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금강산미학의 탄생(2)

신라시대 금강산미학의 탄생
1. 금강산의 탄생
2. 국가불교
3. 산천만다라(진표, 왕건, 금강산만다라)
4. 불교를 통한 금강산미학비판

3. 산천만다라1)

주1) 만다라는 聖과 俗이 교차되는 場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 場에는 수행자의 공덕력과 여래의 가지력과 법계력이라는 三力이 교차되는 곳으로서 수행자의 몸으로써 직접 진리를 체현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수행의 중심을 신체에 두는 三密, 그리고 加持라는 합일의 개념과 場으로서의 법계가 만다라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면서 만다라를 통하여 삼매에 이른다. 만다라라는 場을 통해 수행자는 자심이 본래 보리 그 자체로서 本來法身임을 자각하라는 것이다.(김영덕, 「만다라에서 장(場)의 개념과 그 전개」, 󰡔한국불교학󰡕74권, (2015.6), p.57)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중심으로 한 청정만다라에서 어떤 부처와 보살을 모시는가가 핵심이다.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한 불교의식은 장기적으로는 왕실의 불사로 이어지고 사찰건립은 가람배치와 관련된 새로운 사상을 요구받는다. 신라에서 집중적으로 출현한 쌍탑양식 가람은 신라 가람만다라의 특징을 보여준다. 가람만다라가 수도인 경주의 평지를 중심으로 했다면, 산천만다라는 지방의 산지로 중심이 이동한다. 이는 필수적으로 불교가 고유의 산천신앙과 만나는 과정이 된다. 전시의 호국불교에서 전후의 호법불교로의 중심이동도 이루어진다. 이는 위기시의 사상결집에서 평화시의 사상통일로 더 많은 다양성을 통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획일적 집중에서 다양성의 통일로의 이행은 적국이었던 중국의 것조차 열심히 배워오는 과정과 신라만의 것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다시 이행된다. 

오대산만다라가 중국의 것을 배워오는 과정이었다면 금강산만다라2)는 신라의 것으로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당나라에 대한 승리를 토대로 고양된 자주성은 당을 철저히 배우고 그를 통해 당을 넘어서며 심지어 주도하려는 경향을 확산시켰다.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성립되는 과정을 보면 대중적 인지도와 선호도가 형성되고, 경전상의 근거와 논리체계가 마련되며, 전쟁등 정치적 배경이 작동하고 최종적으로는 국가권력의 결단과 지원에 의해 성립됨을 알 수 있다.

주2) 오대산만다라는 학계에서 공인된 개념이지만 금강산만다라는 필자의 개념이다. 금강산만다라만의 독창성을 해명하는 작업은 다음과제로 한다.

이는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의 친견에는 실패했지만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오대산이 대중에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뒤, 오대산에서 생활하며 오대산만다라의 기초를 닦은 보천과 효명 형제 중, 효명이 성덕왕으로 추대된다. 그리고 성덕왕이 된 효명은 705년 진여원 창립을 시작으로 오대산에 5방ㆍ5불 구조의 신앙체계가 갖추기 시작하고, 경덕왕대 다시 본사와 하원이 추가되면서 오대산신앙이 완결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3) 이에 비해 원표의 천관산신앙은 국가권력의 결단과 지원에 이르지 못해 실패한 사례에 해당한다. 원표는 자신이 구해 온 범본 경전을 지고 복건성 천관산으로 가서 널리 화엄을 펼쳐 이 절은 오늘날까지 그 지역 화엄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4) 그 후 원표는 755년에 신라로 돌아와 천관보살신앙을 전파한다.5) 원표의 천관산신앙은 학문적 깊이, 논리적 체계를 갖추었을 것이며, 오대산과 달리 본인이 중국 천관산신앙의 저작권자였다. 그럼에도 천관산은 신라당대는 물론 그 후의 역사에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대산신앙이 성덕왕과 연결되면서 발전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금강산 역시 이러한 과정이 필요했다. 의상에 의해 화엄경에 의한 금강산의 불교문명권내 공인이 이루어졌다 해도 대중적 인지도, 논리체계의 완성,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권력의 선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사람이 진표율사와 태조 왕건이다. 

주3) 박미선, 「신라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의 성립시기」, <한국사상사학>28권, (2007), p.153참조

주4) 계미향, 「천축구법승(天竺求法僧)의 행적(行蹟)과 사상 연구-7~8세기 혜륜(慧輪)·원표(元表)·혜초(慧超)를 중심으로-」, <한국불교학>75권, (2015), p.204-205

주5) 「보림사 사적기」 참조. 그러나 원표의 화엄은 천관보살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의 흔적은 가지산이 아닌 천관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관산과 그 주변의 대덕면, 삼산리 등의 지명과, 천관사ㆍ지제사ㆍ탑산사와 같은 천관산의 사찰들은 평생을 천관보살사상을 신앙하며 살아온 원표와 연관 짓지 않을 수 없다.

 

진표
진표는 유학승이 아님에도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린 스님이다.6) 

주6) <宋高僧傳> 「唐百濟國金山寺眞表」(이하 「백제진표」) 등에 진표의 전기가 전하고 있다. 찬녕贊寧(930∼1001)이 저술한 『송고승전』 「백제진표」의 기록이 시기가 가장 빠르다. 그 뒤 『三國遺事』 「眞表傳簡」, 같은 책 「關東楓岳鉢淵藪石記」(이하 「발연수석기」) 두 기사가 전한다. 「백제진표」는 후백제를 통해 오월국에 전해진 진표이야기를 찬녕이 전해 듣고 『송고승전』에 삽입한 것으로 짐작된다.
贊寧은 오월吳越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영명연수永明延壽와 함께 오월불교계의 거두다. 그는 978년 오월이 송에 투항한 후, 송 태종의 칙명으로 『송고승전』을 찬술하게 되었다. 그는 항주로 돌아와 편찬에 착수하여 988년 이를 완성했다(<十國春秋>권89. 吳越13, 僧贊寧). 그가 직접 경험하였거나 가까이서 보고 들은 고승들의 사적에 관한 내용을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전기를 남겼는데, 실천적 수행인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한 이들에 대한 전기가 두드러진다(조영록, 「구화산 지장신앙과 오월수부 항주 10세기 江浙海地域의 한중 불교교류의 실상」, <동국사학>33, (1999), p.145).
찬녕이 활동했던 오월과 가장 교류가 활발했던 국가가 후백제임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그러므로 찬녕은 후백제와의 교류 속에서 오월에 전해진 진표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고 두타행을 실천한 진표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전기를 <송고승전>에 입전한 것이라 생각한다.

진표는 출가 승려들에겐 『공양차제법』에 근거하여 더욱 절제된 수행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진표가 수행을 강조한 것은 분명 안일해지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통일 이후 신라불교계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 불교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는 승려들이 왕권을 합리화하고 국왕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서면서 권력에 편승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점차 사회가 안정되고, 불교도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승려들은 안일함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신문왕대 경흥이 말을 타고 대궐에 들어가려다가 문수보살의 화신에게 꾸짖음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잘 말해준다. 진표가 수행을 중시한 것은 지계持戒를 강조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 이는 당시 승려교단이나 일반민들에게 보다 철저하게 불교 규범을 지켜나갈 것을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7) 진표는 이와 더불어 새로운 불교세력으로서 민중을 발견한다. 이 과정에서 진표는 금강산과 연관된다. 이미 신계사, 표훈사, 정양사 등이 건립되었지만 진표의 발연사 건립은 왕실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민중의 이해관계가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주7) 박광연, 「진표(眞表)의 점찰법회(占察法會)와 밀교(密敎)수용」, <한국사상사학>26권, (2006), p.26

“진표일행이 명주해변을 돌아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며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으로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드니, 율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염송하고 되돌아왔다. 고성군에 이르러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그 곳에 거주한 지 7년 만에 이 곳 명주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하니 사람들이 받들어 지켜 3보에 공경을 다했다. 이때 갑자기 고성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죽어서 밀려왔다. 이것을 팔아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8)

주8) 『三國遺事』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

명주는 강릉일대의 강원도 지방이다. 김주원세력의 본거지이며 후에 이들과 손잡은 궁예가 태봉국 건설을 위해 철원으로 서진하는 출발지이다. 진표의 주요 활동지역은 금산사 일대, 속리산일대, 명주일대이다. 모두 왕도인 경주와 거리가 먼 변방지역이었다. 명주 등 지방사회는 당과의 교류 속에 다변화해가던 불교문화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9)

진표는 명주에서 그 지방 사람들과 삶의 애환을 같이 나누면서 점차 지도자로서 위치를 확고히 해 나갔다. 더욱이 진표의 교화활동은 어별(魚鼈), 해족(海族)이라 표현되는 데까지 미쳤다. 어별, 해족이란 명주바닷가 지역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민들을 상징한다 볼 수 있는데, 진표의 교화가 하층민들에게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송고승전』에서는 백정에 해당하는 본도가(本屠家)의 여인에게도 평등하게 대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진표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지방사회에서 계를 구하고 참회하는 자들이 매우 많아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진표가 반신라적 저항세력의 중심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백제진표」 기록에 비중을 둔 연구에서는 진표를 반신라적 이상국가의 건설을 꿈꾼 인물이라고 보았으며10) 후삼국시대 견훤과 궁예가 진표를 계승했다고 보았다.11) 또한 「발연수석기」에 근거해서는 진표를 법상종의 개창조로 보았다.12)

주9) 박광연, 「진표(眞表)의 점찰법회(占察法會)와 밀교(密敎)수용」, <한국사상사학>26권, (2006), p.25
주10) 이기백, 「진표의 미륵신앙」, <신라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조용헌, 「진표율사 미륵사상의 특징」, 『한국사상사학』6, (1994); 윤여성, 「신라 진표와 진표계 불교연구」, (원광대박사논문, 1998). 반면 김상현은 진표에게 반신라적 의도가 없었다고 반론하였다(김상현, 「진표의 미륵신앙」, 『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1999)
주11) 조인성, 「미륵신앙과 신라사회」, <진단학보>82, (1996); 박광연, 「진표(眞表)의 점찰법회(占察法會)와 밀교(密敎)수용」, <한국사상사학>26권, (2006), p.5
주12)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 <진단학보>8, (1937); 문명대, 「신라 법상종의 성립과 그 미술」, 『역사학보』 62,63, (1974); 김남윤, 「신라중대 법상종의 성립과 그 신앙」, 『한국사론』11, (1984); 김남윤, 『신라법상종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5); 조용헌, 「진표율사 미륵사상의 특징」, 『한국사상사학』 6, (1994); 김상현, 「진표의 미륵신앙」, 『신라의 사상과 문화』, (일지사, 1999)

저항세력의 지도자일 가능성에 대한 반대견해로 「진표전간」의 진표가 경덕왕의 보살계사가 되었다는 기록을 무시할 수가 없다. 경덕왕이 진표를 부른 것은 명주지역에서의 진표의 명성에 힘입어 왕의 지방통치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13) 그러나 이 자체가 역설적으로 진표의 세력화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던 경주권력의 염려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진표가 상층민, 하층민을 막론하고 8세기 많은 신라인들을 교화시켰고 그들의 귀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진표가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활될 수 있었던 것도 진표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며,14) 고려시대 법상종이 진표를 앞에 내세운 것도 진표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15) 진표의 금강산은 산천만다라의 조건인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논리를 체계화하는 데는 일정 기여했겠지만 국가권력의 결단과 지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신라왕실과 소원하거나 대립할 수밖에 없는 세력의 특성상 신라왕실로부터의 결단과 지원을 끌어내기란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역사 최초의 민중국가라고 할 수 있었던 태봉국의 단명도 이를 불가능하게 했다. 이는 새로운 세력에 의한 국가가 건립됨으로써 가능해진다. 고려이다. 

주13) 박광연, 「진표(眞表)의 점찰법회(占察法會)와 밀교(密敎)수용」, <한국사상사학>26권, (2006), p.26

주14)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농민층의 지지가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금산사를 중심으로 대중교화를 전개했던 진표를 특히 부각시켰다(김수태, 「견훤정권과 불교」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pp.57∼58참조)

주15) 박광연, 「진표(眞表)의 점찰법회(占察法會)와 밀교(密敎)수용」, <한국사상사학>26권, (2006), p.27

 

왕건

동국여지승람의 회양?정양사조(東國與地勝覽 淮陽?正陽寺條)에 다음과 같은 건설이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랐을 때 「담무갈(曇無竭)」이 돌 위에 몸을 나타내어 광채를 비추거늘(放光) 태조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정례(頂禮)한 뒤에 이어 정양사를 창건했다. 그러므로 절 뒤 언덕을 「방광대(放光台)」라 하고, 절 앞 고개를 배점(拜岾)이라 하며 또한 진헐대(眞歇臺)도 있다.”

배점은 고려 태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은 아니고, 누구나 이 고개에 오르면 금강산을 바라보면서 절하게 된 데서 유래한 이름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고개가 고려 태조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그것은 방광대가 앞에서 인용한 전설에서 크게 부각되는데 방광대에 「담무갈」 즉 법기(法起)보살이 태조앞에 현신하여 방광했기 때문에 그 언덕을 방광대라 했다는 말은 어느 정도 그럴듯한 전설이기 때문이다. 만약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랐다면 이 배점에 쉬면서 금강산의 전경을 조망했을 것이고, 그러한 광경을 보다 신비화시키기 위해서 담무갈의 현신을 전설화시켰을 것이다. 고려 태조가 실제로 금강산을 유람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의 근거지가 개성지방이고 강원도와 경기도를 근거해서 활약하다가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왕이 되기 이전 젊은 시절이거나 태봉의 장군으로 있으면서 한 번 정도는 금강산을 올랐을 가능성이 있을 법하다. 만약 태조가 금강산에 올랐다면 고려의 건국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법하다. 실제로 고려 태초가 금강산에 오른 적이 전혀 없었다면 어느 땐가 앞과 같은 전설이 꾸며졌을 것이고, 그것이 점차 태조의 건국설화와 관련되면서 실제로 그러했던 것처럼 믿어졌을 것이다.16) 

주16) 문명대, 「노영필 아미타구존도 뒷면 불화의 재검토-고려 태조의 금강산배점 담무갈(법기)보살 예배도」, <고문화>제18집, (1980), pp.3-4

영(魯英)의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뒷면 불화에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담무갈보살을 향해 절하는 인물의 상단에 ‘太祖’라는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다. 이것을 봐서 이 그림의 소재는 태조의 담무갈보살친견설화임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금강산이 회화사에 처음 등장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후 금강산표현의 원형이 되었다.  

고려초 현종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연수진표비명에 담무갈과 기달이, 명종 때 김예경의 시에 담무갈이 언급되었다. 이로 볼 때 금강산은 담무갈 보살의 주처인 기달산으로 적어도 무인정권 초기에 인식되었고 태조 왕건이 담무갈을 친견했다는 이야기가 고려 초에 비롯되었다면 고려초기에 이미 금강산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고려인들에게 60권 화엄경(舊譯)과 80권 화엄경(新譯)이 고려초기부터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정권기까지는 풍악과 개골산이 산명으로 주로 사용되었다.17)

주17) 김창현, 「고려시대 금강산과 그 불교신앙」, <지역과 역사>제31호, (2012.10), p.208

 

금강산만다라

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금강산의 불교신앙은 법화 천태계와 화엄 보현계 및 정토 염불계와 선법 참선계통에 밀교 및 오대산 신앙이 결합된 모든 불교신앙의 집중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민지(閔漬,1248~1326)는 그가 편찬한 <금강산유점사사적기>에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19) 

주18) 고영섭, 「금강산의 불교신앙과 수행전통,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건봉사를 중심으로」, <普照思想>第34輯, (2010), p.308

주19) 「[일지 스님의 감춰진 불교이야기]33. 금강산과 법기보살신앙」, <현대불교신문>(2002.07.31.)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670

“신라의 옛 기록에 의하면 의상법사께서 처음 오대산에 드셨다가 금강산에 드시자 담무갈보살이 현신하여 법사께 ‘오대산은 수행이 있는 사람들만 세간의 티끌을 벗어날 수 있는 땅이지만 이 산은 수행이 없는 무수한 사람들도 세간의 티끌을 벗어날 수 있는 땅이다’라고 이르셨다”

이는 출세간의 수행자뿐 아니라 중생에게 이미 불성이 있다는 여래장사상이 금강산만다라에 투영되었음을 의미하는 설화로 보인다. 그에 걸맞게 금강산만다라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나 무속까지도 포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최남선은 <풍악유기楓岳遊記>에서 도교적 신령스러움의 근원처가 되는 ‘영원동(靈源洞)’이 불교의 명부신앙처로 변화된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금강산을 하나의 가람배치와 비교하며 따라가 보자.

▲ 내금강 명경대[사진캡처=조선의 오늘]

내금강 입구 장안사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선 지역이 도가적 이름인 원동이다. 그런데도 이 계곡의 막다른 곳에 위치한 주산은 지장봉(地藏峰)이고, 영원암(靈源菴)이란 암자가 들어서 있다. 그 오른쪽 옆 봉우리가 시왕봉(十王峯)이다. 영원동 계곡에 우뚝 선 바위가 명경대(明鏡臺)이고, 아래로는 황천강(黃泉江)이 흐른다. 지장봉에 들어서는 입구가 곧 지옥문이다. 이들 주변에는 또 판관봉, 사자봉(使者峯), 죄인봉 등이 있다. 모두 명부신앙과 관련된 명칭이다. 명부는 지하세계이고 인간이 죽으면 누구나 거쳐가는 곳으로, 생전의 죄과를 따지고 그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보살계이다. 명부의 주인 부처는 지장보살이고, 지장을 보좌해서 죄업을 재판하는 판관이 시왕이다. 그리고 시왕 중 5위의 염라청 염라대왕 앞에 비치되어 인간의 삶을 비쳐보는 거울, 업경(業鏡)이 명경대이다. 이처럼 영원동은 일반사찰로 치자면 명부전에 해당된다. 이곳을 거쳐 사악한 마음을 씻고 금강산을 참배하도록, 명부세계가 내금강입구를 차지해 있다. 금강산을 다녀오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 영원동에서 나온 것이 기복적인 신앙과 불교의 습합을 보여준다. 

금강산은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따라 비로봉을 주산으로 삼는다. 비로자나불은 진리 혹은 우주 그 자체를 부처의 몸으로 의인화한 법신불(法身佛)이자, 부처의 지혜가 모든 곳을 비친다는 의미로 태양을 뜻하며 ‘대일여래(大日如來)’로 번역된다. 인간으로 태어난 석가모니는 곧 그 비로자나불의 화신이다. 그런 탓에 화엄의 세계 금강산에서 가장 높고 우뚝한 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부른다. 비로자나불은 그처럼 형이상학적인 존재인 탓에 직접 중생에게 설법하지 않는 ‘침묵의 부처’로 일컬어지며, 그에 따라 모셔진 법당 이름이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비로자나불상은 대체로 음양합일을 상징하는 지권인을 한다.

금강산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동해의 법기보살, 즉 불법을 일으킨다는 담무갈보살은 중향성에 머무는데, 비로봉을 내금강 쪽에서 병풍처럼 감싸는 봉우리들의 이름이 중향성이다. 그 보호 아래 있는 형국의 만폭동 계곡에는 담무갈보살의 이름을 딴 법기봉이 위치하고, 중향성과 비로봉에 향을 올리는 듯한 대향로봉과 소향로봉이 이어진다. 장안사를 지나 솟은 봉우리는 ‘석가봉’이니 절로 치면 대웅전이 된다. 석가모니를 보필하는 사자좌의 문수보살은 만폭동 계곡의 사자봉과 화개동의 묘길상(妙吉祥)이 그 역할을 맡는다. 금강산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고, 금강산 사암을 관할하는 총 지휘소격이던 유점사는 미륵봉 아래 위치한다. 

▲ 외금강 구역[사진캡처=조선의 오늘]

외금강 지역은 신선처인 집선봉, 옥류동과 구룡폭 계곡의 중심에도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세존봉’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만물상 계곡 만상계의 좌우에는 관음연봉과 세지봉이 있다. 관음과 세지는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보살들이다. 그렇게 보면 만물상은 아미타가 거처하는 극락정토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계곡의 사잇길도 극락고개라고 불린다. 이 고개는 온정령으로 이어지는데, 심하게 꾸불꾸불하고 가파른 경사지는 극락세계에 오르는 길이라 할 만하다. 이외에도 외금강 지역에는 세지봉 아래 문수봉이, 온정리 수정봉 밖으로는 천불산(千佛山)이 있다. 해금강에도 바위의 형상에 따라 칠성암(七星岩)이나 천불암(千佛岩), 칠보대(七宝臺)등의 지명이 있다. 모두 화엄의 세계를 담으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들이자, 금강가람의 위상을 여실히 드러낸다.20)

주20) 이태호, 「금강산의 고려시대 불교유적」, <미술사와 문화유산>1, (2012), pp.168-170

 

4. 불교를 통한 불교비판

추사 김정희는 금강산이란 이름 자체의 이데올로기성을 깨닫고 고증을 통하여 상악산이란 이름을 찾아낸다. 그리고 금강이 아닌 원래이름인 상악으로 바꿔 불러야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이데올로기비판이 아니다. 금강을 상악이라 한들 상악이란 이름의 이데올로기가 생기지 않는가? 이데올로기 자체를 숭상하는 태도처럼 무시하는 태도도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면서도 그 구조의 통찰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것이 이데올로기비판이다. 이데올로기가 결코 완전하지 않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처럼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결국 불씨잡변은 유교로 불교비판하기가 아니라 대승불교로 소승불교비판하기였다. 불교로 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가장 강력하다. 

금강이란 이름자체가 이미 세계문명의 수입이다. 금강산은 익숙해졌지만 금강반야바라밀산이라고 하면 이 이름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 이름인지 단번에 드러난다. 이름을 사용하되 이름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는 이름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이름이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님을 폭로해야 한다. <금강경>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경전이름을 무엇이라고 할지 묻자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密)’이라고 답한다. 금강의 본래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로 범어로는 바즈라-프라즈냐-파라미타(Vājra-prajñā-pāramitā)이다. 

바즈라(Vājra)는 다이아몬드와 벼락이란 의미가 있는데 금강석이 보물로서 보편화된 것은 19세기 중엽이므로 경전이 해석될 당시에 금강을 보석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21) 따라서 금강산은 다이아몬드산이 아니라 벼락산이라는 뜻으로 바뀌어야 한다. 존재가 실체로서 인식되는 무명을 벼락치듯 깨뜨리고 단박에 깨닫는 돈오이다. 이 점에서 금강산을 금과 관련하여 해설하고 있는 징관의 설명은 명백히 오류이다.22)  
프라즈냐(prajñā)는 지혜인데 지식이 아니라 모든 법의 자성이 공(空)함을 보고 그 실상을 통찰하는 지혜, 통찰지를 가리킨다. 일체의 분별을 떠난 것이므로 무분별지라고도 해석된다.23)
<금강경>에서는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지혜를 얻되 그 지혜를 얻었다는 것마저 놓아버리라고 한다.24) 최봉수는 무한부정이 반야에 의해 계속되지만 놀랍게도 반야부 경전들은 무한부정의 진행에 어떤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25) 

주21) 김용옥,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통나무, 1999), pp.73-77참조; 이언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명에 대한 소고」, <유학연구>제32집, (2015.05), p.405
주22) 최완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서울: 대원사, 1999), p.ⅲ
주23) 교양교재편찬위원회, <불교학개론>,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99), p.111; 이언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명에 대한 소고」, <유학연구>제32집, (2015.05), p.404
주24) 이언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명에 대한 소고」, <유학연구>제32집, (2015.05), p.418
주25) 최봉수, <근본불교의 가르침>, (경기도: 불교원전번역연구소, 1998), pp.223-225참조 ; 이언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명에 대한 소고」, <유학연구>제32집, (2015.05), p.419

파라미타(pāramitā)는 최상의 상태란 뜻과 도피안, 즉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 마음으로 돌아선다는 뜻이 있다. 반야바라밀을 최상의 지혜라고 해석하면 지혜자체를 실체화하기에 통찰지를 성취하되 그 조차 놓아버리라는 가르침에 어긋난다. 청담에 의하면 바라밀을 “저 언덕에 건너갔다”고 해석해서는 안되며 “마음으로 돌아선 것”이라 해야 한다.26)

주26) 청담, <해설 반야심경>, (서울: 보성문화사, 1991), pp. 120-122참조; 이언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명에 대한 소고」, <유학연구>제32집, (2015.05), p.421

 ‘마음으로 돌아서는 것’은 전도된 마음들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쥐아버지에게 아주 잘난 딸쥐가 있었는데 쥐아비는 이 딸쥐를 빛을 피해 구멍에나 사는 같은 쥐에게 시집보내기가 싫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위를 찾아 나선다. 처음 해를 찾아간다. 해는 말한다. “잘 찾아왔다. 내가 비추는 빛으로 세상만물이 자라니 내가 가장 강하다. 그런데 단 한가지 경우, 구름이 나를 가리면 나는 힘을 못쓴다.” 그래서 쥐아비는 두 번째로 구름을 찾아갔다. 구름은 말한다. “잘 찾아왔다. 나는 아무리 강한 햇빛도 가릴 수 있다. 그런데 단 한가지 경우, 바람이 불면 나는 힘을 못쓴다.” 그래서 쥐아비는 세 번째로 바람을 찾아갔다. 바람은 말한다. “잘 찾아왔다. 어떤 구름도 나는 날려버릴 수 있다. 그런데 단 한가지 경우, 돌부처에겐 아무리 강한 바람을 불어도 내 힘이 안먹힌다.” 그래서 네 번째로 돌부처를 찾아갔다. 돌부처는 말한다. “잘 찾아왔다. 어떤 바람도 나를 날려버릴 순 없다. 그런데 단 한가지 경우, 쥐들이 내 발밑에 흙을 파서 구멍을 내면 나는 기울어 쓰러진다.” 그래서 결국 쥐아비는 집으로 돌아와 쥐 중에서 사위를 뽑아 딸과 결혼시켰다.

이 이야기는 쥐가 여러 경험을 거친 끝에 결국 자신이 가장 강한자임을 깨닫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여기서 출발점의 쥐와 도착점의 쥐는 같은 쥐이면서 전혀 다른 쥐이다. 처음으로의 복귀이지만 복귀를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그 처음은 무엇인가? 처음의 나란 실체는 과연 있었던 것인가? 나란 실체가 없음이 공이다. 공이란 무엇인가? 나와 세계의 사이이다. 사이는 나와 세계가 겹친 채로 있는 것이 실상임을 의미한다. 세계없이 나없고 나없이 세계없다. 쥐와 해와 구름과 바람과 석상은 관계의 연쇄에 의해 겹쳐있다. 관계가 바뀌면 더 바뀐다. 해-구름-바람의 순서가 해-바람-구름으로 바뀌면 이 이야기는 중단된다. 해와 구름은 인과관계가 성립되지만 해와 바람은 무관심한 관계이다. 해나 구름이란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 맺는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관계의 순서가 존재의 속성을 규정한다. 존재는 없고 매개만 있다. 매개는 업보이다.27) 

주27) 空(suññatā)은 비어있다, 크다(廓)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이중표는 ‘업보는 있고 작자는 없다’(<잡아함경>335,第一義空經)는 의미로 해석한다.
“<雜阿含經>卷13(󰡔大正藏󰡕2, 92c).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已盡滅 有業報而無作者”(이중표, 「근본불교에서 일체(一切; sabba)의 의미」, <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18권1호, (2012), p.105)

감각과 사유 모두 매개이다. 이들 매개는 관계를 떠나 일어나지 않는데 감각하는 존재, 사유하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작자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업보에 의해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된다. 그래서 나는 나로서 따로 있고 세계는 세계로서 따로 있는 것처럼 분리된다. 그러나 나는 없다. 출발점의 쥐와 도착점의 쥐는 전혀 다른 쥐이다. 쥐라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면 어떻게 출발점과 도착점의 쥐가 달라질 수 있겠는가? 따라서 관계를 떠나 독존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분별심의 근원이다. 
대승불교와 밀교는 체(體)와 상(狀)과 용(用)이 하나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방편을 사용한다. 금칠을 한 불상 어디에 불법이 있겠는가? 그러나 불상을 통해 불법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말은 불상이 아닌 똥막대기를 통해서도 불법을 깨달을 수 있고, 절이 아닌 저자거리에서도 불법은 깨달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금강산도 부처님이다. 비로봉의 비로자나불이 수많은 불보살들로 화현하는 드라마를 금강산을 통해 깨닫고 영감을 얻는다면 금강산은 부처다. 그러나 금강산은 부처가 아니다. 불법을 보지 않고 불상에 집착하는 순간 불상은 부처가 아닌 돌덩어리이다. 불법을 보지 않고 금강산에 집착하는 순간 금강산은 부처가 아닌 돌덩어리이다.
금강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갖고 실천하라. 그러나 단 한 명도 구제한 바가 없다고 생각하라.28)

주28)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있는 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알(卵)에서 생겨나는 것이나, 태(胎)에서 생겨나는 것이거나, 습기(濕氣)로 태어나는 것이거나, 화(化)하여 태어나는 것이거나, 형태가 있는 것이거나 형태가 없는 것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모두 남김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어느 중생도 멸도(滅度)를 얻은 바가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大乘正宗分. ‘佛告須菩提諸菩薩摩訶薩應如是降伏其心所有一切衆生之類若卵生 若胎生若濕生若 化生若有色若無色若有想若無想若非有想非無想我 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實無衆生得滅 度者何以故須菩提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則非菩薩’)
우리가 실체라고 생각하는 오온(五蘊)이 인연화합에 의하여 이루어져 공하므로 실상이 아님을 알아 실체라고 생각했던 전도된 생각을 돌이켰을 때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이 자유자재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언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경명에 대한 소고」, <유학연구>제32집, (2015.05), p.422)

 

▲ 이시우 사진가

이시우(1967년생. 사진가)

<사진전>
한국의 대인지뢰 피해자들(1999)
눈 위에 핀 꽃(2010)
한강하구(2010) 등

<저서>
사진시집 비무장지대에서 사색(1999)
민통선 평화기행(2003)
정전협정의 틈, 유라시아로의 창 한강하구(2008)
유엔군사령부(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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