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계단 오르기]첫 번째 계단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 6

예술가들에게 삶은 그 자체로 원천이다. 어머니의 품 안에 담겨져 있던 몸의 기억들이 순명의 두레박을 타고 한 가득 예술의 영감으로 길어 올려 진다. 그 안에 담긴 기억들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단계씩 오르고 올라 예술의 열매를 맺는다. ‘예술로 계단 오르기’는 길어 올리는 과정에서 두레박 밖으로 떨어지는 순명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은 예술가의 퍼즐 맞추기다. 그 첫 번째 계단을 조연희 작가가 오른다. <시의 사생활>로…,
▲ 그림/ 연소라

플라스틱의 저주

유서 사건이 있은 후 엄마가 담임선생님에게 호출을 당한 모양이었다. 수업이 파할 때 쯤 엄마가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서도 나는 엄마를 한 눈에 알아봤다. 엄마가 몸빼바지에다 예의 그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왔기 때문이다. 원색에 가까운 파란색의 슬리퍼는 엄마 몸에서 별개의 생명체처럼 분리돼 저 혼자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보이지 않고 슬리퍼만 눈에 들어왔다. 마치 슬리퍼가 주인인양 엄마를 끌고 오는 것 같았다. 엄마를 발견한 순간 나는 책상 밑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마가 불려왔다는 문제의 심각성보다 몸빼바지를 입고 욕실에서나 신을 것 같은 슬리퍼를 끌고 온 그 행색이 창피해서였다.

사실 엄마는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 한 켤레로 사계절을 버티고 있었다. 겨울에도 양말을 신고 그 위에 솜버선을 신은 후 슬리퍼를 신었다. 밥을 지을 때도 시장에 갈 때도 슬리퍼는 굳은살처럼 늘 엄마 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닳거나 찢어졌다면 벌써 새 신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는 징글징글하게 질겼다. 헤지지 않는다는 것이 때론 사람을 얼마나 질리게 하는지… 마모된다는 것은 양보가 아니던가. 그런데 플라스틱 슬리퍼는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고집쟁이 노파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기 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는다는데…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신발을 훔쳐오기도 한다는데… 신발에는 어쩌면 주술적인 기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신데렐라가 유리구두 한 짝으로 인생이 바뀐 것처럼 혹 엄마도 신는 신발을 바꾸면 삶이 좀 달라질 수 있을까? 엄마 신발은 옛날 히브리 노예들이 발목에 차고 다니던 쇠고랑 같았다. 교무실 신발장 앞에 놓인 엄마의 슬리퍼를 보며 엄마에게 새 신을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마에의 무녀

그러고 보니 신발은 각자 주인을 닮아 있었다. 앞이 뭉툭한 구두는 너털웃음을 잘 웃는 미술 선생님을 닮아 있었고 뾰족한 굽의 하이힐은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사회 선생님을 닮아 있었다. 삐딱하게 닳은 뒷굽과 벗겨진 구두코마저도 각각 주인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엄마의 슬리퍼는 초라했지만 뻔뻔했고 완강하면서도 흠집투성이였다.

자세히 보니 먼지 탓인지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도 조금 지쳐 보였다. 엄마가 신고 있을 때는 파랗게 독이 오른 것처럼 생기가 돌았는데 조금 풀이 죽은 것도 같았다. 슬리퍼도 좀 쉬고 싶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자 문득 황무지에 나오는 쿠마에의 무녀가 생각났다. 영생을 얻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영원한 젊음까지는 함께 얻지 못한 탓에 그녀는 계속 늙어야 했다. 그녀에게 영생이란 그저 영원히 늙어야 하는 형벌일 뿐이었다. 참새 한 마리 크기 정도로 쪼그라든 그녀를 사람들은 새장 속에 가두어 길거리에 매달아 놓고 구경거리 삼았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조롱하듯 "무녀야 원하는 게 뭐니?"하고 물으면, 그제서야 그녀는 "죽고 싶어…"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하곤 했다는 것이다.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만 쉬고 싶어…”

그리움의 방향

교무실에서 나온 엄마는 마치 쿠마에의 무녀처럼 더 작고 더 초라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눈 밑의 주름도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묵묵히 엄마 뒤를 따랐다. 그저 가뭄 든 논처럼 갈라진 엄마의 발뒤꿈치를 보며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엄마가 재래시장 쪽으로 가고 있었다. 시장은 낮에도 알전구를 켜놓고 있었는데 길게 늘어진 전선이 흔들릴 때마다 노란 빛이 위태하게 출렁였다. 상가가 양 옆으로 도열해 있었고 가운데 노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한 사람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다. 중간 중간 보신탕용으로 개를 부위별로 파는 노점이 있었는데 머리가 잘린 채 털이 홀딱 벗겨진 개가 네 다리를 쳐들고 누워 있는 모습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아줌마는 마녀처럼 앞 다리 또는 가슴을 쓱쓱 절단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주고는 했다.

엄마는 노점에서 고등어 한 토막을 사고는 동태며 다른 생선들의 내장을 서비스로 달라고 했다. 내장탕을 끓일 거라면서 뻔뻔하게 웃는 엄마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오이 값을 지불하고 나서도 엄마는 오이 하나를 덤으로 빼앗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 이번엔 신발가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신고 있는 것과 비슷한 플라스틱 슬리퍼가 입구에 쌓여 있었고 운동화며 구두들이 장식장 위에 줄 맞춰 진열돼 있었다. 당시는 나이키니 프로스펙스니 하는 그런 고급 운동화들이 막 도입된 때여서 신고 있는 신발을 통해 은근히 부모의 경제수준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부윰한 먼지가 날리고 있는 가운데 외짝 씩 놓여 있는 신발들이 마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 같다는 생각이 든 건 왜일까. 출항을 서두르는 항구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도 저기서 가장 아름다운 신발을 신고 떠나고 싶었다. 아니 붉은 구두의 마법에 걸려 죽을 때까지 춤을 추었다는 동화 속 소녀처럼 가장 아름다운 신발을 신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죽을 때까지 춤이나 추고 싶었다.

괜찮다며 극구 말렸지만 엄마는 주인아저씨가 권해주는, 요즘 학생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나이키도 아닌 나이스 이름이 박힌 하얀색 운동화를 내 손에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때 보았다. 엄마 몸빼 바지 속의 또 하나의 주머니를. 엄마는 허리춤을 벌려 깊숙이 숨어 있는 그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돌돌 말아놓은 지폐를 꺼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비밀 주머니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의 숨겨 둔 마음을 본 것만 같아 식도가 뜨거워지며 자꾸 허리가 꺾이는 것이었다.

등이 휘어질 때 나는 알았다.

휘어지는 것은 그리움이란 걸

당신에게 조금 더 기울고 싶은 몸짓이란 것을

저마다 어디론가 휘어지는 시간

오이의 등이 휘어지고 있었다.

호박넝쿨이 휘어지며 땅 위를 기어가고

골목길들이 휘어져

집으로 가는 길들이 자꾸 휘어지고 있었다.

이미 마른 지 오래인 개골창에선

휘어진 바람의 허리가 다시 한 번 휘어졌고

수세기 지하에선 지상의 방향으로

화석들의 등뼈가 휘어졌다

새 한 마리가 날아가자

나뭇가지는 새의 무게만큼 휘어지고 있었다.

            -졸시 ‘휘어질 때’ 전문

고무 대야에서 미꾸라지들이 허리를 비틀고 있었고 가판대 위에선 아직 살아 있는 생선들이 지느러미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자드락길은 점포 사이로 구불구불 흘러가고 있었고 골목길은 자꾸 허리를 꺾으며 좁아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금씩 휘어지는 시간이었다. 시장바구니를 든 엄마의 어깨가 자꾸 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내 머리는 자꾸 엄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어느 새 내 머리는 엄마 발에까지 기울어졌다.

“엄마 잠깐만 발 들어봐.”

“왜?”

“그냥 조금만 들어봐.”

엄마가 발을 들자 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새로 산 내 하얀 ‘나이스’ 운동화를 신겼다. 그리고 엄마의 슬리퍼를 내가 대신 신었다. 엄마가 한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엄마와 난 서로 기댄 채 걸었다. 슬리퍼가 헐거워 자꾸 벗겨졌지만, 엄마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내 발을 지탱해주었다.   

 

*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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