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계단 오르기]첫 번째 계단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 7

예술가들에게 삶은 그 자체로 원천이다. 어머니의 품 안에 담겨져 있던 몸의 기억들이 순명의 두레박을 타고 한 가득 예술의 영감으로 길어 올려 진다. 그 안에 담긴 기억들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단계씩 오르고 올라 예술의 열매를 맺는다. ‘예술로 계단 오르기’는 길어 올리는 과정에서 두레박 밖으로 떨어지는 순명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은 예술가의 퍼즐 맞추기다. 그 첫 번째 계단을 조연희 작가가 오른다. <시의 사생활>로…,

 

칼을 갈다

토요일 오후였다. 모처럼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꿈결인 듯 창밖에서 ‘칼 갈아요~ 칼 갈아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 소리는 ‘칼’에 힘을 주면서 뒷말은 흐리고 있었는데 그 억양이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요즘도 칼을 갈아주나 하는 생각에 창밖을 내다보니 꼽추 아저씨가 어린아이처럼 조그만 몸집을 구부리고 앉아 칼을 갈고 있었다. 한 아저씨는 확성기로 ‘칼 갈아요’하며 주변을 돌고 꼽추 아저씨는 그렇게 모아 온 칼을 열심히 숫돌에 갈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갈아서 쓸 만한 칼이 있을까 싱크대를 열어본 나는 30여 년 그때처럼 잠시 당황했다. 돈을 주고 산 기억도 없는데 칼이 이중으로 빽빽이 꽂혀 있었다. 나는 칼을 쇼핑백에 담아 꼽추 아저씨에게로 갔다. 꼽추 아저씨는 한껏 수그린 자세로 정성스레 칼을 갈았다. 숫돌을 밀 때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며 칼의 날이 조금씩 예민하게 벼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하게 느껴졌다. 맞았다. 숫돌에 칼을 가는 모습이 어딘가 아버지가 벼루에 먹을 갈던 그 모습과 닮아 있었다.

먹을 갈다

삼대 종손인 우리 집은 유난히 제사가 많았다. 파친코에 빠져 있긴 했지만 그나마 아버지가 위엄이 있어 보이는 순간은 제사를 모실 때였다. 특히 지방을 쓸 때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버지가 쓰는 벼루는 오래되고 낡은 것이었다. 언젠가 할아버지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아수라장 속에서 아버지가 벼루만 안고 뛰쳐나왔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아들이 없던 할아버지는 양자를 들이고 나서 줄줄이 3형제를 얻었는데 그중의 첫째 아들이 아버지였다. 삼대 종손인 아버지에게 벼루는 그만큼 특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벼루는 마치 상투나 곰방대처럼 스스로 위엄을 갖춘 듯했다. 단단한 오동나무 뚜껑에 음각으로 새겨진 사군자는 당당하면서도 담담해 보였다. 뚜껑을 열면 가슴이 움푹 패인 벼루가 놓여 있었는데, 긴 세월 벼루를 간 것인지 먹을 간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이 패여 있었다.

아버지는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세워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런 모습은 자못 경건하기까지 했다. 먹의 농담이 진해지면 아버지는 가는 붓을 먹물에 쓱쓱 묻혀 붓털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연필심처럼 뾰족해진 붓에 먹물을 묻혀 몇 번씩 신문지 위에 연습을 한 후 화선지 위에 정성스럽게 글을 썼다. 언젠가 해남의 한 사당에 걸려 있다는 증조할아버지 초상화를 보여 준 적이 있었는데, 지방을 쓸 때 아버지의 모습은 영락없이 그 증조할아버지를 닮아 보였다. 초상화 속의 증조할아버지는 날카로운 눈매에 검은 유건을 쓰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앉아 있었는데,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먹 가는 냄새를 맡을 때마다 할아버지의 도포자락에서 저런 냄새가 나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곤 했다. 정성스레 먹을 갈고 붓을 다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불이 난 그날 왜 저 벼루를 안고 나왔는지 저절로 알 것 같았다.

제사

그날도 아버지는 먹을 갈고 있었다. 마치 숫돌에 칼을 가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해서 먹을 갈고 붓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고조할아버지 제사였다. 그런데 제사 준비를 하던 엄마가 갑자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나가 버린 것이다. 언니는 그런 엄마를 따라나섰고 한 번도 제사상을 차려 본 적이 없는 내가 진설을 하고 있었다. 얼핏 들은 바로는 아버지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아버지 명의로 돼 있던 집이었기에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복덕방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뛰쳐나간 엄마와 언니는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집을 팔다니…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더 비좁고 냄새나는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엄마가 제삿상도 내팽개치고 나갈 만큼 다급한 일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 가닥이던 향내가 두세 가닥으로 새끼줄처럼 꼬여 안방 문틈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진설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입을 벌린 북어포는 북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었고 머리가 댕강 잘린 닭은 곧 출발선을 튕겨나갈 마라토너의 자세로 등을 구부린 채 있었다. 밤과 배 사과가 순서대로 놓인 것 같았지만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과일 윗부분을 도려내는 것도 잊었다. 그 와중에 엄마는 산적과 동그랑땡, 호박고지까지 준비해 놓았다. 얼핏 보기에는 다른 때의 제사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가 경황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3마리 조기였다. 평소 같으면 실고추랑 노란 고명을 얹었을 텐데 오늘은 아무 장식 없이 세 마리가 포개져 있었다.

나는 국을 올린 다음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남은 막걸리를 마셨다. 엄마와 몇 번 설탕을 타서 마셔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생짜로 막걸리를 마셔본 건 처음이었다. 너무 빨리 들이켜 목이 막혔다. 뜨거운 불두덩이 하나가 식도에서 걸려 타는 것 같았다. 딱히 막걸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오늘만큼은 아버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러자 날카로운 칼날이 명치에 박힌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칼을 뽑다

나는 칼을 넣어둔 찬장 서랍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칼이 뒤섞여 있음에 잠시 흠칫했다. 우리 집에 이렇게 많은 칼이 있었다니. 식도가 3개에 과도가 두어 개, 그리고 심지어 칼자루도 없는 녹슨 칼이 쇠꼬챙이 모양의 꽁지를 드러낸 채 있었다. 생각해보니 걸핏하면 자루가 뽑히던 칼을 엄마가 세로로 세워 마치 못을 박듯 탁탁 쳐 사용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렇게 여러 개의 칼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칼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내가 집어 든 칼도 예외는 아니었다. 손잡이만 멀쩡했지 붉은 녹이 덧개져 표면이 울퉁불퉁했고 충치 먹은 이빨처럼 듬성듬성한 날은 파 한 개도 썰기 힘들어 보였다. 칼을 집어 들긴 했지만 나는 이 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칼을 잡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는지 모르는지 숭늉을 올리라고 했다. 아무 소리가 없자 아버지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숭늉을 올리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와 내 눈이 마주쳤던가. 핏줄이 터질 듯한 내 눈빛을 보았던 걸까. 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린 것은 내가 취해서였을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직접 숭늉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미닫이문 옆에 놓여있던 벼루가 보였다. 나는 나무 뚜껑을 열고 칼로 벼루를 찍었다. 사실 아버지를 어찌해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 마음이 죄 없는 벼루에게로 향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단단한 원석을 사용했던지 벼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녹슨 칼이 힘없는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때였다. 제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아버지의 ‘이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허탈해서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현관으로 나와 지방을 태워서 날리자 고조할아버지의 혼백이 내 머리를 쓰다듬듯 한 줄기 바람이 스쳐갔다.

서랍 속에서 칼들이 얼굴을 묻고 우는 것만 같았다. 붉은 녹물을 흘리면서 누워 있는 칼은 가슴이 폭폭 녹이 슨 엄마 같았고 혼자 울다 이가 빠진 언니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아무에게도 칼을 드밀지 못할 내 모습 같기도 했다. 내 분노는 녹슬고 내 정의는 늘 두 동강 나리라. 내 분노는 파 한 개도 베지 못하리라. 스스로의 눈물에 부식돼 자멸하고 말리라. 나는 두 동강이 난 칼을 주워서 조용히 한 켠으로 밀어놓았다.

‘칼’을 버리다 

꼽추 아저씨가 칼을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3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숫돌에 칼날이 벼려지는 모습을 보며 자꾸 아버지가 벼루에 먹을 갈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혹시 말이다. 그 보잘 것 없던 ‘붓’이 아버지에겐 ‘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비록 아무에게도 휘두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예리한 날도 무뎌질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내게 어떤 적개심이 남아 있었나 보다. 아버지를 그때처럼 미워하진 않지만 아직도 칼집에서 내 젊음의 한 시절이, 아버지의 털 빠진 붓이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 같아 자꾸 슬퍼졌다.

오후 4시

구부정한 햇살이 노인의 등에 앉아 있다.

칼 갈아요, 왼손으로 손잡이를 돌리며

오른손으론 뭉툭한 날들을 갈아내고 있다.

떨어져 나간 무딘 날이 쌓여

곱사등을 이룬 노인은

이윽고 휘청 일어섰다.

칼날을 벼리는 것이

숫돌의 눈물일까를 생각하다가

나는 내 벽장을 열어보았다.

하나둘 꽂아둔 게 벌써 수십 자루

칼집 속에서 칼들이 울고 있었다.

챙챙 분노에 떨며

손끝만 대도 자지러지다가

제 성질에 푸슬푸슬 자멸해 가는 칼도 있었다.

호명 당한 칼들이 숫돌 위에서

끝내 붉은 눈물을 흘리는 하오

노인이 건네주는 칼을 받으며

덩달아 자꾸 허리가 휘어지는 것은

아마도 노인의 등 뒤 무덤 때문일 것이다.

나는 번쩍번쩍 잘 벼려진 석양 한 자루가

구부러진 산허리를 베어내는 것을 보며

이제 그만 내 칼들을 눈부신 저녁 속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졸시 ‘칼’ 전문

     (다음에 계속)

 

*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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