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24) Zam : 난 멈추지 않는다(1993)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1992년 한국 정치사에서 30여 년간 지속돼 온 군부독재가 일단락된다. 혹자들은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1990년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한 야합으로 탄생하였고 노태우 정부를 승계했다는 점에서 군부의 완전 종식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리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이후 김대중 정권 같은 온전한 의미의 정권교체는 아니었다고 해도 군부통치 시대를 마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의 출범은 노태우 군사정부의 뒤를 이었다는 점에서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나름 민주화의 한 축이 정권을 잡았다는 측면에서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김영삼 정부 초기 시행했던 일련의 개혁과정은 기대감을 갖게 했다.

우선 김영삼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권위의 상징이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를 국민에게 개방하면서 사회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바로잡고 ‘5.16군사혁명’을 5.16군사쿠데타로 정정했다.

이와 함께 군대 내 사조직으로 문제가 많았던 하나회를 해산시키면서 군대 내 쿠데타 음모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국민학교’란 호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일제의 상징이었던 경복궁 앞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였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은 사회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경제와 정치, 행정 등 사회 모든 분야가 김영삼 정부 초기 개혁대상이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바로 이틀 후인 1993년 2월27일 김영삼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공개하고 아울러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촉구하게 된다.

이에 삼부요인과 고위 공직자들은 연이어 재산을 공개하게 되었다. 공직자 재산공개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1차 재산공개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의 공개에 의한 공직자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2차 재산공개는 국회에서 통과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에 의한 필수적 선택이 되었다. 법 개정 후 발표된 공직자들의 재산공개 과정에서 많은 공직자들이 허위로 재산을 누락하거나 부동산 투기 등 물의를 일으킨 사실이 공개돼 공직을 떠나거나 경고를 받게 된다.

또한 이전까지 차명계좌를 통해 재산을 은닉하던 관습을 없애기 위한 조처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였다. 1970년대 한국사회는 압축적 경제성장을 해오던 과정에서 개발을 빌미로 한 금융거래에서 무기명 혹은 가명의 금융거래를 통해 음성, 불로 소득이 확대되었다.

더욱이 이런 금융거래는 공직자들의 재산 탈루와 은폐의 주범으로 작용하면서 계층간 소득과 조세부담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이는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허탈감을 자극해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쳤고, 각종 부정부패의 원인으로 국민들 간 위화감을 극에 달하게 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전까지 관행처럼 이뤄져 오던 가차명 계좌 사용 금지와 함께 모든 금융거래를 자신의 이름으로 하고 금융기관들도 반드시 실명을 확인토록 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이런 김영삼 정부의 개혁 노력은 당시 국민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된다. 대통령 선거 당시 42% 지지율로 당선되었으나, 개혁정치를 해가는 과정 속에서 김영삼 정부의 지지율은 무려 90%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개혁은 여기까지였다.

94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쌀개방을 허용해 농민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그의 신경제정책이 제 길을 잡지 못하면서 일련의 개혁입법들이 애초의 취지와 다르게 변질되어 갔다.

여기에 취임 초기 자신의 정권은 ‘5.18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발언과 헌법재판소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았으나, 당내 5공 인사와 보수세력의 반발로 5공화국 책임자 처벌을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된다. 결국 국민의 뜻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은 이뤄졌지만 계속되는 감형 속에서 정권 말에 사면을 하게 된다.

더불어 경제의 지속적인 하락과 독단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들이 맞물리면서 국민의 지지가 시들해지고 결국에는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면서 김영삼 정부의 지지율은 곤두박이칠 치게 된다.

그러나 초기 김영삼 정부가 보여줬던 일련의 개혁은 당시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호응을 얻었고, 이 시기 등장한 5인조 신인그룹 Zam(잼)의 노래 ‘난 멈추지 않는다’는 당시의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마치 김영삼 정부 초기의 개혁 드라이브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큰 사랑을 얻기에 이른다.

 

최현진 담쟁이기자 단국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매체인 ‘코리아포커스’ 기자로 일했으며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의 교육위원을 맡기도 한 DMZ 기행 전문해설사다. 저서는 <아하 DMZ>, <한국사의 중심 DMZ>, <DMZ는 살아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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