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 한미동맹] (2)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홍장이 주도한 조선 최초의 근대조약

동아시아 질서가 또 다시 요동치고, 한반도 주변 국가들의 각축이 본격화되고 있다. 구한말의 격변기, 한국은 식민과 전쟁을 경험했다. 해방 직후의 격변기, 한국은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다. 놀랍게도, 동아시아 질서가 요동치는 매 격변기에 한국의 선택은 미국이었다. 미국에 의지해 우리의 살길을 도모하고자 했던 노력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다. 과거와 다른 선택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있다. 한미동맹,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은 정상국가인가?
2.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홍장이 주도한 조선 최초의 근대조약
3. 고종,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현혹되다
4. 러일전쟁과 가쓰라-테프트 밀약: 고종의 망상인가, 미국의 배신인가
5. 맥아더 포고령: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6. 국공내전: 일본과 한반도의 운명이 바뀌다
7. 한국전쟁과 미국: “고맙게도 한국전쟁이 터져주었다”
8. 자발적 사대근성과 한미동맹의 실상: “독립국가가 아니군요”
9. 북한의 핵개발과 남북미 삼각관계: 동맹의 존재 이유를 묻다
10. 2017년 한반도 미사일 위기와 한미 동맹: 동맹, 딜레마에 빠지다
11. 쿼바디스 한미동맹: 굳건한 동맹은 더 이상 없다!
12. 나오며: 탈동맹,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길

‘미스터 션샤인’은 없었다

조선 최고 양반댁 가문의 ‘애기씨’는 미천한 신분의 사냥꾼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신문에 글을 써 알리든지, 야학으로 가르침을 준다든지 하는 다른 방법을 ‘애기씨’는 단호히 거부한다. 글은 힘이 없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다. ‘애기씨’는 의병이 되고, 저격수가 된다.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장면. [사진 : 동영상 갈무리]

길을 가던 오누이가 일본군과 어깨를 부딪쳤다. 흥분한 일본군은 누이의 생명을 위협하고, 검은 눈의 미국인과 파란 눈의 미국인은 오누이의 생명을 구한다. 앙심을 품은 일본군은 완전무장을 하고 미국 공사관을 찾고, 미군과 일본군은 총부리를 겨눈다. 

‘유진 초이’라는 이름을 가진 검은 눈의 미국인은 조선의 의병 ‘애기씨’를 돕는다. 그의 상관인 파란 눈의 미국인은 ‘유진 초이’의 행위를 눈감아준다. 미군은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는 일본군과 일전을 불사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드라마와 일치하지 않는다. 러-일 전쟁 전야, 조선의 운명을 보호해달라는 고종의 요청을 받은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조선인은 자기 방어를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고 있지 않으니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자 루스벨트는 “일본의 평화조약 안에 조선통치권을 포함하는 것을 나는 진심으로 동의한다”면서 러-일 전쟁 중재에 나선다. 

‘미스터 션샤인’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인물이다. 조선인을 일본군에게서 보호하고, 조선인의 의병활동을 도왔던 미국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조선인의 안전을 놓고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배를 놓고 어깨를 겯는 사이였다. 그러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미국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나라로 각인된다. 

미국과의 관계가 시작된 지 150년 가까이 흘렀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설정과 같은, ‘미국은 우리를 지켜준다’는 사고가 우리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다. 이같은 사고는 미국과 관계를 처음 맺었던 150년 전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같은 사고는 왜 생겨나게 된 것이며, 150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책략>, 조선의 외교를 결정하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하던 시기, 조선은 쇄국으로 일관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양인은 야만인’이라는 흥선대원군의 인식을 강화시켰다. 1871년 신미양요는 쇄국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양이의 침략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심어주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양이척결’로 국론통일을 모색했다. 

역사의 변동은 우연히 찾아왔다. 성인이 된 고종은 아버지의 섭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흥선대원군은 눈물을 머금고 섭정의 지위에서 물러났다. 고종의 친정(親政)은 쇄국정책에서의 변화를 초래했다. 1876년 고종은 일본과의 근대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외교방향이 쇄국에서 개화로 바뀐 것이다. 

더욱 결정적인 역사의 변동은 그로부터 4년 후, 김홍집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의 수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준헌이라는 청나라 외교관으로부터 <조선책략>을 받아 돌아온다. 이 책은 조선의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고, 조선의 외교를 결정했다. 

<조선책략>은 조선을 위협하는 나라로 러시아를 꼽고,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책략’으로 친청(親淸), 결일(結日), 연미(聯美)를 주장했다. 즉 청나라, 일본,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청나라와 조공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일본과도 이미 강화도조약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결국 <조선책략>은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는 연미론을 주문한 셈이다. 

쇄국, 척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이들은 연미론을 강하게 배척했다. 영남유생 이만손 등은 1만 명이 넘는 유생들을 조직하여 “미국은 우리가 모르는 나라인데, 공연히 남의 종용을 받아 끌어왔다가 미국이 우리의 약함을 업신여겨 거부하기 어려운 요청을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떠맡길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미국과의 수교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연미론으로 쏠리고 있었다. 구한말 3대 시인의 하나로 불렸고 유력한 개화사상가였던 강위 역시 “미국은 만국 중에서도 가장 평화를 사랑하고 다른 나라의 토지와 인민을 탐내지 않으며 오직 공공의 정의만을 펼치기 때문에 여러 나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다”면서 연미론을 옹호했다. 

고종의 입장 역시 연미론으로 기울었다. 이미 일본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등 개화의 방향으로 자신의 정책을 선회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과 통상을 하라는 청나라의 강력한 권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청나라 외교관 이홍장이 주도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이 서양세력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조약이다. 그러나 이 조약의 초안은 조선의 관리가 아닌 청나라의 외교관 이홍장이 미국과 담판을 통해 작성하였다. 고종은 미국과 수교를 결정했으나 조선의 여론은 통일돼 있지 않았다. 여전히 ‘양이와의 수교는 망국’이라는 여론이 양반 사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공개적으로 미국과 수교 협상에 나설 수가 없었다. 

고종의 선택은 대미 수교 협상을 이홍장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청나라 관리 이홍장과 미국의 관리 슈펠트 사이에 조미 수교를 위한 사전교섭이 진행되었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쟁점은 ‘조선의 독립성 문제’였다. 이홍장은 조선의 동의를 얻어 조미통상조약 1조에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내용을 넣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이홍장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 조미수호통상조약 원문.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은 고종을 중심으로 한 조선 위정자들의 사대 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대미 수교를 위한 외교 전권을 이홍장에게 맡겼다. 이홍장과 슈펠트가 합의한 교섭 초안에 사인만 했을 뿐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라는 조항이 조미통상조약 1조에 삽입되어야 한다는 이홍장의 주장에 동의하기도 했다. 

한편 이홍장의 주장을 배격했다고 해서, 미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했다고 단정짓는 것 역시 몰역사적이다. 미국은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냐 독립국이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미국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미국이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 사대주의가 초래한 망상

쇄국정책은 조선의 운명을 청나라에 의탁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대주의의 산물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의 운명을 미국에게 의탁하려고 했다. 따라서 미국과의 통상조약 역시 사대주의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조선책략>은 “미국은 선왕의 유훈을 지켜 예의로써 나라를 일으켜 세우되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았으며,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면서 연미론을 설파했다. “(미국은)대통령이 통치하기 때문에 영토를 얻는다고 다른 나라로 확장하지 않는다”는 황준헌의 주장은 조선 위정자들에게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조선의 안전을 위해 미국과 수교를 결심했던 고종은, 그러나 1905년 미국에게 ‘배신’을 당한다. 미국이 조선을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은 조선 위정자들의 사대주의가 초래한 망상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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