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정훈의 ‘여명의 눈동자’(15)

▲ 15일 민중총궐기 참가자들이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10월에 시작된 비상정국은 11월12일 광화문 100만 촛불집회로 발전했다.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 거부와 모호한 ‘책임총리’ 제안에 대해 국민은 다시 즉각 퇴진, 100만 시위로 반발하며 단호히 거부했다. 14일 끝없이 동요하던 민주당도  ‘추미애 소동’ 끝에 결국 대통령 퇴진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무성 전 대표를 필두로 한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도 이제 탄핵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질서 있는 하야’와 탄핵 정국이 시작이다.

필자는 지난번 글에서 현 비상시국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한국 보수진영 내부의 권력투쟁, 즉 친박계를 대체하려는 새로운 보수세력의 비상한 움직임이라고 추론했다(여기서는 이들을 ‘신보수’라 부른다. 이들은 사실상 ‘총성 없는 쿠데타’를 주도하는 세력이다). 국민대중의 진출이 비상히 확대될 경우 이들의 출로 중 하나가 여야합의에 의한 탄핵일 것으로 예상했다. 비상시국 4주째로 접어든 지금 탄핵 국면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야당의 야합을 막고, 탄핵 국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제가 진보진영에 시급히 제기되고 있다.

1. 하야 거부, 박근혜만 버티는 게 아니다

현재 청와대와 박근혜가 하야를 거부하며 버티는 것으로 판단하면 오산이다. 한국의 수구보수를 구성하는 모든 기득권 세력이 현재 박근혜의 즉각 하야를 원치 않는다. 즉, 친박계, 비박계, 친이계,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 재계, 미국 등 한국의 수구보수체제를 유지해온 모든 세력이 박근혜를 탓하면서도 즉시 하야는 완강히 저지하며 버티려 한다. 수구보수세력이 내부적으로 친박계파를 제거하는 혈투를 벌이면서도, 박근혜의 즉각 퇴진에 대해서는 일제히 반대하며 공동으로 막고 있다. 100만 촛불시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즉시 하야가 결코 쉽지 않은 이유이다. 그럼 이들은 왜 박근혜 즉각 하야를 완강히 거부하며 ‘탄핵 국면’을 오히려 유리한 퇴로로 설정하는 것일까?

‘신보수’ 세력의 궁극적 목적은 새로운 형태의 보수정권 창출이다. 이들은 이미 4,13총선 당시부터 민심과 이반된 박근혜식 정치는 수명이 다했다고 판단해 왔다. 그래서 이들은 수구보수 내부에서 지금 ‘총성 없는 쿠데타’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신보수는 자기의 새로운 정치프로그램을 전개할 시간과 준비공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의 1차 목표는 대선이 아니라 개헌이다. 이들의 정치프로그램은 1차로 여야합의 개헌이며, 이것이 불가할 경우 전열을 정비해 대선에 임하는 것이다. 이들의 개헌안에는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가 포함된다. 그런데 만약 박근혜가 즉각 하야하게 되면 그런 정치프로그램은 심각한 차질은 빚게 되며, 결과는 신보수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2. 즉각 하야를 거부하는 3가지 이유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 이유는 간단하다. 대통령이 즉각 하야하면 헌법에 따라 2개월 안에 대선을 해야 하는데, 현재 국민들의 반새누리당 정서 속에서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새누리당은 필패이다. 새누리당은 현재 지탄과 해체의 대상이며 대선 주자들은 지리멸렬 상태이다. 신보수 입장에서는 이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정치지형과 환경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한다. 새누리당 해체 후 새 정당을 정비할 절대적 시간과 ‘최순실-박근혜 국면’을 밀어낼 초대형 이슈가 절실하다.

둘째는 대통령이 즉각 하야할 경우 국면의 주도권을 완전히 야당과 국민에게 빼앗기게 된다. 하야는 국민의 ‘1차 승리’를 의미한다. 비상정국에서 국면의 주도권을 놓치면, 즉 국민대중이 승리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으로 본격 진출하면 정권 장악은 고사하고 칼날이 수구보수세력 전체로 향하게 된다. 이렇게 즉각 하야 여부는 박근혜와 청와대만이 아니라 수구보수 전체의 생존권과 직결되어 있다. 셋째 이유는 집요한 미국의 이해관계이다. 미국은 박근혜 정권을 이미 버렸다. 박 정권은 토사구팽당한 정권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박 정권 임기 내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과 사드배치 문제를 서둘러 마무리하려 하고 있다.

3. 책임총리 ‘꼼수’의 파탄과 민주당의 동요

청와대가 지난주 내놓은 ‘책임총리제’는 엄밀히 말하면 현행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헌법상 총리의 원래 고유권한이란 얘기다. 문제는 이제까지 대통령이 편법으로 총리 권한마저 독점해온 것이다. 청와대 얘기는 원래 총리에게 고유한 권한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2선으로 물러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속셈이다. 당장 위기를 모면하고 박근혜-최순실 사건의 진상을 축소하면서 계속 ‘2중 권력’을 유지하려는 꼼수이다. 이는 차후 남북관계 등 위기상황을 명분으로 언제든 번복할 수 있다. 

청와대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 책임총리 제안에 대해 민주당 측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국 서울대 교수와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등이 헌법 71조 조항을 거론하며 ‘거국내각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나섰다. 그러나 현행 헌법 어디에도 식물대통령, 허수아비대통령을 1년 이상 그대로 두고 책임총리든, 총리 권한대행이든 비정상적 상태를 유지하라는 규정은 없다.

현행 헌법은 정상적인 대통령의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다양한 경우를 대비하여 가능한 대책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대통령 사임시 2개월 내 재선거로 대통령을 새로 뽑거나, '대통령이 궐위(자리가 빔)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71조).

사상 초유의 광화문 100만 집회에 움찔한 청와대는 책임총리 제안이 안 먹히자 한발 더 물러나 대통령 2선 후퇴를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즉각 하야를 거부하면서도, 대통령의 전권을 권한대행 총리에게 넘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자 민주당은 크게 동요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14일 야3당 공조를 깨면서까지 독단적으로 전격 영수회담을 제안했다가 당내 반발에 부딪혀 취소하는 어이없는 소동을 벌였다.

4. ‘2선 후퇴’와 탄핵 유도, 본질은 같다

즉각 하야를 거부하는 박근혜 청와대가 100만 광화문 촛불에 떠밀려 3번째 담화를 발표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인 ‘2선 후퇴’ 선언밖에는 없어 보인다. 다만 그것이 내치 및 군통수권과 외교권을 분리한 2선 후퇴 선언일지, 전권위임 권한대행 총리일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실패한 박근혜-추미애 영수회담 소동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청와대가 전권위임 권한대행 총리를 카드로 내놓는다면 2선 후퇴와 대통령 잔여 임기보장을 맞바꾸려는 의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청와대의 이런 전권이양 카드에 민주당이 우왕좌왕하며 계속 동요할 것이란 점이다. 그렇지 않고 청와대가 실질적인 2선 후퇴안을 꺼내지 않거나, 박근혜-추미애 회담 실패처럼 협상 유도에 실패하면 남은 길은 탄핵이다. 그러나 현 사태의 큰 그림을 그리는 신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2선 후퇴든 탄핵이든 어떤 형태로 결론이 나도 상관없이 문제를 제도정치권으로 흡수하여 수습하고 시간을 벌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5. 탄핵은 ‘승리’가 아니다

박근혜 청와대는 탄핵을 피하고 싶겠지만, 수구보수세력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탄핵은 완전한 패배는 아니다. 신보수에게는 합리적이며 유리한 출로가 된다. 탄핵 과정을 예상해보자. 이들에게 탄핵안은 부결되면 더 좋고, 가결되어도 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탄핵 추진과정이며 시간이다. 특검 등 탄핵 전후 과정을 포함해 8개월에서 최장 1년 정도의 시간을 벌면서 새누리당을 해체하고 이른바 ‘합리적 보수’로 포장한 세력을 규합하여 신당을 창당한다. 집권을 위해 수구보수진영을 재정비한다. 물론 시간을 단축하려할 것이다. 이들은 국민대중의 반정부 열기와 사회개조 열망을 정치권으로 흡수하고 개헌으로 국면을 전환하려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다.

탄핵은 국민대중의 즉각 하야 요구가 거세질 경우 신보수가 쓸 수 있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카드였다. 14일 여야의 특검법 합의로 대통령 수사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야당이 추천한 특검의 수사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진상을 감추는 것도 더는 가능치 않다. 신보수에게는 과거 청산의 명분을 제공할 꼬리 자르기 재물로 필요할 따름이다. 이미 정치적으로는 사망한 상태인 박근혜와 친박계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

6. ‘적과의 동침’ 끝, 분리되는 반박근혜 전선

청와대와 야당의 ‘2선 후퇴’ 야합이 실패할 경우 탄핵 국면의 도래가 예상된다. 국민이 즉각 하야를 계속 요구하는 한편에서 동시에 탄핵이 추진되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시작된 비상시국에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유지되던 ‘반박근혜 전선’은 끝이 난다.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한판 싸움이 기다리고 있어 ‘적과의 동침’은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된다. 신보수는 박근혜와 친박계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는 1차 성공한다. 만약 야권이 탄핵과 동시에 즉각 하야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흐름에 합류할 경우 상호 대립은 불가피하다. 신보수의 전위대 조선일보는 평화로운 하야 촛불도 불순하다고 공격해 올 것이다.

촛불민심이 2선 후퇴론을 넘어 즉각 하야 운동으로 지속된다면 야권 내부의 입장 분화도 시작되리라 예상된다. 이재명, 박원순 시장 등은 즉각 하야를 주장하고 있고 안철수 전 대표도 퇴진과 조기 대선을 주장하고 있다. 야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인 문재인 전 대표의 태도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전선은 새롭게 재편되어 가는데 국민을 믿고 국민과 함께 새누리당에 맞서 투쟁하며 새로운 민주정부를 건설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현실론으로 포장하려 애쓰지만 전형적인 소탐대실형 실리주의 정치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7. 탄핵 국면과 새로운 전선

야당의 탄핵 발의를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제는 탄핵이 아니라 탄핵소추안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넘어설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보수의 반박전선 이탈로 흐트러질 전열을 서둘러 정비하고 국민의 힘을 믿고, 박근혜 즉각 퇴진투쟁과 조기 대선 슬로건을 계속 밀고나가야 한다. 국민의 힘으로 박근혜 하야를 실제 관찰해야한다. 탄핵에 의존하는 길이 아니라 국민을 믿고 풍파를 헤치며 조기 대선으로 민주정부 수립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반박 전선의 분리에 따라 앞으로의 투쟁 양상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즉각 하야와 정국 주도권 문제를 놓고 국민대중과 새롭게 등장할 신보수 세력의 대결이 전개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의 투쟁은 조선일보가 칭송하는 온건한 촛불만으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평화적 집회는 물론, 강력한 시위와 파업투쟁이 배합돼야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투쟁은 국민대중 속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광장에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정치인을 선별하고 본격적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대장정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 12일 민중총궐기에서 민주노총이 노동자대회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민주노총]

관련기사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