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1)]새민중정당 창당준비위 상임대표 김종훈 의원

얼마 전 출범한 새민중정당 상임대표 김종훈 의원을 만났다. 인터뷰는 김 의원의 일정이 바빠 아침 8시30분에 하게 되었지만, 그는 활달해보였다. 냉커피 한 잔 하면서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했다. 내용이 길어 1부(의원활동 중심)와 2부(새민중정당 창준위 중심)로 나누어 싣는다.
인터뷰 : 김장호 편집국장

▲ 새민중정당 창당준비위원회 상임대표 김종훈 의원

국회활동과 관련한 다양한 질문을 통해서 김종훈 상임대표는 민중의 삶과 자신의 활동을 동일시하는 하는 것이 몸에 배인 국회의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아픔이 컸다. 그 분의 삶이 저한테 투영된 느낌”
“낮에는 백남기 농민 시신을 지키고, 밤에는 서울 곳곳에 ‘#최순실 나와라’라고 현수막을 붙인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피켓에 담았다”
“조선에서 회사는 46년간 급성장했는데, 노동자들은 몸만 댄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일을 했다”, “사람이 없는 산업정책, 노동자의 삶이 들어가 있지 않은 기업윤리가 문제”
“지금 팔순 노인들이 풀뜯어 먹고 맹물 먹으며 살 때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새민중정당 창당과 관련해서는 “민중의 직접정치시대를 열고자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는 것을 밝혀준 것이 촛불혁명”
“민중이 나설 때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
“민중의 직접정치가 중요하다”
“우리만 새로운 민중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힘을 합쳐서 다 함께 하자. 과정이다”
“나한테 힘실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자민중이 직접 정치를 하시라는 것이다.” 
“기성정당만으로는 20%는 배터져 죽고 20%는 배골아 죽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노동조합의 배타적 지지를 받는 정당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배타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전략동맹”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1부 촛불과 의정활동

-작년 촛불이 시작되기 전, 국회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면전에서 ‘#나와라 최순실’ 피켓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어떤 마음이었나?

“최순실의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고, 백남기 농민의 ‘부검’ 문제로 시끄러울 때였어요. 사실 마음은 백남기 농민에게 더 가있었죠. 제가 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분의 삶이 저한테 투영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영안실에 가 있었죠.
어느 날 경찰이 육안으로 부검을 하겠다고 해놓고, 두들기고 뒤집고 하면서 피까지 흐르게 하는 거예요. 그 광경을 제가 본거에요. 억장이 무너지더라구요. 그때 결심했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일만은 내가 책임져야겠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최순실 문제를 직방으로 들이대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처음에는 구호를 ‘최순실은요?’로 고민했다가, 제가 ‘#나와라 최순실’로 하자 그랬죠. 좀 센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당시 민중의 꿈 서울위원회의 현수막 구호이기도 해서 그냥 그렇게 간거죠. 객관적 사실보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중요한 거죠.
낮에는 백남기 농민 시신을 지키고, 밤에는 잠도 안자고 온 서울시를 다니면서 현수막을 붙인 그 진정성이 담긴 구호가 ‘#나와라 최순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것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죠.”

-10월 29일 촛불집회가 청계광장에서 처음 열리는 날 이재명, 노회찬 의원과 함께 연단에 섰을 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국회 본회의장에서 피켓을 들고 난 뒤에 동네 어르신들한테 전화가 왔어요. 김의원, 내 참 좋아하는데 그래도 대통령이 들어오는데 왜 (피켓)그걸 들고 있냐, 좀 무례하게 보인다는 거에요. 며칠 지난 뒤에 울산에서 그 어르신을 만났는데 ‘김의원 내가 미안했네. 내가 봐도 (김 의원이)할 일 했네. 그 날은 내가 미처 몰랐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아주머니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 국민들이  부끄러워서 못살겠다고 (박근혜에게) 꼭 이야기 해주라던 당부를 그날 청계광장에서 이야기 한거죠.
저는 그날 모인 사람들 보고도 놀랐어요. 많아야 5천 정도 예상했는데, 3만이 넘게 왔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걸 국민들이 안 거죠.”

-지역구가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 동구이신데, 조선업 구조조정 터져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데요. 그 지역 국회의원으로써 어떻게 하고 계세요?

중공업은 1972년도에 첫 배를 건조를 했어요. 그렇게 46년이 흘러, 조그마한 시골 조선소가 세계적 조선소로 엄청나게 성장을 한 거죠. 반면 아픔도 많았죠. 그 기간 407명이나 목숨을 잃었거든요. 우리 노동자들은 조선소에서 일만 한 게 아니고, 목숨을 건거죠.
이런 노동자들을 한 2년 힘들다고 길거리로 내몬 거죠. 지난해만 3만명 가량을 내 쫓았어요. 사실 회사는 연속 5분기 동안 2조 2천억 흑자를 냈거든요. 그러니까 회사가 이익을 내기위해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임금을 삭감했다는 거잖아요. 도대체 기업윤리란게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런 것을 정당화시키는 거예요.
동구에 딱 들어가면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쫓겨나고 10년 넘게 비정규직으로 페인트칠에 도크장까지 죽자살자 일했는데 지금 와서 업체를 폐업시키고 나가라고 하면, 애들 공부는 뭘로 시키고, 대체 뭐 먹고 살란 거예요. 가슴이 먹먹할 뿐이죠. 이걸 누가 책임질거냐는 거죠. 이걸...”

-노동이 있는 일자리 정책, 노동이 있는 산업정책을 강조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해마다 산업의 발전과 성장, 기업의 이윤은 발표되지만 그 속에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졌는지? 일자리는 얼마나 안정되고 있는지 하는 숫자는 없어요. ‘산업은 있는데, 노동자는 없다’ 이런 얘기죠. 4차산업혁명만 해도 그렇다. 인공지능, 자동화, 로봇화라고 하는데 이 안에 노동자의 삶은 없다는 제기를 하는 겁니다.
세상이 변하고 발전한다는 것은 사람이 행복해지고 더 나은 삶으로 전진하는 것인데, 이런 것에 기초하지 않는 산업발전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기업은 이윤에만 눈이 멀어 사람의 가치에는 관심이 없는 거죠. 이제 산업은 사람을 중심에 놓고 발전 방안을 찾고 정책도 마련해야 해야지 않겠어요.
국정감사에서도 보면 폼나는 이야기만 할려고 해선 안되요. 거창하게 산업수치가 어떻다, 산업방향이 어떻다. 그렇게 거들먹 거려서 우리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코 앞에 있는 화장실을 놔두고 추운 겨울날 500미터나 떨어진 곳을 이용해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런 간단한 차별조차 해소시키지 못하는 정책은 산업정책이 아니란 얘깁니다.”

-성주에도 자주 가시고,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도 하셨는데, 사드문제를 어떻게 보시나요?

“사드같은 경우 근본적인 문제를 떠나서 성주에 가서 느낀 것은요. 다 늙으시고, 어머니 아버님들 팔순 노인들이 나와서 사드반대 하고 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였습니다. 회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하다가 할머니 한 분에게 “언제부터 사셨어요?” 하니까, 16살에 오셨다고 하는데 70년 가량 사신 거죠. 하시는 말씀이 이 동네에 누가, 사람이 왔냐고, 누가 거들떠보기나 했냐고, 거기 와서 나물 뜯어가 먹고 살고, 먹을 게 없어가지고 맹물을 마시면서 살았을 때, 그 때 나라라는 게 있었냐고, 그때 나라가 우리에게 뭐 해주었냐고. 근데 이제 와 가지고 논밭천지 다 내놓으라고 이야기하고,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냐? 이렇게 이야기하셨어요. 백보를 양보해서 사드를 배치해야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주민들에게 이해를 구하든, 용서를 구하든, 설명을 하든, 설득을 하든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아무런 조치없이 덜렁 배치하니까 분노할 수밖에 없었죠. 그것이 우리 삶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거죠. 고스란히 우리 삶이다. 어머니의 삶이다. 우리 형제들의 삶이다. 이런 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야만이나 폭력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주 가기도 하고 어른신들 뵙기도 했죠. 며칠 전에 사드집회를 하는데 그 팔순 성주 할머니가 오셨어요. 저기서 부르시는데 자두를 손에 들고 오신 거예요. 집에서 따온건데 줄라고 가져왔다고 손에 쥐어주시는데, 참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까? 가슴이 울컥 하더라고요. 그런 마음들이 우리를 투쟁의 현장에 있게 하고, 우리가 함께하는 것 아닌가. 그게 바로 내 문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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