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첫 학기 수업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 경북대학교 수학교수로 재직시절, 제자들과 교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고 1, 2주쯤 지나자 대부분 강의가 시작됐다. 국어, 문화사, 철학개론, 자연과학개론 등이 교양과목으로 개설되었고, 수학과에서도 미적분학과 일반기하학, 해석학 등이 개설되었다.

나는 잔뜩 기대를 안고 수업에 참여했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공과목이든 교양과목이든 제대로 된 수업은 기대할 수 없었다. 교수들은 대부분 낡은 대학노트를 들고 교실에 들어왔다. 교수들의 그 노트는 자신들이 일제시대에 대학을 다닐 때 필기했던 노트였다. 때에 절어 너덜너덜해진 노트를 들고 흑판에 가득 필기를 하거나, 그도 귀찮으면 거기에 적힌 내용을 읽어주는 게 수업의 전부였다. 그러니 명색이 대학의 수업임에도 질문과 토론이란 없었다. 쥐죽은 듯한 교실에서는 사각사각하는 펜대 소리만 들렸다.

내가 입학한 사대 수학과의 전공수업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수학이란 학문이 지닌 논리전개의 엄밀성을 내던지고, 일제 식민지시대에 출판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적은 노트를 들고 읽어주는 것이 강의의 전부였다.

수업에는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베끼기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일단 스스로 각오부터 단단히 했다.

‘중고등학교 공부도 모두 혼자서 터득했는데, 까짓 거 대학공부라고 못할 게 없지.’

하지만 속으로는 ‘이를 어쩌지’하며 마음 한구석에서 자신 없어 하는 또 다른 내가 불뚝거리며 불평하고 있었다.
‘그래, 일단 책을 먼저 구하자!’

나는 수업 시간에 교수가 읽어주는 내용을 필기하는 대신에 교수가 들고 있는 책을 유심히 관찰했다. 제목과 저자가 확인되면 곧바로 고서점을 뒤졌다. 그렇게 해서 구한 책을 들고 혼자서 공부했다. 오히려 그것이 훨씬 효과적이었고, 마음도 편했다.

당시 대구의 고서점들은 중앙통에 몰려 있었다. 중앙통에서 대구역 방향으로 올라가는 남북 거리의 오른편 길가에 고서점들이 많았다. 이 서점들은 1980~90년대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문진당(文進堂)이라는 서점이 제법 크고 유명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당시에는 책이 귀했다. 새 책은 주로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대부분 헌책을 구하러 이리저리 쫓아다녀야만 했다. 전쟁 통에 관공서나 도서관이 북의 점령지역이 된 곳에서는 먼저 책을 갖고 나오는 사람이 곧 임자였다. 이들은 빼돌린 책들을 고물상에 팔았고, 다시 이 책들이 고서점으로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값이 매겨졌다. 이렇게 흘러나온 헌책들이 많고, 또 수요도 많아서 고서점은 장사가 제법 잘 됐다.

나는 수업이 없는 시간이나 오후에는 산격동 교정에서 걸어서 중앙통 고서점가로 나오는 게 일과가 되었다. 서점에서 수업과 관련된 책들을 뒤적이며 노트도 하고, 문학이나 인문사회학 책을 읽다보면 밤이 이슥해졌다. 지식과 학문에 목말라하던 나는 그렇게 스스로 공부를 했다. 당시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진짜 공부를 혼자서 착실히 해나갔던 것이다.

한번은 내가 강의시간에 교수가 읽어주던 그 책을 고서점에서 구해 스스로 공부하다 어떤 개념에 대해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바로 교수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 되고 말았다.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한참 노려보던 그 교수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는 계속 노트를 필기해나갔다. 그날 이후 그 교수가 설치한 과목의 점수는 60점으로 고정되었다. 낙제를 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나도 정식으로 항의하지는 않았다. 속으로는 불편해도 대범한 척 넘어갔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공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전공인 수학이 걱정되었다. 신입생 시절의 수학이야 다른 교양과목처럼 독학할 수 있겠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할 전공과목까지 그렇게 공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월은 눈 깜짝할 만큼 빨리 지나갔다. 곧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나는 지난 학기를 그야말로 텅 빈 공간으로 보내고 만 셈이다.

방학이 되면서 2학기 수강신청을 위해 각 대학의 2학기 개설강좌 시간표가 나왔다. 사범대학 수학과의 강의는 대부분 1학기 과목의 연속이어서 볼 게 없었다. 그런데 문리과대학 수학과 1학년 시간표에 해석학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특히 담당교수란에 적힌 박정기(朴鼎基) 교수의 성함이 내 눈에 박혀 왔다.
박정기 교수는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교수로 계시다가 전쟁 통에 대구로 피난을 오신 분이었다. 생계를 위해 대구에 있는 여러 대학에 시간강사로 강의도 하셨고, 내가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해서 다닐 때 이곳에서도 ‘고등대수학’ 수업을 하셨다. 나는 그 수업을 아주 인상 깊게 받았다.

당시 문리대는 신설대학이었다. 그래서 대구사범대학이 전신인 사범대와 달리 학생이 신입생밖에 없었다. 1학년 2학기 전공과목으로 해석학 수업을 한다는 건 조금 빠른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기 교수처럼 실력 있는 교수가 의욕을 갖고 학생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겠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옳지, 선생님의 대학 강의를 들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과목은 대학이 다르더라도 선택과목으로 수강신청을 하면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까짓 학점이야 인정받건 말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제대로 된 수업을 받으며 진짜배기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이리하여 나는 내 학문의 참스승이신 박정기 선생님과의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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