 명의 사망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인민군이 유구에 진입했을까? 

유구초등학교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인민군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당시 인민군이 유구에 진입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위 공격이 인민군을 향한 것이라면 유구에서 공격당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인민군 6사단 일부로 7월 11일 오전 유구에 진입했어야 한다.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7월 11일 아산 염치읍 대동리에 집결했던 인민군 6사단은 오후 4시부터 남하를 시작했는데, 13연대는 서해 연안을 따라 예산, 홍성, 대천, 서천으로, 선발 주력 부대인 14연대 등은 유구 등으로 진출하면서 인민군 1군단 주력의 오른쪽을 엄호했다고 한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333쪽) 이는 7월 11일 인민군이 아산에 있었고 유구에는 진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보고서 다른 부분에서 인민군 6사단 주력인 14연대가 유구에 진입한 때는 7월 12일 아침 6시 무렵이었는데 당시 국군의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고 했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199쪽, 334쪽) 바로 전날 유구에서 인민군 2개 중대가 전멸 당하다시피 했다는데도 인민군 측은 국군 측의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국군은 이미 후퇴하고 없었으니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는 서술은 당연한 표현일 수 있다.
인민군 6사단 13연대 중좌였던 최태환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7월 11일 온양(아산)을 출발하였으며 예산과 홍성을 지나 광천, 서천에 도착할 때까지 전투는 없었다고 했다.(최태환, 『젊은 혁명가의 초상』, 140쪽) 
이북의 전쟁사학자 허종호에 따르면, “천안을 해방한 인민군련합부대는 공주방향으로 계속 성과를 확대하여 7월 11일 광정리(공부 북쪽 15키로메터지점) 계선에서 미군 1개 대대를 포위 소멸하고 금강우안에 진출하였다. …(중략)… 전의 일대에서 적을 소탕한 인민군련합부대는 계속 남으로 진격하여 7월 12일에 조치원을 해방하고 13일에 금강우안에 진출하였다.”라고 했다.(허종호,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 제1권, 202쪽) 여기서 말하는 광정리는 정안면 광정리로 유구에서 동쪽으로 15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으니 7월 11일 오전에 인민군이 유구에 있었다는 조 소위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상으로 보아 유구초등학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7월 11일 낮 동안 인민군은 아산에 있었을 것이니 국군 기갑중대가 유구를 거쳐 예산을 다녀오는 동안 인민군 6사단 13연대와 14연대, 15연대를 만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60여 명 죽음의 진실

2개 중대 규모의 인민군 300여 명과 수백 명에 이를 마을 주민들이 모여 있던 학교를 공격한 결과 60여 명이 사망했다. 인민군 측의 대응사격은 없었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면 이는 전투라기보다 민간인이었던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학살한 사건에 더 가깝다. 
특히 조 소위가 말한 마지막 대목, “이때 적을 피해 숨어있던 유구지서장이 돌아왔으므로 그에게 치안을 맡기고, 경찰병력을 수습해서 특히 동북 쪽의 온양으로 가는 도로를 경계토론 한 다음 17:00 쯤 해서 우리는 다시 서북 쪽의 예산으로 갔다.”는 것이 주목된다. 앞서 보았듯이 예산경찰서는 7월 8일 후퇴했다가 7월 9일 복귀했다. 후퇴했던 유구지서장 역시 같은 시기에 복귀했을 것이고 이틀 동안 보도연맹원을 색출하고 연행하는 활동을 했을 것이다.
지서장을 비롯한 경찰들은 곧 인민군 본대가 들이닥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이를 알고 있던 기병중대가 이들 유구지서장에게 치안을 맡겼다든가 지서원들에게 도로를 경계하도록 했다니 이들의 운명은 곧 살펴 볼 강경경찰서 경찰관들의 운명과 같았을 것이다.
유구에 이어 국군 기병중대가 향한 곳인 예산의 대술면 화천리 뒷산에서 7월 11일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지난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했다.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인민군 6사단 13연대가 경찰부대의 저항을 물리치고 예산을 점령한 날은 7월 13일 새벽 5시였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1권, 333~334쪽) 유구 전투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 역시 인민군의 점령 전에 발생했던 것이니 국군 기갑연대가 예산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7월 9일 왕촌 살구쟁이 학살을 시작으로 7월 10일 의당면 청룡리 산 101 여찬니 골짜기, 장기면 송원리 송계동 욕골(연기군 남면 송원리 산13-1이었다가 현 세종시 한솔동이 됨) 등 각 면 지역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진실화해위원회 등, 『피해자현황조사 용역사업 결과보고서』, 2007, 261쪽) 가해자는 주로 육군형무소 헌병대였지만 욕골의 경우는 국군 17연대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는 공주경찰서가 후퇴한 날이 7월 13일 오후 3시였으며 공주형무소가 완전히 소개된 날이 7월 12일이었으므로 7월 9일에서 7월 11일 사이에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집단희생되었을 것이라고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4권, 501쪽) 
공주경찰서와 산하 유구지서 경찰관들이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 먼저 후퇴를 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7월 11일 복귀한 국군에 의해 유구국민학교에서 60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7월 1일 전후 인천경찰서나 7월 17일 강경경찰서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국군은 인민유격대와 전투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국군에 대한 이들의 대응사격은 없었다. 환영대회에 참가한 민간인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다. 60명의 침략자를 무찌른 대승인지 아니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일방적 공격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림 4) 유구초등학교 운동장 너머로 과수원이 보인다. 2019년 4월 19일 조사.

비슷한 사례

남쪽을 점령한 인민군이 전투를 준비하기보다 학교운동장 등에서 “환영대회”와 비슷한 행사를 벌이다가 국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례가 더 있었다.
묵호경비부 대원 유종식 준위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 옥계앞바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많은 선박들이 떠있다는 연락을 받고 13명의 정보대원을 비상소집하여 권총만을 무장한 채 민간인 복장으로 옥계로 가서 인민군을 발견하고 공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새벽 밝을 무렵 옥계산등성이에 가서 내려다보니까 북괴군이 벌써 상륙을 했으며 수송선은 가버린 후였다. 북괴군은 옥계국민학교에 집합해가지고 나팔을 불며 행진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경비부에 보고하고 옥계산등성이에 37mm포를 장치해놓고 행진하는 북괴군 대열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첫 번째 포탄은 옥계국민학교의 국기계양대에 명중해서 북괴기가 넘어지면서 전투가 개시되었다.”(국방부, 앞의 책 제1권, 790쪽)

그는 공격을 받은 인민군이 4명을 반격한다고 보냈지만 모두 포위하여 사살했다며 “마침내 북괴군 4명이 척후병으로 나왔는데 북괴군 군관 한 사람하고 사병 3명이 산으로 올라오는 것을 발견해가지고 포위했다. 우리는 집중공격으로 그들을 모조리 사살하고 처음으로 소련제 권총 1정과 따발총 등을 노획했다.”라고 했다. 고작 4명을 경계병으로 보낸 인민군의 행위는 37mm 대포 공격이 포함된 해군 13명의 공격을 받은 인민군의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전쟁사』 제1권 783쪽에는 금진항과 옥계항 사이에 상륙한 인민군은 1,800명이라고 했다. 해군 13명이 이들을 공격했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상륙한 인민군이 1,800명이었는지는 물론 전투를 치렀다는 날짜가 6월 25일이 맞는지도 검토 대상이다.
옥계초등학교에 집결한 인민군이 “나팔을 불며 행진”을 했다는 주장은 유구초등학교에서 환영대회를 열었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증언을 그대로 신뢰하기 힘들지만 적 진영에 침투한 군대가 방어진영의 역공을 대비하기보다 점령지 군중을 선동하는 행사를 먼저 열었다는 증언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지나친 과장으로 보이는 점도 비슷하다. 민간인 복장에 권총만으로 무장했다는 유 준위는 어느 틈에 37mm대포까지 준비해 인민군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니 하는 말이다. 

이후

유구초등학교 사건 이후 예산에 진입했던 기갑중대는 다음날인 12일 아침 예산을 떠나 다시 유구를 거쳐 밤 10시 금강변에 도착했으나 이미 금강교가 폭파된 뒤였다. 강의 서안을 따라 내려오다가 13일 새벽 부여에서 배를 이용하여 금강을 건넜으며, 14일 아침이 되어서야 공주의 미 34연대에 합류했다고 한다.
70년이 지나가지만 여전히 가장 명확한 진실은 유구국민학교와 그 주변 마을, 그리고 사람들 기억 속에게 남아있을 것이다. 주민들을 면담하기 위해 2019년 4월 19일 유구 석남2리 경로당을 방문했지만 이제 이 사건을 기억하는 주민들을 만날 수 없었다. 국군이 공격을 시작했다는 과수원과 유구초등학교, 국군에게 피살당했다는 주민이 발견된 산정교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그쳐야 했다.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