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25) 한대수 : 멀고먼 길(1974)

▲ 당시 한국 대중문화에 충격을 줬던 한대수의 1집 '멀고먼 길'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1960~70년대 바다 건너 미국에서 시작한 히피문화는 당시대 젊은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히피문화란 기성사회의 통념과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과 자연으로 귀의 등을 주장했던 일련의 사회운동으로 영단어 해피(happy)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히피문화가 생겨난 배경 중 하나는 당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과 J. F. 케네디, 맬컴 엑스, 마틴 루터 킹 같은 미국사회의 상징적 인물들의 암살과 관련이 있다. 또한 1950년대 완성된 미국식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히피문화를 추구한 젊은이들은 긴 머리에 맨발이나 샌들을 신고 다녔고, 마리화나나 LSD 등의 약물을 통해 현실사회에서 도피하며 쾌락과 환락을 즐겼다. 그리고 이런 쾌락을 열반(nirvana)에 이르는 과정으로 생각한 것이다.

히피문화의 배후에는 하버드대의 심리학과 티모시 리어리 교수의 영향이 컷다. 리어리 교수는 1960년 환각제를 처음 경험한 후 환각약품의 영향을 시험하는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리어리 교수는 LSD가 다수의 정신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리어리 교수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LSD를 복용시키고 이것이 문제가 돼 결국 대학에서 쫓겨난다. 

대학에서 나온 리어리 교수는 1964년 환각제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연맹을 창설한다. 그리고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환각을 체험케 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특히 1967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공원에 모인 3만여 명에게 자신의 주장을 연설하는 과정에서 “Turn on, turn in, drop out(의식세계의 활성화, 세계와의 소통, 기존문화의 탈피를 통한 자신감 회복)”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히피문화의 구호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연설은 그해 여름 10만 이상의 젊은이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운집하는 ‘사랑의 여름’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히피문화는 당시 대중문화계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에서는 히피문화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의 흐름이 만들어져 ‘사이키델릭 록’이나 ‘에시드 록’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그룹이었던 비틀즈와 롤링스톤즈 등이 이런 문화운동에 동참하면서 미국 내 젊은이들에게 히피문화의 파괴력은 매우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들의 대중적 음악공연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1969년 8월15일부터 3일 밤낮 동안 ‘3 Days of peace & music(3일간의 평화와 음악)'이라는 구호로 열린 우드스탁 공연이었다. 

미국의 사이키델릭 열기는 곧바로 한국에 상륙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활동하던 한국의 록그룹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들의 음악을 사이키델릭 사운드라 칭했고 젊은이들은 그 음악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이키델릭 사운드는 미국에서 시작된 환각상태에서의 연주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들의 사이키델릭 록은 히피문화의 정신인 ‘사랑, 평화, 자유’와도 차이가 있었다.

단지 공통점이 있다면 트로트 중심의 대중음악에서 록음악으로의 변화 속에서 젊은이들이 기성음악이 아닌 새로운 대안문화에 몸을 맡기고 억눌린 젊음의 탈출구를 그 음악 속에서 찾으려했다는 것 정도이다. 

이후 한국에서 본격적인 히피문화의 정수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한대수였다. 한대수가 미국의 히피음악을 한국에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릴 적 선교사였던 할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서 초·중·고교를 다니고 뉴욕의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할 수 있었던 집안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첫 등장부터 장발에 당시 국내적 정서와는 차이가 있는 요란한 차림새 등으로 대중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가했다. 여기에 기존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아닌 거칠고 투박하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사회에 대한 풍자, 행복을 찾아 떠나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가사는 그를 찬사와 비난이라는 양날에 서게 했다.

이후 그의 1집에 나온 대부분의 노래들이 금지됐고, 2집 앨범의 재킷 사진이 반체제적이라는 이유로 판매가 금지돼 한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당시 1집에 수록된 ‘물 좀 주소’라는 노래는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됐고 ‘바람과 나’ 같은 경우 “자유의 바람”이라는 가사에서 자유라는 표현이 문제가 돼 금지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 중 '행복의 나라로'는 이후 한국 포크음악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고 노래의 원곡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국민가요로 불려졌다. 

 

최현진 담쟁이기자 단국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매체인 ‘코리아포커스’ 기자로 일했으며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의 교육위원을 맡기도 한 DMZ 기행 전문해설사다. 저서는 <아하 DMZ>, <한국사의 중심 DMZ>, <DMZ는 살아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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