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23) 이미자 : 유달산아 말해다오(1969)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는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선거였다. 우선 야당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건 김대중이 이후 김영삼과 함께 야권의 쌍두마차가 되는 과정이었고, 3선을 노린 박정희는 온갖 부정선거로 간신히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는 더 이상의 대통령 직접 선거를 금지하는 계기가 됐다. 사회적으로는 영호남 갈등의 불씨를 가져왔다. 김대중 개인에게는 사고와 납치, 연금과 고문 등 고난의 시작을 알리는 때였다.
대통령 선거가 있기 2년 전인 1969년 박정희와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가능케 하기 위한 3선 개헌안을 야권에 대한 협박과 매수를 통해 야당 의원들이 없는 가운데 2분 만에 날치기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고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나오게 된다. 야당에서는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야당에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자성으로 ‘40대 기수론’이 불어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신민당의 7대 대선 후보 지명식에 최초로 출마 선언을 한 김영삼에 이어 이철승, 김대중까지 3명의 40대 후보가 연이어 나오면서 국민적 이목을 끌게 된다.
야당의 후보지명전에서 애초 소수파였던 김대중은 다수파인 김영삼에게 밀려 1차 후보지명전에서 2위로 최종 지명전에 오른다. 1차 지명전에서 대승을 거둔 김영삼 측은 너무도 당연히 자신이 야당 후보로 지명될 것을 기대했으나 당시 1차에서 탈락한 이철승 측 지지자들이 대거 김대중쪽으로 옮아가면서 김대중은 예상을 깨고 신민당 대선후보로 지명되어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은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한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대선을 치르게 되지만 김대중의 바람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투표 직전 대대적으로 호남 후보에게 투표하지 말라는 전단을 영남지역에 뿌리면서 지역감정을 자극했고 더불어 군대를 동원한 부정선거 등으로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게 된다.
결국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진’ 김대중은 야권의 새로운 지도자 반열에 올라섰지만 그에게 겨우 이긴 박정희에게는 눈엣가시가 되고 만다. 선거에서 석패한 뒤 김대중에게는 갖가지 석연치 않은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계속된다.
1971년 1월 동교동 자택 마당에 담뱃갑 은박지로 싼 장난감 권총용 화약에 배터리가 연결된 사제 폭발물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처음엔 김대중의 조카인 김홍준(당시 15세)이 장난으로 그런 것이라고 자백하면서 해프닝으로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김홍준이 경찰의 위협과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 자백한 것이라며 이내 진술을 번복하자 경찰 수사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결국 김홍준은 검찰의 구속 소명자료가 불충분하여 법원으로부터 석방 판결을 받는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그해 5월엔 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이 탄 차량과 14톤 대형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으며 그 자신 별세하기 전까지도 이 사고를 당시 정권의 암살 음모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 사건 또한 14톤 대형트럭 기사가 최근 인터뷰에서 순수한 사고였다고 고백함에 따라 그저 음모로 일단락되었다. 일련의 사건 사고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 치료차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한다. 1972년 10월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방일한 김대중은 며칠 뒤인 17일 비상계엄령과 함께 박정희가 종신제 대통령을 꿈꾸며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 유신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외신을 통해 유신체제를 비판하였고 1973년 7월6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초대 의장으로 취임해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김대중의 이런 반정부 투쟁을 못마땅하게 여긴 박정희 정권은 같은 해 8월8일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바다에 수장할 계획을 실행했으나 김대중은 이 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다. 이후 김대중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박정희 정권이 있는 동안 어떠한 정치적 활동도 하지 못한 채 연금과 구금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에 대한 탄압은 김대중 개인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전에 불렀던 이미자의 ‘유달산아 말해다오’란 노래를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해버렸다. 또 1972년에 나온 ‘영산강아 말해다오’ 역시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소리 소문 없이 금지해버렸다. 이미자의 노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1971년 당시 대통령 선거의 억울함을 담아 불려졌고, ‘영산강아 말해다오’는 김대중의 미래를 예견한 것으로 비쳤다.
최현진 담쟁이기자 단국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매체인 ‘코리아포커스’ 기자로 일했으며 통일부 부설 통일교육원의 교육위원을 맡기도 한 DMZ 기행 전문해설사다. 저서는 <아하 DMZ>, <한국사의 중심 DMZ>, <DMZ는 살아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