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외세 항전의 흐름을 중심으로 본 우리근대사 4

1882년 군인 투쟁의 성격

임오년 군인 투쟁은 부패한 민비 권력을 뒤엎은 반봉건 투쟁이었으며 또한 청일침략자들을 반대한 반침략 투쟁이었다. 당시 민중의 분노는 민비 일당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었다. 민비 일족은 국정을 농간해 원성이 자자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일본과 굴욕적인 수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나라를 망쳐 먹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일본 공사관 공격은 일본의 수탈로 경제적 빈곤이 가중됐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전개했던 명백한 반외세투쟁이었다. 또 군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급료미 마저 주지 않는 부패한 조선 봉건제의 악행을 처단하고,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반봉건 투쟁이었다. 임오 군인 투쟁이 신식군인이었던 별기군과 구식 군인들 사이의 차별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군인들의 애국적인 투쟁에 대한 모욕이다.

임오 군인 투쟁은 일본과 청의 무력간섭과 민비 일당의 매국 배족 책동, 군인들의 정치적 미숙성 등으로 실패 하였으나 근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임오 군인 폭동이 성공하지도 못했으며 결국 외세를 더욱 깊숙이 끌어드린 계기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는 성공한 혁명이 아닌 모든 투쟁은 반동의 명분만 되었다는 잘못된 평가에 불과하다.

▲ 나가사끼로 도망친 일본 공사관 직원, 두 번째 줄 가운데가 하나부사

1982년 군인투쟁의 역사적 의의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임오 군인 투쟁의 역사적 의의는 적지 않다. 첫째로 개항 이후 제멋대로 조선을 수탈하던 일본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은 민비 일당의 사대투항주의적인 태도를 활용하며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거리낌 없이 감행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중은 개항 초기부터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여 투쟁하였으며 1882년 군인들의 과감한 투쟁을 통하여 한성에 들어와 침략을 감행하던 일본 침략자들을 처단하고 쫒아 버렸다. 이를 일본 공사관을 없애치웠다거나 일본인 몇 명을 죽였다는 의미로 협소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는 중대한 의미를 직시해야 한다. 일본은 외세에 아부 굴종하던 민비 일당을 길잡이로 하여 거침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국적 군인들과 민중들은 일본 침략자들에게 결코 굴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침략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때문에 일본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노골화하는데 제동이 걸렸으며 조선의 개화에 대한 <지지자> <동정자>의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도 《공사관의 습격 및 그 전부 혹은 일부의 파괴는 가장 중대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한명, 또는 몇 명의 무관을 살해하였다는 것보다 매우 중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조선교섭자료》일문)

임오군인 투쟁의 의미는 둘째로 민비 일당 등 부패 권력에게 큰 타격을 준 점이다. 부패 무능한 권력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가진 투쟁군인들은 궐기한지 단 이틀 동안에 민비 측근들을 거의 모두 처단하였으며 왕궁까지 점령하였다. 왕궁이 점령당하자, 혼비백산한 고종은 궁여지책으로 《돌이켜 보건데 덕이 없는 내가 나라의 큰 자리를 이어받아 사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최하층 군인들 앞에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종실록》 물론 고종의 사죄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한 기만적인 발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지던 국왕이 최하층 인민들과 군인들에게 위선적으로나마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은 부패한 권력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임오군인 투쟁의 의미는 세 번째로 조선 민중의 견결한 애국심과 투지를 확인하였으며 민족적 및 계급적 각성을 더욱 높여 주었다는 점이다. 일본을 비롯한 외세는 부패 무능한 권력층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나 조선 민중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조선 민중은 날로 노골화되는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웠으며 군인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 군인들이 달려들 때에도 피어린 투쟁을 벌였다. 군인 투쟁 과정에 민중들은 민족적 및 계급적으로 각성되고 단결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폭동초기에는 훈련도감 군인들의 혈육, 친척들이 뭉치기 시작하였다면 투쟁이 점차 일본 침략자들과 부패권력들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확대되자, 서울 안의 각계각층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이러한 투쟁을 통하여 단결하여 투쟁한다면 그 어떤 간악한 침략자와 부패 권력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갖게 되었다. 이처럼 군인투쟁은 그 후 조선민중의 반침략 반봉건투쟁에 커다란 고무적 영향을 주었다. 이에 큰 자극을 받은 개화파 성원들과 그 지지자들은 민족적 위기를 하루빨리 극복하기 위한 근본방도는 나라를 근대화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하는데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882년 군인투쟁의 교훈은 무엇일까?

임오 군인투쟁의 실패는 심각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첫째로, 부패권력에 대해서는 사소한 환상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6월 10일 왕궁을 습격한 투쟁 군인들은 민비를 우두머리로 하는 민씨 일족을 처단하는 것만 강조하였을 뿐 사대 매국 정치의 원흉인 국왕을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왕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군인들은 고종이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고 대원군에게 정사를 맡긴다고 선포하자, 투쟁을 더 확대시키지 않았다. 기만적인 발언으로 상황을 모면한 고종은 곧바로 청나라에 의존하여 군인폭동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으며 1882년 8월 5일에는 정의의 투쟁을 모독하는 포고문도 발표하였다. 고종이 청나라 일본 등 외세보다 민중들을 더 적대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패한 권력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소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되며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보여주었다.

두 번째 교훈은 외세 침략자들을 내쫒기 위해서는 무장을 내려놓지 말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 군인들은 서울에서 일본 관리들을 내쫒은 다음, 무장을 유지한 채 침략자들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였다. 당시 투쟁 군인들 중에는 100명 안팎의 군인들을 통솔하는 지휘관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을 이용하여 대오 안에 정연한 군사조직과 지휘체계를 세우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군대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만 닥쳐올 외세의 침략무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투쟁군은 대원군에게 환상을 가진 나머지 스스로 무기를 놓고 투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침략자들이 침입하였을 때 맨주먹으로 분산된 상태에서 적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임오년 군인 투쟁은 무장한 적은 무장을 들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심각한 교훈을 남겨놓았다.

▲ 임오군란 진압 후 다시 제물포로 진입하는 일본

물론 군인들이 무장을 놓지 않았을 때, 청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론을 펼 수 있다. 그러나 투쟁군인들이 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면 그리 쉽게 몰살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시간을 벌면서 전체 조선 민중 항쟁의 기폭제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정세가 아니었다. 민중에게 왕궁이 장악되고 민비가 쫓겨난 상황, 그리고 민중들의 반외세 정서가 엄청나게 높았던 상황이야 말로 조선이 일제의 강점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있는 자체 준비의 계기는 아니었을까? 이후 조선은 군인들의 투쟁 직전에 맺은 《조미통상조약》에 이어 청나라와의 《조청상민수륙장정》 일본과의 《제물포조약》 영국, 프랑스와의 통상조약 등 외세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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