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인가 학살인가 : 한국전쟁과 전투의 진실을 찾아서(7) - 1950년 7월 8일 단양 매포

제천을 방어하다 뜬금없이 대구까지 열차로 내려갔다온 국군 8사단 산하 10연대 1대대(대대장 박치옥 소령)가 1950년 7월 8일 단양 매포에서 학교 운동장에 주둔했던 인민군 전방지휘소를 기습 공격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163~167쪽) 마을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으므로 민간인들의 피해가 짐작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없다. 같은 시기에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집단 희생되기도 했으므로 인민군이 도착하기 전에 발생했다면 국민보도연맹 사건일 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

그림 ) 『한국전쟁사』 2권 164쪽
그림 ) 국군이 진입한 산은 오른 쪽의 산이며 왼쪽 두 개의 산에 인민군 경계병이 있었다고 했다. 매포초등학교는 도로 오른 쪽에 있다. 2019년 9월 10일 조사

전투 중 대구 후퇴로 궁지에 몰린 국군 8사단

국군 6사단이 충주 쪽으로 후퇴한 반면 국군 8사단은 원주 가리파재를 내준 뒤 제천과 단양으로 후퇴했다. 그런데 이들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7월 4일 열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7월 6일 돌아왔다. 전선이 텅 빈 사이에 인민군은 아무런 피해 없이 제천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사태에 대해 국군 8사단 참모는 “대구로 후퇴하라”는 육군본부의 전신 명령을 받고 이에 따랐다고 했지만 육군본부 지휘부는 그런 명령을 내린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명령문을 수령한 참모 장교가 간첩 혐의를 받았지만 조사결과 후퇴 명령문을 수령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인민군 측의 농간에 당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사건이 무마되었고 결국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군 내부에서조차 국군 8사단의 대구행을 놓고 전쟁을 치르는 군대가 열차여행이나 다녔다는 비난이 있었다. 나는 사단장 이정일 대령의 판단에서 그의 비겁함이나 무능을 탓하기 이전에 낙동강 전선 시나리오, 즉 대구까지 인민군을 끌어들인 뒤 상륙작전을 통해 반격하겠다는 미 국방부나 맥아더 사령부의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 바 있다.(졸저, 『국민은 적이 아니다』, 168~170쪽)

하여튼 제천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뒤 대구에서 올라온 국군 8사단이 7월 6일 막 단양에 도착했을 때, 이러한 사정을 모른 채 국군이 제천까지 올라갔을 것이라고 보았던 육군본부는 국군 8사단에게 “제천에서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육군본부의 예상과 달리 단양에 이제 도착했던 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참모회의를 열고 1개 연대로 남한강을 건너 제천을 공격하되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때에는 지체 없이 단양으로 후퇴”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사단장은 인민군 선발대가 이미 단양읍내와 인접한 덕천리와 여천리까지 다가온 상황을 알고 내린 결정이었다고 하는데, 대구까지 열차로 내려갔던 지난 잘못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는지 눈앞에 적을 둔 채로 “전후 협격(峽擊)”과 “후방 차단”의 위험을 알면서도 후방인 제천을 반격하는 흉내라고 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161~162쪽)

인민군 12사단 전방지휘소가 궁지에 빠진 국군 8사단을 건져주다

참모회의 결정에 따라 산하에 있던 21연대의 엄호 아래 10연대로 제천을 공격하려 했다던 국군 8사단은 또다시 육군본부의 명령과 다른, 다소 엉뚱해 보이는 공격을 시작했다.

대구이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진 소령에 이어 새로 부임한 권태순 중령은 때마침 사단 첩보부대로부터 인민군 사단 전방지휘소가 매포국민학교에 설치되고 있는데 인민군 주력은 제천에서 남진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경계가 허술하다는 긴급정보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정보를 들은 사단장은 정보참모 육근수 소령에게 확인하라고 명령했고, 육 소령은 정보제공자자 남한강을 건너 피란하던 제천의 유지와 경찰관이었으므로 신뢰할 만하다고 보고했다.

첩보부대가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닌, 고작 피란민들의 증언에서 얻은 부실한 보고였음에도 이에 만족했던 것인지 인민군 상황에 대해 정보가 없어 막연한 공격 작전을 세워야 했던 사단장으로서는 2개 연대를 순차적으로 동원해 제천을 공격하겠다는 기존의 계획을 수정했다. 수정된 계획은 2개 연대 주력을 현재 주둔하고 있던 단양의 남한강변 아래에 그대로 배치하고 10연대 1대대만으로 전방지휘소가 설치된 매포국민학교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러한 판단의 근거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다. 인민군 전방지휘소가 매포국민학교에 설치되었다는 정보는 사단 첩보대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첩보대가 단양으로 피란 온 주민들을 심문하던 중 제천의 유지와 경찰관으로부터 얻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 민간인들이 과연 어떻게 인민군의 전방지휘소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까? 신분이야 믿을 만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에게 그만한 군사 지식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통신전문 하나로 사실 확인 없이 대구까지 내려갔던 국군 8사단이 전문 지식도 없는 민간인들의 목격담을 조합하여 자기들끼리 인민군의 전방지휘소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매포에 가지 않았던 첩보부대들이 엉뚱한 보고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튼 이제 2개 연대를 제천까지 보낼 이유는 사라졌다.

명령에 따라 7월 6일 밤 11시 단양을 출발한 국군 10연대 1대대는 장비가 없어 눈앞의 남한강을 건너지 못하다가 다음날인 7월 7일 새벽 5시에 겨우 건널 수 있었으며, 하루 더 지나 7월 8일 새벽 4시 매포국민학교가 눈 아래로 보이는 평동리로 진입했다. 직선거리 불과 7km를 이동하는데 무려 29시간이나 걸렸던 것이니 이는 군인들이 마치 태업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수의 특공대가 적진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작전, 그조차 특별한 목적도 없었으니 어쩌면 “개죽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림 ) 국군이 진입했던 남쪽 산에서 본 매포초등학교. 400미터 정도 거리였다. 2019년 9월 10일 조사

한편, 단양에 남아있던 주력부대인 21연대와 10연대는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10연대는 단양읍내 단양국민학교에 집결하였으며 21연대는 고수리와 기촌리, 현천리 강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수리는 앞에 있었던 참모회의에서 인민군 선발대가 주둔했다는 덕천리와 남한강을 마주한 강변이었다. 과연 7월 8일 인민군 선발대가 덕천리 강변까지 도착해 있었는지 확인해 볼 문제이다.

매포초등학교를 공격하다

그림 ) 7월 8일 전투상황도.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2권, 165쪽. 매포에 진입하여 공격을 시작한 국군이 포위당한 뒤 개별적으로 후퇴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평동리 남쪽 능선으로 진입한 국군 1대대장 박치옥 소령은 정찰대로부터 “매포국민학교에 적의 사단 전방지휘소가 분명히 위치하고 북쪽의 △257와 그 동남쪽의 △265에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의 적이 분할 배치하여 전방지휘소 경계를 담당”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163쪽)

그런데 이 보고는 모순이 있었다. 학교에 주둔한 인민군이 있었다면 이를 경계하는 부대는 학교의 북쪽이나 동남쪽이 아니라 국군 정찰대가 진입했던 남쪽 야산에 배치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방에 경계부대를 배치하지 않고 후방에만 배치했다니 이 주장을 그대로 믿기 힘들다.

새벽 5시 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매포초등학교 운동장에는 100여 마리의 말과 10개의 소구경 대포, 소형 장갑차와 각종 보급품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서 있었다. 전방지휘소는 인민군 8사단의 것으로 당시 평창과 제천을 거쳐 내려온 인민군 8사단이 원주와 충주로 내려온 인민군 12사단과 교체하여 단양까지 내려왔던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인민군은 경계를 소홀히 했다. 당시 인민군은 “경계를 소홀히 한 채 깊은 새벽잠에 빠져 있는 듯”했는데 『한국전쟁사』는 그 이유에 대해 “남한강에서 12km 북쪽의 깊숙한 곳에 위치하였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실제 적어도 지난 2일 이후 국군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므로 경계를 소홀히 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목표에서 100미터까지 접근한 국군은 박격포와 기관총, 로켓포, 유탄발사기를 집중했다. 기습을 당한 인민군은 군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저항했으나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교전 중 국군 선발부대 일부가 매포국민학교로 들어가 포와 장갑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그런데 이때 “전황의 추이를 지켜보던 대대장 박치옥 소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제1, 제2 양중대의 철수를 명령”했다고 한다. 이 책은 박 소령이 의도했던 소기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맥락으로 보아 제천에서 방어하라던 육군본부의 명령을 중간인 매포에서라도 지키려 했다는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1968년 면담에서 대대장이었던 박치옥은 “기습은 성공적이어서 적의 소구경포와 장갑차 그리고 보급수송용 트럭과 100두의 마필을 살상 파괴하고 적의 지휘소 요원을 거의 섬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을 뿐 “소기의 목적”에 대한 진술은 없이 전공만을 주장했다.(국방부, 앞의 책 제2권, 201쪽) 검증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얼마 뒤 1개 대대 규모로 추정되는 인민군이 역습을 시작하자 국군의 철수가 본격화되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인민군 100여 명 살상, 장갑차 3대, 소구경포 10문, 트럭 3대를 파괴한 것으로 추정했지만 실제 국군으로서는 이 공격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사』는 이 공격에 대해 “사단장 이정일 대령의 과감한 결단의 소산으로써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가 감행한 동락리의 기습과 더불어 군의 제2단계 서전을 장식하였다.”라고 평가했다. 충주 동락마을의 전투도 미심쩍지만, 지난 잘못의 책임을 피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위해 포위될 위험을 무릅쓰고 자행한 역습을 이렇게까지 칭찬할 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위 박치옥은 국군 역시 20여 명이 전사했다고 회고했지만 실제 그 피해는 더 컸을 수 있어 보인다.

라주바예프 보고서

당시 인민군이 단양에 진입한 사실은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인민군 12사단은 7월 6일 저녁 8시 단양 적성면 하리와 매우에 진입했다고 한다.(라주바예프, 앞의 책 제1권, 206쪽) 적성면 하리라면 단양군청에서 서남쪽으로 7km, 매포읍사무소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곳이며, 매우는 매포읍과 단양군 사이 중간에 있는 하괴리의 한 지명으로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도담리를 마주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군 8사단은 7월 6일 이미 매포를 넘어 단양군을 포위하고 있는 인민군 12사단에 의해 고립될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1개 대대를 인민군 8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매포를 공격하게 한 결과가 되었다. 이 때문이었는지 7월 8일까지 한강을 건너려는 모든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하던 인민군 12사단은 7월 9일과 10일 밤이 되어 “광범위한 전선”에서 한강을 도하했으며 7월 14일 오후 6시 죽령을 확보하고 풍기(영주 서북방 10km)를 점령했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인민군이었을까?

진실화해위원회는 단양지역에 대한 국민보도연맹 신청사건이 없었던 데다 별도로 파악하고 있던 피해 사실이 없었으므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 결정에도 조사를 하지 못했다. 반면, 단양 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는 김기진의 저서 『미국 기밀문서의 최초 증언: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49쪽에서 확인된다. 이 저서에 담겨있는 미군 제25 CIC 팀의 1950년 7월 24일 보고에 따르면, 충북 단양에서 한국 경찰이 철수하기에 앞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수감돼 있던 12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 사례로 보아 단양에서 사건이 발생한 날짜는 7월 5일 전후로 짐작할 수 있다. 단양군 소재지보다 아래쪽인 제천 한수면 동창리의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7월 6일, 충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7월 5일, 괴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7월 7일부터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림 ) 남쪽 산에서 내려온 국군은 매포초등학교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공격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의 매포파출소 아래 대가천 강둑을 엄폐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19년 9월 10일 조사

『한국전쟁사』는 같은 시기에 본부대가 후방에서 따랐다는 이유로 단양 매포국민학교에 주둔했다는 인민군을 사단전방지휘소처럼 주장했다. 하지만 “경계를 소홀히 한 채 깊은 새벽잠에 빠져있는 듯”하다는 목격담은 전방지휘소가 갖고 있는 긴장감과 모순된다. 죽은 사람들이 인민군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여전히 있어 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건에는 국군 10연대 1대대원들이 얼마나 살아 돌아왔는지에도 심각한 의문점이 있는 것 같다. 사단장의 체면 때문에 전멸당할 위험을 안고 병사들이 사지로 내몰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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