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 한미동맹](9) 북한의 핵개발과 남북미 삼각관계

누구를 위한 속도 조절론인가: 체념적, 소극적 사고에서 벗어날 때

미국이 요구하는 속도 조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남북관계가 발전할 때마다 미국은 속도조절론을 내세우며 남북관계 발전에 제동을 걸었다. 

최근 남북 사이의 철도와 도로 연결을 위한 현장조사가 유엔안보리의 승인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보리의 승인은 결국 미국의 승인이다. 미국의 승인이 없으면 대북 정책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현장조사에 대한 면제라는 데 주목하여 그 의미를 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강도 높은 속도조절 요구를 감안한다면, 이 정도 전진 역시 큰 변화이다. 남북관계를 조금씩 발전시켜 나가면서 남북관계의 범위를 넓혀 나가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평가절하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의 속도 조절 요구를 마치 상수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통념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속도 조절 요구는 ‘남측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대북정책’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도조절론은 병행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남측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대북정책과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통념이 지배하는 것은 한미동맹의 결과라고 해야할 것이다. 사소한 데서라도 미국과 어긋난 정책이 나오는 순간 한미관계가 악화되고 그 후과는 한국이 뒤집어 쓴다는 체념적, 소극적 사고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속도조절론도 존재할 수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남측의 대북정책’ 속도에 따라오는 것이다. 즉 남북관계 속도에 맞춰 북미관계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은 정반대의 속도조절론이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5월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때 ‘2차 판문점 정상회담’이 개최됨으로써 꺼져가던 북미정상회담의 불씨를 살리지 않았던가. 

9월 평양정상회담도 마찬가지였다. 북미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고, 개성 연락사무소를 개소하는 데까지 미국의 속도조절 요구가 뻗쳤을 때 이것을 돌파한 것은 9월5일 대통령 특사의 파견과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었다. 

남북관계의 속도에 북미관계가 따라오는 새로운 속도조절론이 등장한 것이다. 북미관계에 남북관계의 속도가 맞춰져야 하는 것이 ‘역(逆)의 속도조절론’이라고 한다면, 2018년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양상을 ‘순(順)의 속도조절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의 속도조절론’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내년 1월로 늦춰졌으니 서울 정상회담 역시 늦춰져야 한다는 논리 말이다. ‘역의 속도조절론’은 동맹의 논리이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다. ‘순의 속도조절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순의 속도조절론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을 때 서울 정상회담이 빠르게 개최될 수 있고, 한미동맹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미국 롯데 뉴욕 팰리스 호텔 허버드룸에서 한미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18.09.24. [사진 : 뉴시스]

한반도 핵문제의 근원과 북한(조선)의 핵개발 

흔히들 북핵 문제라고 하지만 한반도 핵문제가 정확한 명칭이다. 한반도에서의 핵문제는 북한(조선)의 핵개발로 촉발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의 핵문제는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량보복전략’을 군사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었던 미국은 핵무기의 전방 배치를 필요로 했다. 주한미군 기지에도 핵무기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이게 문제인 것은, 미국의 주한미군 기지의 핵무기 배치는 정전협정 위반이기 때문이다. 

교전행위를 중단하기로 한 1953년의 정전협정은 군사인력과 물자(무기 포함)의 1대1 교환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정전협정 13조ㄹ항). 즉 하나의 무기를 도입하려면 기존의 무기를 빼야 한다. 그런데 정전협정이 체결될 당시 핵무기는 한반도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한미군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정전협정상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미국이 정전협정 13조ㄹ항을 일방적으로 폐기한 이유이다. 그렇게 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한 미국은 핵무기를 정점에 두는 대북 적대정책을 추진해갔다. 

미국의 북핵을 문제삼은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영변 지역의 핵활동을 플루토늄 생산 목적으로 규정하면서부터였다. 핵개발 의혹으로 시작되었던 문제가 지금은 북한(조선)이 핵과 ICBM을 가진 문제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 핵문제는 왜 이렇게 큰 문제가 되었을까. 북한(조선)은 왜 핵무기와 ICBM을 보유하게 되었을까. 

북한(조선)은 혁명전통을 자랑한다. 북한(조선) 헌법 2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반대하며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혁명투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은 혁명적인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혁명투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통”이 바로 혁명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전통은 주체와 자력갱생으로 구체화되며 외교안보 영역에서도 고수되었다. 외교안보에서의 혁명전통은 미국의 요구에는 굴복하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안보를 지킨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북한(조선)이 핵을 개발한 이유를 혁명전통의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1994년 미국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타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김일성 주석이 “미국 사람들은 코트를 벗으라 하고, 셔츠를 벗으라 하고 바지까지 벗으라고 한다. 종국에 가서는 발가벗기려고 하고 있다.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 미국이 전쟁을 걸어오려면 전쟁을 하겠다”고 언급한 것은 이같은 혁명전통을 상징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정치학 용어로 억지(抑止)와 보복공격이라는 개념이 있다. 억지는 나를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상대방의 행동을 단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단념시키는 수단은 보복공격 능력이다. 즉 “네가 나를 때리면 나도 너를 보복공격하겠다”는 능력과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여 나를 공격하려는 상대방의 행동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강대국과 약소국은 보복공격 능력의 유무로 나뉘어진다고 볼 수 있다. 보복공격 능력을 갖고 있으면 공격하기 어려운 반면 보복공격 능력이 없으면 공격당하기 십상이다. 보복공격 능력을 갖춘 강대국간에는 전쟁이 일어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전에서 보복공격 능력은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가장 강력한 폭발 장치인 핵탄두를 갖는 것이고,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ICBM)을 보유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조선)은 2017년 세 차례의 ICBM 시험발사를 통해 보복공격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외교안보영역에서 북한(조선)의 혁명전통은 보복공격 능력을 확보하여 미국의 ‘전쟁책동’을 억지한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만약 북한(조선)의 이같은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북한(조선)과 미국의 관계는 정상화되며 한반도에는 평화가 정착된다. 한반도에서 평화가 위협받아왔던 근원에는 북한(조선)과 미국의 적대관계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동맹은 없었다: 동맹의 존재 이유

한반도 핵문제는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이다. 따라서 북미 적대관계가 해결되어야 한반도 핵문제도, 북핵도 해결된다. 그러나 보수정권의 대북정책은 적대를 심화시키는 방향이었다. 핵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기 한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한국화’를 표방했다. 대북정책을 한국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미동맹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 미국 중심의 대북정책이 지배했다. 동맹의 설자리는 없었다. 김영삼 정부는 동맹 논리를 명분 삼아 대북정책을 주도하고자 했으나 미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일방적인 대북정책이 있었을 뿐이다.김영삼 정부 시기 핵문제 해결에서 한미동맹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순의 속도조절론’을 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역의 속도조절론’을 요구했다. 그것이 대북정책을 지배했다.  미국의 힘은 강력했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 한반도 평화선언’은 부시 정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노무현 정부 역시 미국의 속도조절 요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임기 몇 개월 남겨놓고서야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다. 정상회담의 동력은 살아날 수 없었다. 미국이 요구했던 ‘역의 속도조절론’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발목을 잡았고, 화해협력정책을 방해하였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미국의 대북정책과 한치의 어긋남이 없는 정책을 추진했다. ‘순’이건, ‘역’이건 속도조절이 필요하지 않았다. 북한(조선) 붕괴에 대해 완벽하게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었고, 적대적 대북정책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동맹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동맹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다. 동맹의 목적은 전쟁을 막는 데 있고, 만약에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에는 빠르게 평화를 회복하는 데 있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그같은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적대가 지배하는 북미 대결 구조에서 한미동맹은 상호간에 적대를 심화시키는 장치로 작동했다. 평화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적대와 대결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남북관계가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갈 때 한미동맹은 미국의 속도조절론, 즉 ‘역의 속도조절론’이 한국의 대북정책에 개입하는 명분이 되었다. 한미동맹은 한국 정부와 한국인에게 북한(조선)을 선택해서는 안 되며, 미국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강압적 장치로 작동했다. 동맹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정부는 북한(조선) 대신 미국을 선택해야 했다. 그 결과 한반도의 운명은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미동맹, 한계선에 이르다 

‘역의 속도조절론’은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순의 속도조절론’이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미국의 속도에 우리가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도에 미국이 맞춰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앞당겨지는 것이다. 미국의 이해관계와 한국의 이해관계가 다르듯이 ‘역의 속도조절론’과 ‘순의 속도조절론’은 화합할 수 없는 상극이다. 

한미동맹은 ‘역의 속도조절론’을 강요하는 장치이다. 미국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한국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한미동맹이다. 그렇다면 한미동맹은 이제 한계선에 다다랐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한미동맹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2017년의 한반도 ICBM 위기는 한계선에 이른 한미동맹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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