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금강산미학의 탄생(1)

올해는 금강산 관광 시작 20년째, 중단 10년째다. 4차 남북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중의 하나가 개성공단 재개와 더불어 금강산관광 재개문제이다. 4.27판문점선언과 9월평양선언으로 세기의 기적을 이룩한 2018년에 금강산 관광에 대한 대중적 열망과 국제적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 글은 이시우 사진작가가 지난 12월 22일, 서울 필동 갤러리 '꽃피다'에서 진행되고 있는 남북사진전 <통일의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통해 강연한 ‘금강산통일미학을 위하여’의 일부이다. 작가의 동의를 구해, “신라불교편”을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독자들이 민족의 명산 금강산에 대해 미학적으로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신라시대 금강산미학의 탄생
1. 금강산의 탄생
2. 국가불교

3. 산천만다라(진표, 왕건, 금강산만다라)
4. 불교를 통한 금강산미학비판

 

▲ 12월 22일 '통일의 꽃이 피었습니다" 남북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필동 갤러리 '꽃피다'에서 "금강산통일미학을 위하여"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필자

1. 금강산의 탄생

삼국사기 제사조에는 선덕왕4년(783)에 사직단을 세우고 명산대천에 제사지내는 예전(禮典)을 만들었다고 하였다.1)

주1) <三國史記>卷32, 雜志, 祭祀. “至第三十七代宣德王 立社稷壇 又見於祀典 皆[祭]境內山川 而不及天地者”; 小杞(小祀):<霜岳>[高城郡], <雪岳>[䢘城郡], <花岳>[斤平郡], <鉗岳>[七重城], <負兒岳>[北漢山州], <月奈岳>[月奈郡], <武珍岳>[武珍州], <西多山>[伯海郡 難知可縣], <月兄山>[奈吐郡 沙熱伊縣(沙勳伊島)], <道西城>[萬弩郡], <冬老岳>[進禮郡 丹川縣], <竹旨>[及伐山郡], <熊只>[屈自郡 熊只縣], <岳髮>[一云<髮岳>, 于珍也郡], <于火>[生西良郡 于大縣(于火縣)], <三岐>[大城郡], <卉黃>[牟梁], <高墟>[沙梁], <嘉阿岳>[三年山郡], <波只谷原岳>[阿支縣], <非藥岳>[退火郡], <加林城>[加林縣, 一本有<靈嵒山><虞風山>, 無<加林城>], <加良岳>[菁州], <西述>[牟梁]; 安鼎福, <東史綱目> 第五上, 宣德王 癸亥四年春正月; 이상균, 「金剛山名의 역사적 淵源과 의미」, <남명학연구>, (2017.9), p.294

제사에는 대사와 중사와 소사가 있었는데 이중 소사는 가장 작은 규모의 제사였으며 24개의 소사지 중 하나로 고성군의 상악(霜岳)이 등장한다. 즉 고성군 상악산은 수성군 설악산등과 더불어 통일신라 이전부터 국가의 공식명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악산의 이름은 향후 금강산으로 변경되게 된다. 이 명칭의 변경에는 인도와 중국을 아우르는 세계불교문명의 신라식 수렴과 신라불교문명의 세계적 발산이라는 사상투쟁이 수반되었다.
60권 화엄경에는 담무갈(曇無竭)보살이 바다한가운데에 상주한다는 지달(枳怛)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80권 화엄경2)의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32권에는 보살들이 머문다는 23곳의 산 이름 가운데 여섯 번째로 동해의 금강산(金剛山)이 등장한다.

주2) <화엄경>은 기원 후 「십지품」「입법계품」 같은 단품경이 우전국(현재의 신장 위구르지역)에 전래되었고, 우전국에서는 그것들을 조합하고 보완하여 60권<화엄경>과 80권<화엄경>으로 편성하였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359~429)가 421년 번역한 60권 <화엄경>이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692년에 우전국에 사신을 보내어 범본 80권 <화엄경>을 수입하였고 직접 역출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우전국의 왕은 33대 위지경(尉遲璥.691년 즉위)이었다. 무측천의 사신들은 마침내 695년에 경과 실차난타를 앞세워 장안으로 돌아왔다. 경은 곧 황제의 절대적인 지지로 역경이 시작되었다. 671년에 광주를 통해 천축에 가서 공부한 후,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온 의정도 이 해에 실차난타와 더불어 역경장에 투입되었으며, 현수대사 법장도 한문으로 옮겨 쓰는 일을 맡았다. 마침내 699년에 완역, 출간되었다.

이와 별도로 신라의 천축구법승 원표도 80권 <화엄경>을 다른 경로로 입수하여 한역하였으며, (계미향, 「천축구법승(天竺求法僧)의 행적(行蹟)과 사상 연구-7~8세기 혜륜(慧輪)·원표(元表)·혜초(慧超)를 중심으로-」, <한국불교학>75권, (2015), pp.204-205참조) 695년 원측도 당나라에서 화엄경한역을 마친 것으로 되어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6권, p.72) 

우리나라 화엄계는 의상의 영향력이 컸던 탓인지, 삼국시대 이래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60권 화엄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화엄사 석경 역시 60권 화엄이다. 기록으로 보이는 80권 화엄의 초전은 승전이 당 유학에서 귀국할 때, 법장이 의상에게 전하는 선물의 한 가지로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 국보 제196호인 <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호암미술관 소장)은 황룡사의 연기법사가 부친과 중생의 성불을 위해 754년 8월 1일에 사경을 시작하여 755년 2월 14일에 완성했다고 한다. 80권 화엄관련 유물로 현존 최고의 것이며, 또한 사경제작법과 그에 따른 의식절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의천이 징관(청량)을 화엄의 정통으로 숭상하고 징관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송의 승려에게 선물하고 봉선사 익승에게 화엄대경청량대소를 주어 유통하게한 것은 고려에서 신역 화엄경, 즉 80권 화엄경이 고려초기에 널리 읽혔음을 말해준다.(<大覺國師文集>권1,「新集圓宗文類序」권11, 「與大宋善聰法師狀」권19, 詩 言志; 김창현, 「고려시대 금강산과 그 불교신앙」, <지역과 역사>제31호, (2012.10), p.208인용). 그러나 실제 한반도에서 80권 화엄이 전면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 부터였다. 호남지방의 대표적 학승 백암 성총이 1692년에 선암사 창파각에서 화엄대회를 열어 화엄을 널리 홍양하면서 한국화엄학계는 비로소 80권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계미향, 위 글, pp.198-199참조)

바다가운데의 금강산에 법기보살(法起菩薩)이 상주하며 설법한다고 하니 지달은 곧 금강산이고, 담무갈보살은 곧 법기보살이다.3) 

주3) 四大海中有菩薩住處 名枳怛 過去諸菩薩常於中住 彼現有菩薩 名曇無竭 有萬二千菩薩眷屬 常爲說法 (60권 화엄경 菩薩住處品) ; 海中有處 名金剛山 從昔已來 諸菩薩衆 於中止住 現有菩薩 名曰法起 與其眷屬 諸菩薩衆 千二百人 俱常在其中 而演說法 (80권 화엄경 諸菩薩住處品)

담무갈은 범어이고 그것을 의역한 것이 법기이다.4)

주4) 담무갈(曇無竭)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Dharmodgata Bodisattva로 法盛‧法勇‧法上‧法起등으로 의역한다. 8천게송계통과 2만5천게송계통 반야경의 맨마지막 장에 상제보살(Sadāprarudita Bodhisattva, 常悲, 普慈보살이라고도 함)의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대반야경>에서 제1회의 마지막으로 옮겨져 있는데 이것은 설화가 없는 반야경 안에서 주목되는 사실이다.

그는 옛날에 온 마음(一心)으로 반야바라밀을 추구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동쪽으로 가서 찾아라. 그러면 그 가르침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가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번민하여 울부짖으며 더욱더 강렬하게 추구하자 공중에서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며 ‘멀리 동쪽에 향성(香城,Gandhavatī)이라는 도성이 있다. 거기는 일곱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고 황금으로 뒤덮여 있고 보배로운 나무가 늘어서 있고 연못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 있고, 사람들에게 번민이 없는 곳이다. 이 도성 중앙에 담무갈 보살의 낙원이 있다. 거기에서 보살은 많은 여자관리들과 함께 즐기면서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그곳을 찾아 가거라’라고 가르쳤다.
상제는 담무갈보살을 생각하며 그때마다 삼매에 들면 부처님은 그를 몹시 칭찬하고 돌연 모습을 감춘다. 그는 삼매에서 나와 ‘부처님은 어디로 떠나가셨을 것이다’라고 번민하며 점점 절망하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반드시 담무갈보살을 만나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어디가서 자기 몸의 일부를 팔아 이 보살에게 공양할 돈을 마련코자 하였다. 그것을 본 장자의 딸이 감격하여 수많은 선물을 지참하고 마차 5백대와 시녀 5백명을 거느리고 와서 상제와 함께 동쪽으로 가게 된다. 마침내 그들은 향성에 도달하여 보살에게 공양하고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상제보살은 어떤 부처님의 전신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보살이라는 것은 현재하는 부처님의 인격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과 붓다의 관념은 분리되지 않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제보살은 부처님으로부터 독립된 인격보살이다. 그는 현재에도 대뇌음불(大雷音佛)아래서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다고 설해진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이상으로서 국토의 교주도 담무갈이라는 보살이지 붓다는 아니었다. 붓다의 모습이 사라질 때 상제보살의 한탄은 붓다숭배, 말하자면 불승(佛乘, Buddhayāna)에 의존하는 실천으로부터 독립해 보살의 주체적 실천의 길(菩薩乘)을 확립하려는 초기대승의 엄격한 입장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시즈타니 마사오, 스구로 신죠, 문을식 역, [대승불교3권 초기대승경전], (행복한 세상, 2013), p.42-43)

다만 담무갈보살은 만이천 권속을, 법기보살은 천이백 권속을 거느린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역 화엄경의 어디에도 금강산이 바다한가운데 있다고 했을 뿐 신라로 특정하지는 않았다. 금강산을 신라로 특정한 것은 징관(澄觀)이다. 현수의 화엄종통을 이은 징관은 당 덕종 정원(貞元)3년(787)에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권47에서 금강산에 이런 주석을 달고 있다.

“동해의 동쪽 가까이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금강이라고 한다. 비록 전체가 금은 아니지만 위 아래 사방 둘레 내지 산간에 흐르는 물속 모래 속에 모두 금이 있으므로 멀리서 바라보고는 곧 전체가 금이라고 말한다. 또 해동인(海東人)이 예부터 전하기를 이 산에서 가끔 성인이 출현한다고 한다.”5)

징관이 금강산과 해동인을 연결시킴으로써 비로소 신라의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상주처로 특정되었다. 징관의 이 주석서가 신라에 전해진 것은 799년의 일이다.6) 따라서 신라의 금강산이란 이름이 불교문명권에서 공인된 것을 확인한 것은 799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에 와본 적도 없는 징관이 무슨 연유로 금강을 신라의 산으로 특정할 수 있었을까? 최완수는 의상대사가 상악산을 금강산으로 확정하는데 현수대사의 동의를 구했을 가능성을 주장한다.7) 

주5)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서울: 대원사, 1999), p.ⅲ
주6) <三國遺事>卷4, 「勝詮髑髏」, 大正藏49, p.1009a “後分華嚴經觀師義疏, 言還流演. 時當貞元己卯.”
주7)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서울: 대원사, 1999), p.ⅲ

중국의 법장과 한국의 의상은 화엄 제2조 지엄(智儼,602~668)에게 화엄학을 배운 뛰어난 두 제자이다. 의상(義湘,625~702)은 661년부터 670년까지 9년 동안 당에 유학한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다.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이며 이 종파의 교리를 집대성하였다. 최치원에 의해 기록된 의상에게 보낸 법장의 편지에서 의상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애틋함을 읽을 수 있다. 697~700년경의 일로 추정되는 의상에게 보낸 법장의 서한과 함께 법장은 의상에게 60화엄의 주석서인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2권을 미완인 채로 보내어 검토해줄 것을 바랐다. <화엄경탐현기>는 정교한 주석으로 중국 화엄교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헌으로 여겨지고 있다.8) 이같은 소통과정에서 의상이 상악산을 금강산으로 비정하고 현수법장에게 동의를 구했고 징관에게 전수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이어지는 기록에는 이와 관련, 의상이 법장에게 답장을 보낸 기록은 없다.9) 

주8) 승전은 법장이 의상에게 보내는 서간과 법장의 저술을 가져온 화엄승이다. 법장이 따로 봉한 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탐현기(探玄記)>20권, 그 중 두 권은 미완성이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형의장(玄義章)>등 잡의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1권, <기신소(起信疏)>2권, <십이문소(十二門疏)>1권, <법계무차별논소(法界無差別論疏)>1권을 모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초사(抄寫)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지난 번 신라 스님 효충(孝忠)이 금 9푼을 전해주면서 상인(上人)이 부친 것이라고 하니, 비록 서신은 받지 못했지만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서국(西國)의 군지관(軍持灌-중이 가지고 다니는 물병과 대야로 밀교식 관정을 위한 법구로 추정된다-필자주)하나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살펴 받아주시기 원하며, 삼가 아뢰옵니다”.(<삼국유사> 권4 義解, 제5 勝詮髑髏).

주9) “의상은 법장의 이 글을 대하자 마치 지엄의 가르침을 친히 듣는 것 같았다. 수십일 동안을 탐구 검토하여 제자들에게 주었으며 이 글을 널리 연술시켰다.”(<삼국유사> 권4 義解, 제5 勝詮髑髏).

한편 실차난타와 별개로 80권 화엄경을 번역했던 신라승 원표는 정작 신라 귀국 후 금강산신앙이 아니라 장흥에 천관보살의 상주처를 정하고 천관산신앙에 매진한다. 천관보살신앙은 이미 중국 복건성 천관산에서 그가 일으킨 신앙이었으므로 신라만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또 한명의 신역화엄경 번역자인 원측 역시 신라인이었지만 그 역시 금강산을 신라로 특정하진 않았다. 따라서 징관이 법기보살의 상주처로 해동 금강산을 특정하기까지의 과정은 연구과제로 남는다. 금강산이 자생적 작명이 아닌 국제불교문명권으로부터 공인된 명칭이란 점, 국제적 공인을 받은 산으로서는 오대산, 낙가산, 천관산등이 있지만 이들 명칭은 이미 인도와 중국에서도 공통으로 사용되는 이름인데 비해서 금강산은 오직 한반도에서만 사용되는 이름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이시우 사진가의 강연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사진 : 조원호 통일의 길 사무총장 제공]

2. 국가불교

의상이 당나라의 신라침략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신라로 귀국하며 정치군사적 준비와 함께 사상적 동원체계의 준비에 들어간다. 보편철학으로서의 불교를 국가불교라는 특수철학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중 살생유택은 불살생을 전제하나 경우에 따라 살생을 택하도록 한다. 원효도 자비살생을 말한다. 그러나 언제 어떤 경우에 어떤 인연하에서 살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밀한 방법론이 없다. 불살생과 자비살생은 분명 모순이며 군대와 화랑에게 칼을 들어 전쟁을 독려해야하는 정부와, 정부에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야하는 국가불교로서는 현실적 도전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상은 밀교승 명랑과 함께 사천왕사의 건립을 주도하고 부석사를 세우며 의상불교의 걸작인 <화엄일승법계도>가 발표된다. 화엄의 “일즉다 다즉일(一則多 多則一)” 즉 “하나는 전체이며 전체는 하나이다”는 백성을 왕이나 황제 중심으로 통일시키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위난 앞에서 더 구체적으로 응답한 사상은 밀교였다. 7세기 후반의 국가불교 활동을 주도한 것은 밀교승려들이었다. 밀교는 병치료를 중심으로 한 현실적 재난구제의 기능으로 인해 불교의 초기수용이래 전통신앙의 기능을 대신하여 불교가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밀교 승려인 명랑(明朗)은 당의 침공을 맞아 문두루비밀법을 시행했고 결과적으로 당군이 물러났으며, 새로 창건한 사천왕사에 도량을 개설하여 당의 침공에 지속적으로 대비하였다. 이 설화적 사실은 명랑이 <관정경灌頂經>107권 「복마봉인대신주경伏魔封印大神呪經」에 의거하여 위급한 액난을 만나면 오방신(五方神)을 만들어 문두루법 곧 신인법(神印法)을 행한다는 비밀법으로 국가적 위난을 해소하고,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천왕 호국사상과 대승유가행이 결합한 밀교행법을 실천하였음을 말한다.11) 

주10) 관정이란 정수리에 물을 붇는 의식이다. 원래 인도에서 국왕이 즉위할 때 四大海의 물을 길어다 제왕의 머리에 부음으로써 四海장악을 의미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밀교에서 여래의 五智를 상징하는 다섯 병의 물을 이용해 비밀법문의 印可傳授, 師資面授, 밀교의 傳燈을 계승하는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박광연, 「진표(眞表)의 점찰법회(占察法會)와 밀교(密敎)수용」, <한국사상사학>26권, (2006), p.20)

주11) 정병삼,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사상적 경향」, <불교학연구>제9호, (2004.12), p.163

호국불교는 신라만의 독창적사상은 아니었다. 인도불교이후 불교를 수입한 나라들에서는 공통적으로 호국불교가 주도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인 북조에서는 왕즉불(王卽佛), 즉 ‘왕이 곧 부처다’라는 신앙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는데 이에따라 호국불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신라에서 호국불교를 처음 펼친 혜량(惠亮)은 북조의 불교가 직접영향을 미친 고구려의 승려였으며 호국불교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원광(圓光) 역시 북조의 불교문화권에서 유학하였다.12)
당 현종(712∼756재위)이 개원 2년(714) 정월에 3,000여 명의 승려를 환속과 사원금지령을 내리고, 7월에는 관료와 불교, 도교인들의 교제 및 숙식 금지, 일반인들의 불상주조와 사경금지 및 판매금지 등을 내리는 등 불교교단에 대해 많은 통제를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716년 밀교승 선무외가 입당하자 그의 활동을 지원하였고, 선무외의 제자 일행(一行)을 중임하는 등 새롭게 전래된 밀교에 대해 호의를 보였다. 강력하게 국가종교화를 의도했던 현종이 밀교를 국가종교로서 후원하였다.13)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 따라 의식이 성장하던 통일기 신라 일반민들은 보살사상에 입각한 보살계와14) 위와 같은 불성론 수용으로 인간의 본질적 평등성을 주장하는 인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업설과 윤회사상이 아직 현실의 신분차별을 완고하게 지지하고 있었지만 불교 교리의 이해에 따른 평등관의 수용은 새로운 의식의 변화였고, 이는 불교계 전반의 사회적 분위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으므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생각은 7세기 후반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열반경과 대승기신론을 바탕으로 이를 주장한 원효를 비롯하여, 중국 법상종과 달리 일천제의 성불을 주장한 신라 유식사상가들과 모든 사람에게 성불 가능성을 개방한 대부분의 정토사상가들에게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통합하여 동족의식을 강조하고 전국을 일원적으로 편제하여 지방민에게 주어지던 차별을 해소하고자 시행되었던 중대 위민정책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성불을 개방한 불성론의 진전은 8세기 이후 전개된 불성을 자각하는 선종의 수용과 즉신성불을 강조하는 후기밀교의 수용과도 상통하는 것으로서, 이들 새로운 사상수용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15)

▲ 강연 후 기념사진[사진 : 조원호 통일의 길 사무총장 제공]

호국불교는 호법불교와 세계불교로 즉 특수사상에서 보편사상으로 발전될 것을 요구받았다.  이는 대체로 호국에서 호법으로의 이행과정이었다. 호국경전의 성립은 시대가 흐를수록 강화되는 왕권과 왕권에 의한 불교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에 대한 대응 또는 방편으로 볼 수 있다. 좋은 예로 <인왕경>의 마지막 8.「촉루품(囑累品)」은 그러한 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무대는 당시 열여섯 왕들이 붓다로부터 ‘미래의 세상 일을 말씀하심을 듣고 눈물 흘리며 슬피 울었다’는 것으로 ‘호국을 위한 호법’의 당위성을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장식하고 있다.16) 호국의 논리는 종교적ㆍ윤리적 가르침으로써 왕권에 대한 견제장치임이 시사되어 있다. 즉 인도를 비롯하여 불교권 국가들의 역사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왕권의 폭압에 대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교단이 취한 불교보호 장치인 것이다. 이처럼 호국경전의 성립은 불교탄압과 박해에 대한 고도의 ‘종교 실용주의’적인 처방 차원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목적은 호법의 수단으로 호국이지, 호국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17)

주12) 김상태, 「7세기 호국호법삼부경에 의한 신라호국가람과 동아시아불교건축비교-2탑식가람의 전개를 중심으로」, <동북아문화연구>제13집 (2007.10), p.125
주13) 滋野井恬, <唐代佛敎史論>, (平樂寺書店, 1973), pp.10-11
주14) 정병삼,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사상적 경향」, <불교학연구>제9호, (2004.12), p.164
주15) 정병삼,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사상적 경향」, <불교학연구>제9호, (2004.12), p.165
주16) 한글대장경 <守護國界主陀羅尼經外>, (서울: 동국역경원, 2009), pp.530-532.; 조준호, 「경전상에 나타난 호국불교의 검토」, <대각사상>제17집, (2012.06), p.34
주17) 조준호, 「경전상에 나타난 호국불교의 검토」, <대각사상>제17집, (2012.06), p.35

호국에서 호법으로의 이행과정에서 명랑의 밀교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같은 밀교승인 혜공과의 관계에서 비교된다.
명랑은 금강사를 세우면서 혜공(惠空)과 관계를 맺었다. 금강사는 신인종(神印宗)에 속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혜공은 당시 대중불교를 이끌던 승려로서 정토신앙과 연관된 그의 신이함은 기층민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층민과 친근했던 혜공의 행적은 진골출신인 명랑과 거리가 있지만,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서로 상치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혜공이 낙성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명랑의 밀교주술에 감응한 후에 참여하는 모습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서로 대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혜공의 신이한 신앙은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했으나, 명랑은 정토신앙을 포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명랑의 문두루법은 호국신앙이 강조되면서 일반 민과 거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18) 명랑 이후 신인종을 이끌었던 안혜(安惠)와 낭융(郎融)에 대한 행적이 소략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신라중대 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명랑과 동시대에 활동한 의상의 화엄종이 신라불교계를 주도해나간 것과 대비를 이룬다. 신라중대에는 아미타 정토신앙이 크게 유행했는데, 명랑은 이것을 포용하지 못하고 호국신앙을 강조하는데 그쳤다.19) 그렇기 때문에 명랑 이후의 신인종은 강하게 전승되지 못하였고, 신라말 고려 초의 변혁기에 들어서야 다시 호국신앙을 강조되면서 왕건과 연결될 수 있었다.20) 

주18) 김연민, 「新羅 文武王代 明朗의 密教思想과 의미」, <한국학논총>제30집, (2008), p.34

주19) 신라 통일 이후 唐 정토교의 영향으로 아미타신앙이 확산되면서 염불을 통한 정토왕생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경덕왕 무렵의 정토신앙은 미타정토신앙과 미륵정토신앙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고, 亡父, 亡母의 정토왕생을 위해 불상을 조성한다거나, 정토왕생을 비는 제를 올리거나 하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박광연, 「진표(眞表)의 점찰법회(占察法會)와 밀교(密敎)수용」, <한국사상사학>26권, (2006), p.26)

주20) 김연민, 「新羅 文武王代 明朗의 密教思想과 의미」, <한국학논총>제30집, (2008), p.35

호국에서 호법, 특수종교에서 보편종교로의 이행과정에서 두가지 사례가 주목된다. 
첫째로는 중국 화엄종의 3조인 법장과 해동화엄의 초조인 의상간 편지를 통한 사상교류이다. 현수법사 법장은 호국불사를 일으켜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 화엄을 중국불교의 주류로 만든 인물이었다.21) 그리고 의상은 당의 대신라전쟁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귀국하여 호국불교를 일으켰던 대표적 호국불교승려이다. 그러나 나?당전쟁후 30여년간 나ㆍ당관계의 소강상태 속에서도 둘 사이에는 정중하고 진지한 사상교류가 유지되었으며 화엄사상을 전파하는 데 긴밀히 협력하였다. 이는 호국과 호법, 특수와 보편, 국가와 국제가 상호 이행,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21) 중국 화엄의 3조 법장은 697년에 십일면관음을 주존으로 하여 거란을 물리치는 목적의 호국법사(護國法事)를 열었다. 수일 후 거란군이 물러나자 측천무후는 관음의 신변(神變)을 크게 기뻐하여 연호를 신공원년(神功元年)으로 바꾸었다. 11면관음의 호국기능 의궤를 이용한 것이다. 비로자나를 주존으로 삼지 않고 십일면관음을 주존으로 한 그것은 화엄의 관법과 밀교의 의궤가 결합한 화엄밀법(華嚴密法)의 성격이다.
법장은 수공(垂拱)3년(687)에도 서명사(西明寺)에 단을 세우고 비(雨)를 기원하여 감응을 일으킨 바 있다. 법장은 측천무후의 후원 아래 화엄을 중국 불교의 주류로 확립하였다.(이경화, 「석굴암 십일면관음의 교학적 해석」, <불교미술사학>제17집, (2014.03), p.82)

둘째로는 소위 위경의 편찬이다. 7세기 중엽 신라불교의 사상적 지향을 보여주는 한 산물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과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의 편찬이다. 경과 율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붙일 수 있다. 경에 대한 이론과 해석에 대해서는 론과 소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금강삼매경>은 대안(大安)을 비롯한 대중교화에 뜻을 둔 일군의 승려로 추정되는 이들이 당대 교학을 종합하여 반야공관사상을 주장하는 경전을 만들어낸 것이다.22)

주22) 南東信, 「新羅 中代佛敎의 成立에 관한 硏究」, <韓國文化>제21호, (서울: 서울대한국문화연구소, 1998), pp.125-129; 
起信論을 바탕으로 一心과 眞如門 및 生滅門 이문의 긴밀한 작용과 體, 相, 用 삼대의 작용을 분석한 원효의 一心思想은 신라 불교사상의 정화였다.
일심 곧 중생의 마음에 주목한 원효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중관과 유식이 중생의 마음을 대상으로 삼아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에서 출발하여 起信論이 一心 二門 三大의 사상으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고 해석한 것이다.
원효의 사상은 이후 신라교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법장 등 중국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의 교학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7세기 말 이후 신라 교학의 굳건한 한 틀을 원효사상은 이룩해 놓았던 것이다.
(정병삼,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사상적 경향」, <불교학연구>제9호, (2004.12), p.166)

그리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원효는 이에 대한 주석서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였다. 원효는 경 자체가 강조하는 공사상에 충실하지 않고 이를 유식사상과 대비시켜 기신론의 일심사상을 토대로 화회하고자 하였다. 제 교학의 융화에 관심을 가졌던 신라교학의 성과가 원효의 관점을 통해 금강삼매경론으로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위경(僞經)23)의 생성은 당시 불교계가 자신들의 사상적 과제를 새로운 형식의 경전으로 담아낼 만큼 역량이 충분했음을 의미한다. 금강삼매경은 여래장사상, 일승사상, 섭론학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종합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23) 위경에 대한 표현엔 이론이 있을 수도 있다. 현재 조계종의 종헌은 소이경전으로 금강경과 전등법어를 지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전등법어가 육조단경이다. 혜능의 어록을 수록한 경인데 이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님에도 경으로 불린다.
육조혜능이 구족계를 받은 해가 676년, 나당전쟁에서 당이 패배한 해이고 그때로부터 육조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는 신라불교전성기와 겹친다. 경의 발화자가 부처가 아니어도 그 정신을 정확히 계승한 것이라면 경칭에 대한 사용여부는 재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금강경(금강반야바라밀경)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세기로 추정되는 <석마하연론>의 편찬은 또 다른 관점에서 신라불교의 사상적 지향을 살펴보게 한다. 석마하연론의 주된 지향은 논쟁의 바탕이 되고 있는 여러 경론의 이설은 모두 근기에 따른 것으로 보고, 이들이 결코 모순되지 않고 모두 평등한 가치를 가짐을 강조함으로써 제 설을 회통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원효가 강조했던 금강삼매경과 금강삼매경론의 사상적 경향이 짙게 배어 있고, 의상계통의 화엄서인 화엄경문답의 영향도 강하게 들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근본사상은 의상계 화엄에 의지하면서도 원효의 회통방법을 계승하여 독자의 의론을 전개한 것이다. 한편 석마하연론은 기신론의 인식론을 화엄철학의 바탕에서 재조명하고 설명과정에 신격적 존재를 도입하고 후반부를 거의 주문으로 채우는 등 밀교적 성격을 띠고 있어 기신론 사상의 전통과 화엄과 밀교가 접합하는 새로운 불교사조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24)

석마하연론에서 보는 화엄과 밀교의 연계 그리고 화엄사찰에서 신앙주불의 문제는 장차 후기밀교의 수용에 따라 비로자나불이 교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전망도 내보였다. 이처럼 7세기 후반에 다채롭게 전개된 사상과 신앙의 역동적인 신라불교는 의례와 실천신앙의 확보로 전 사회 계층이 공유하는 체계를 갖추게 됨으로써 신라불교사상과 종단의 형성을 이룩하였고, 신앙대상이 일반민에게25) 확대되며 지역적으로 왕경 중심에서 지방사회로 확산되어 이후 8세기 신라불교의 성행을 선도하는 근간을 확립하였다.26)

주24) 정병삼,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사상적 경향」, <불교학연구>제9호, (2004.12), p.170
주25) 정병삼,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사상적 경향」, <불교학연구>제9호, (2004.12), p.172
주26) 정병삼, 「7세기 후반 신라불교의 사상적 경향」, <불교학연구>제9호, (2004.12), p.173

 

▲ 필자 : 이시우

이시우(1967년생. 사진가)

<사진전>
한국의 대인지뢰 피해자들(1999)
눈 위에 핀 꽃(2010)
한강하구(2010) 등

<저서>
사진시집 비무장지대에서 사색(1999)
민통선 평화기행(2003)
정전협정의 틈, 유라시아로의 창 한강하구(2008)
유엔군사령부(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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