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외세 항전의 흐름을 중심으로 본 우리근대사 3편

과거사들이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면서,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고민도 깊어진다. 4.3항쟁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4.3항쟁이 왜 발발했는지, 투쟁의 성격은 무엇인지는 정립되지 않고, ‘민간인 학살’이라는 차원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근대사에서도 이런 문제는 너무 많다. 예컨대 임오군란이 그저 쿠데타일 뿐이고 성격을 규정하지 못한데서야 근대가 제대로 규명될 수 있을까! 임오년 군인폭동을 세 번에 걸쳐 쓰면서 이 투쟁의 성격과 의미를 판단해보려고 한다.

1. 일본의 조선침략에 큰 타격을 준 1882년 군인들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
2. 1882년 청나라의 조선침략과 대원군 납치의 진상
3. 임오년 군인들의 투쟁이 외세 개입의 명분에 불과했을까?

 

◎ 군인들의 애국적 투쟁을 자신의 권력복귀에만 활용한 대원군

투쟁에 나섰던 군인들은 대원군이 집권하자, 대원군을 믿고 더 이상 투쟁을 확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군인들 투쟁 덕분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의 행적은 어땠을까? 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제일 먼저 민비의 죽음부터 선포하고 민가일당의 재집권을 막는 일부터 착수한다.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에 대처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대신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귀중한 시간을 민비 장례문제와 같은 사기극에 써버린 것은 조선과 그 자신의 운명을 망쳐버린 중대한 실수였다.

대원군은 일본의 조선침략이 그 정도에서 끝난다고 생각했을까? 일본이 즉각 반격할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을까? 하나부사가 도망간 지 불과 20일 만에 일본군과 함께 제물포에 다시 왔을 때에도 대원군은 빈접관으로 윤성진을 임명하고 일본군의 서울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민비일파의 조영하는 일본에게 ‘국왕이 정권에서 밀려나고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니 1개 대대 정도의 군대로 한성에 들어오라’고 부추기는 매국행위를 감행하였다.

대원군은 무위영, 장어영과 별기군을 없애고, 5군영을 복구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을 없애고 삼군부를 설치, 측근들을 대거 기용했다. 아들 이재면에게 훈련대장과 호조판서, 선혜청 당상까지 겸직시키며 병권과 재정을 장악하였다. 위정척사운동으로 투옥된 이만손 등을 포함하여 죄수 887명을 석방하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일본과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무력침략 대책을 세우느라 바빴다. 

◎ 청나라와 일본, 조선으로 군사파견하다. 일촉즉발의 전쟁정세! 

영국 배로 목숨을 부지한 하나부사 일행은 6월 15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일본정부에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고 상당 규모의 무력을 조선에 파견할 것을 제기하였다. 일본은 16∽17일 내각회의에서 ‘부산과 원산에 있는 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밑에 군함 파견과 무력시위를 결정하였다. 6월 22일 외무성 서기관 곤도가 군함 2척에 150명의 침략군을 이끌고 선발대로 파견되고, 6월 29일 전권위원 하나부사가 군함 4척, 수송선 3척에 1개 대대 1500명을 이끌고 제물포에 들어왔다. 군인폭동 발발 17일 만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무척 빠른 대응이었다.

18일 주일 청나라 공사 여서창은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이 소식을 알게 되자 본국에 ‘일본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니 청나라도 군함을 파견하고 사태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타전하였다. 19일 중국 천진에서 머물던 김윤식은 이 소식을 듣고 해관도로 가서 ‘청나라가 군함 몇 척과 육군 1000명을 싣고 일본보다 앞서 조선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원군이 극단적인 반일정책을 펼 경우 일본이 난을 평정한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공 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인데 그는 일본 침략은 걱정하면서 청나라는 외세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일본은 청에 ‘자주국’인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 문제는 <강화도 조약>에 의거하여 해결할 문제이기 때문에 청의 개입은 필요 없다는 요청서를 보냈다. 그러나 청은 조선은 자신의 속국으로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일본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청은 군함과 마건충을 파견하여 긴장된 조일관계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일본은 거절하였다. 

당시 청의 임시 북양대신 장수성은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과 도원 마건충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마침 천진에 있던 어윤중이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27일 인천에 온 마건충은 어윤중을 보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28일,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윤중은 군인폭동의 배후가 대원군이며 그가 건재하면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군인폭동을 진압하려면 흥선대원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마건충도 같은 판단이었다. 마건충이 인천에 온 이틀 후인 29일, 하나부사와 1500여명의 일본군이 도착했다. 청나라가 일본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3000명의 병력파견을 요청하였다. 

제물포에 도착한 하나부사는 7월 2일에 1개 중대 규모의 군을 끌고 한성에 왔다. 그는 7월 7일 국왕을 직접 만나 군인폭동 <배상> 조건을 담은 책자를 주고 사흘 이내로 화답할 것을 강요했다. 폭동 주동자를 처벌할 것,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5만 원의 위로금을 줄 것, 일본이 받은 손해 일체를 배상하고, 일본군 1개 대대를 주둔하도록 할 것, 원산, 인천 등을 개방할 것 등의 최후통첩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바로 다음 날 청나라와의 비밀 회담에 들어갔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온 조건에서 청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해야 할지, 아니면 청과의 타협의 여지는 있는지 등에 대한 모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7월 3일 제물포에서 청 마건충과 일본 다께조에의 비밀 회담이 열렸다. 청은 일본 군대가 조선을 점령할 경우, 조선에서의 청의 영향력이 제거될 것을 걱정하였으며, 일본 역시 청과 정면충돌을 각오하고 전면전을 벌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기 싸움을 하면서도 공모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원군을 제거하는데 선차적 의의를 부여하고, 결탁을 모색하는 것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7월 7일 오장경을 총사령관으로 3000명의 군대가 정여창의 북양해군 함선 5척에 분승하고 남양에 도착했다.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갈등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일촉즉발의 긴장이 흘렀다.

◎ 청일의 야합을 알지 못하는 대원군의 어리석음  

일본 정부가 국왕에게 직접 준 강도적인 요구서를 알게 된 대원군 정권은 다음날 대신회의에서 일본의 요구조건을 토의하였다. 이때 모든 각료들은 일본의 무례와 요구조건에 대해 격분을 금치 못하였으며 대원군은 전국의 병력을 모아 일본의 무력침공에 맞설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청에 환상이 있던 대원군은 남양에 있던 마건충에게 서신을 보냈다. 일본의 강도적 요구에 분개하면서 마건충이 한성에 와 조일문제를 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성록》
중재요청을 받은 마건충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본을 견제하면서도 조선에서 저들의 지위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이었다. 

마건충은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관료들을 만나보고 대원군 정부의 강경한 자세로 보아 일본과의 대결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즉 일본과 조선의 정면대결을 피하여 청군의 손실을 막으면서도 청나라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원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일본은 <배상>을 요구한 지 3일이 지나자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고 제물포에서 무력으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7월 11일 마건충은 급히 서둘러 인천으로 하나부사 일행을 찾아가 일본의 요구조건을 조선 측이 수락하도록 힘쓰겠다는 것을 시사하며 양측의 조정자로 나섰다. 《명치15년 조선사변과 하나부사》

“조선국왕 및 그 척신들은 일본과의 의논을 희망하고 있지만, 현재 정권을 장악한 사람은 국왕이 아니라 대원군이다. … 생각하건데 오늘의 교섭에 대한 조선국의 대표자는 집정이 아니라 국왕이어야 … 나의 오늘의 예방은 하나부사 공사가 조선의 정세를 충분이 요해함이 없이 잘못해서 나라의 주인이 아닌 사람과 의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 최근 청은 육군병을 약간 명 파견하였지만, 단순히 난당(군인폭동자)을 징벌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부사는 이 말이 ‘대원군을 끌어내려 국왕에게 정권반환을 기도한다는 의미’로 정확히 알아차리고 다음 날 마건충에게 ‘조선의 전권 대신과 협상하는 데에 기꺼이 응하겠다’고 하였다. 대원군정권을 전복하고 군인폭동을 진압하자는 청나라의 제의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일본은 언젠가 불가피하게 대결해야 할 청나라였지만 이길 승산이 설 때까지 당면 충돌을 피하면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대원군 정부와 군인폭동을 말살하고 일본의 침략적 지반을 확대할 수 있으면 일거양득이었다. 청나라 역시 청일관계를 당장 악화시키는 것보다 청이 주동적으로 조일관계를 조정하고, 폭동을 진압하며 대원군 정권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조선에서의 청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마건충, 오장경, 정여창은 7월 13일 대원군을 연회에 초대한다는 구실로 청군의 병영으로 유인했다. 이어 대원군 측근들을 한 명씩 따돌리고 홀로 남은 대원군을 납치해서 천진으로 압송하여 보정부에 감금하였다. 이는 대원군 정권의 붕괴를 의미하였으며 군인폭동자들에 대한 청군의 무자비한 군사적 공격을 단행하는 계기로 되었다. 청군은 조선왕궁을 점거하고 대원군 세력을 숙청하는데 달라붙었다. 훈련대장 이재면(대원군의 맏아들)을 체포하여 남별궁에 감금하였으며 무위대장 이경하, 장어대장 신정희 등 삼군부의 총수들을 유배형에 처함으로써 대원군 정부의 군부실권자들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대원군 일파로 보이는 성원들을 투옥하여 하룻밤 사이에 대원군 정부를 완전히 전복해버렸다. 

▲ 대원군을 납치한 청나라 군함 및 감금되었던 천진보정부, 천진에 3년동안 감금된 대원군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특히 이태원 왕십리 일대에서는 청나라 군사에 대한 무력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공포를 느낀 청군은 원세개와 오장경의 지휘 하에 7월 15일∽16일에 걸쳐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우리 군인들은 공격해오는 적들을 맞받아 용감하게 육박전을 벌렸으며 싸움 끝에 부상당하거나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마건충 행삼록》

일본인들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7월 16일 … 폭도는 일제히 저항하였다, … 청군은 일시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대포까지 동원하였으나 폭도는 계속 저항하여 백병전까지 전개되었다. … 강화 이래 용감성을 발휘한 조선군이 만일 무기와 지휘자를 얻었다면 청군은 일대 난관에 처했을 것이다”(《근대조선사》 일문). 7월 17일 청군은 체포한 150여명 중 10여명을 사형에 처했으며 8월 24일에는 김장손, 유춘만 등 지휘부를 처형하였다. 

청일의 무력간섭에 의하여 다시 권력을 잡은 민비정권은 악독한 반민중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극단적 사대매국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은 더욱더 외세의 각축장으로 전변되어 갔다. 8월 3일 민비정권은 1871년 이래 반침략투쟁의 상징으로 되어온 척화비를 전국각지에서 모조리 뽑아버렸다. 또 7월 17일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청나라는 조선 내정에 제멋대로 간섭해 나섰다. 무위영과 금위영을 개조하여 군대를 저들의 통제 밑에 두게 하였다. 또 왕궁을 점거하고 있으면서 국사와 관련되는 모든 일에 일일이 간섭해 나섰다. 오장경은 조일 두 나라 사이의 회담을 중재하면서 조선정부를 감시하고 서구 열강들과의 강도적인 예속조약을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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