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27) 김민기 : 아침이슬(1971)
김민기란 이름이 거론되는 것조차 가요계에서 금기시되던 때가 있었다. 볼온한 가수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김민기. 그러나 사실 김민기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가 불온한 인물(?)이라고 느낄 만한 가사나 음절은 없다. 이것이 필자만의 생각일까? 그러나 김민기는 저항가수의 기수가 되었고, 그의 모든 노래에는 금지곡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김민기의 첫 음반은 ‘도비두’란 이름의 두엣을 결성해 발표한 <김인배의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에 수록된 ‘친구’가 최초였다. 그리고는 여세를 몰아 1971년 양희은의 1집에서 작사와 작곡, 기타까지 연주하며 그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자신의 데뷔앨범인 ‘아침이슬’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아침이슬’이 발표될 당시만 해도 김민기의 음악은 ‘한국적 포크’로 평단과 대중에게서 모두 사랑받았다.
그러나 1972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음반이 나온 바로 이듬해인 1972년 10월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더니 12월 유신헌법을 선포하였다. 친위 쿠데타였던 유신선포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고 1974년에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면서 어떠한 개헌논의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후 긴급조치 2호, 3호 등이 연달아 나오게 된다.
이어 박정희의 유신은 대중음악에 대한 정화작업에도 몰두하게 된다. 흘러간 가요든 새로 발표되는 가요든 상관없이 모두 심의를 통해 금지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다. 가요에 금지를 붙이는 기준은 크게 네 가지였다. 우선 국가 안보와 국민 단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 둘째 무분별한 외래풍조를 모방하는 행위, 셋째 염세적이거나 패배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 마지막으로 선정적 퇴폐풍조를 조장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기준 아래서 1975년 최초로 가요 222곡, 외국 곡 261곡이 금지된다. 이러한 금지 활동은 1986년까지 계속돼 총 2139곡의 국내외 음악이 금지곡이라는 낙인을 받게 된다.
기준 자체도 모호한 내용이었지만 금지곡의 이유도 정말 어이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표적인 게 무분별한 외래풍조로 금지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였다. 이른바 일본의 엥카풍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경우는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어디에 있냐는 이유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록밴드는 퇴폐풍조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던 대표적인 대중음악의 흐름은 포크와 록이었다. 록음악을 즐긴다는 것은 함께 듣고 함께 몸을 흔들며 동화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표적인 퇴폐 향락문화였기에 금지되었다. 반면 포크는 기타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었기에 어디서나 사랑받는 음악이었지만 동시대 서양의 포크가 반전과 히피라는 메시지가 있었고 이 영향을 일정하게 받았던 국내 포크 음악은 대부분 염세적이거나 국민총화를 해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유신에 항거하던 거의 유일한 대항 세력이었던 대학생들이 많이 불렀다는 이유가 정부에서는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붙인 금지 이유가 ‘태양’이 불온을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아침이슬’에 “태양은 묘지위로 붉게 타오르고”란 가사가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태양이 이유가 된 것이다. ‘태양’의 뜻은 쉽게 해석하면 ‘뜨거운 열기’ 정도일 수 있는데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김일성을 뜻하는 ‘태양’으로 해석한 것 같다. 따라서 ‘아침이슬’은 심각한 불온사상을 전파하는 것이자 국민총화의 단결을 해치는 불온 가요로 규정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뒤 발표되는 김민기의 모든 노래는 금지되었고 그의 음반은 흡사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처럼 모두 불태워져 없어졌다. 이후 김민기는 궁여지책으로 자기 사촌동생이나 지인의 이름으로 만든 음악을 본인이 아닌 다른 가수에게 발표시켰는데 그마저도 나중에 김민기의 노래임이 확인되면 다시 또 금지 당해 금지곡의 전설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