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을 내세우던 문재인 정부가 결국 재벌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출범한 지 15개월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정경유착, 재벌적폐의 상징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나 일자리를 부탁하고, 의료기기산업 규제완화를 내세워 안팎의 우려를 낳더니, 급기야 은산분리 완화까지 공식화하였다. 사실상 재벌에게 굴복한 것이자 박근혜 적폐정권의 경제정책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정부와 여당은 이런 공약파기와 정책전환 과정에서 아무런 해명이나 그 흔한 공청회 한 번 없이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국민과 소통하는 정부가 되겠다는 취임사의 다짐은 벌써 부도수표가 되고 있다. 청와대는 공약파기가 아니고 재벌과 타협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자유한국당과 조선, 중앙 등 수구언론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만 봐도 이들 조치가 얼마나 극소수 기득권세력에게 단비 같은 소식인지 알 수 있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는 적폐세력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금융자본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조차 산업자본이 은행자본을 소유하지 못한다. 전 세계 모든 자본주의 나라는 소수의 대자본이 경제 전체를 독식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금산분리를 경제정책의 대원칙으로 세워 놓았다. 그런데 한국에선 재벌에게 보험과 카드 등 금융업 진출의 길을 열어줬다. 덕분에 삼성생명 등은 재벌의 돈줄로서 후계처리 문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제 하나 남은 게 은행이다. 은산분리 원칙마저 무너지면 그렇잖아도 재벌천국인데 국민은 더 완전히 재벌에 속박될 것이다. 그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컸던 탓에 그토록 친재벌적이었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도 함부로 원칙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여기에 완강히 반대했음은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추미애 대표는 “독도 잘 쓰면 약”이라는 궤변으로 자신들의 입장 파기를 합리화하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어찌 보면 정부여당은 국민의 반대여론을 잘 알기에 기존 은행 영역으로 곧바로 진입하지 않고 이제 시작 단계이고 규모도 작은 인터넷은행부터 은산분리를 완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우회전략이다. 여기에 핀테크 육성이니 일자리 창출이니 하며 그럴듯한 명분도 내걸었다. 인터넷은행이란 문자 그대로 점포가 없는, 적은 인력으로 운영되는 은행이다. 케이뱅크만 하더라도 300인 미만이다. 이 정도 규모가 고용촉진의 선두가 될 수 없다. 외려 기존 은행들이 점포를 없애고 인터넷은행으로 전환하겠다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실제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을 비롯한 외국계 은행들은 그런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또 인터넷은행이 재벌의 사금고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지만 지분의 34%에서 심지어 50%까지 출자 가능한 산업자본은 재벌 등 대자본밖엔 없다. 문 대통령이 말한 인터넷은행에 투자할 수 있는 자본과 기술투자 여력이 있는 기업도 삼성전자 등 재벌기업이다. 뭐라고 연막을 치든, 둑에 금이 가고 기어이 작은 구멍이 뚫리면 머지않아 둑은 허물어지게 되는 법이다. 작은 이익을 탐하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열린 간담회를 마치고 나서며 악수하고 있다.

결국 은산분리 완화의 진짜 목적은 재벌의 먹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수출 길 확대가 한계에 이르고 공룡 같은 재벌의 덩치를 유지하기 위한 국내 조치는 은행업으로의 진출과 민영화다. ‘은산분리 완화는 재벌대기업의 사내유보금 활용 방안’이라고 한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 말대로 합법적으로 이자놀이를 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조치가 은산분리 완화인 것이요, 의료민영화를 본격화하기 직전 길닦이 조치가 의료기기산업 규제혁신이다. 주지하듯이 의료민영화의 결과는 이재용 부회장이 김동연 부총리에게 후안무치하게 요구한 “복제약값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는 말처럼 재벌의 배를 불리고 국민은 더 비싼 약값과 진료비에 허덕이게 할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세력과 타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비단 재벌만이 아니다. ▲사법부의 재판거래를 비롯한 반사법적 작태에 대한 무대응 ▲기무사 군부세력에 대한 형사처벌 ‘제로(0)’와 간판만 바꾼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의 ‘셀프’ 개편 ▲재벌적폐를 옹호하고 노동탄압에 앞장서온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등 관료적폐 온존 등 어느 것 하나 단호한 청산조치가 없다. 민주당이 과거에도 기회주의적이고 타협적이란 비판을 들어온 게 사실이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기득권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국민 여망을 외면할 줄은 몰랐다.

정부는 무조건 특별재판부를 설치해 사법부 적폐세력을 일소하고, 국민을 또 다시 총칼로 짓누르려했던 정치군인들을 반드시 단죄하고 기무사를 해체해야 한다. 군부도 환영할 일이다. 더불어 공약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를 국민의 힘을 믿고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 같은 날개 없는 추락을 멈추고 국민의 신임을 다시 쌓을 수 있다. 국민을 믿고 가겠다던 초심을 회복해야 한다.

국민이 총칼의 위험을 무릅쓰고 추운 겨울 광장에 나섰던 것은 문재인 정부가 ‘협치’를 부르짖는 바로 그들, 자유한국당 무리와 재벌들이 만든 ‘헬 조선’에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계속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개혁흉내만 내고, 실제로는 온갖 적폐세력들과 타협해 이명박근혜 적폐정권의 사회경제정책을 좇아간다면 국민들에게 돌아올 것은 더 큰 가난과 고통이요, 더 악화된 ‘헬조선’일 뿐이다. 부디 “이게 나라냐”던 촛불들의 분노와 통한의 절규를 잊지 말기 바란다. 촛불혁명을 일군 국민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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