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정훈의 ‘여명의 눈동자’(10)
| 국제 정세를 짚어보는 ‘여명의 눈동자’, 이번 편은 미국 대선 분석과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내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 목차 - 1. 미국 대선이 웃기는 이유 2. 미국, 날개 없는 추락 3. 트럼프 현상의 본질 4. 군산복합체가 주도하는 ‘군사자본주의’ 국가 5. 트럼프는 군산복합체에 저항할 수 있나? 6. 미 대선과 한반도 평화협정 |

이번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될 것이라고 예측한 언론과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의 올해 4.13 총선이 이변이었다면, 현재 미국의 대선은 대이변의 연속이다. CNN,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미국 주류언론이 트럼프를 ‘미치광이 막말제조기’로 묘사했고, 본격 대선 레이스 에서도 힐러리 클린턴을 일방적으로 지지해 왔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계속 이기고 있다. 미국 선거는 공화당 경선 반전을 이어 계속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예측불허이다.
이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당선 가능성을 예측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다. ‘트럼프 현상’은 무엇인가? 정말 그렇게 반동적인가? 우리에게는 긍정적 현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 사태인가?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이러한 미국의 변화 조짐이 한국 보수정권에게는 달갑지 않은 흐름일 것이다. 한국 정부와 한국의 주류언론은 미국 기득권 체제의 관점에 적극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현상의 본질과 그것이 한(조선)반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지 차례로 알아보자.
1. 미국 대선이 웃기는 이유
첫째, 올해 미국 대선은 전통적인 선거 공식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선거다. 전통적인 기성 엘리트 정치인들이 모두 고전하고 버니 샌더스, 트럼프와 같은 비주류와 이웃사이더가 판을 주도하고 있다. 젭 부시, 마르코 루비오, 테드 크루즈 등 공화당 주류 정치인들은 정치 아웃사이더 트럼프에게 안방을 내주었고,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에 대한 미국 유권자 선호도는 역대 최악이다. 8년 전 최초의 흑인대통령 오바마를 통해 변화를 열망하던 선거 분위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신에 무언가 미국인들은 답답함 속에 ‘현상타파’를 원하고 있다. 뚜렷한 대안은 없지만 아래로부터의 이변과 변화를 분명 갈망하고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대선주자임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의 전통적인 주요 정책과 노선에 반기를 들고 있다. 사실상 외부인물 트럼프가 공화당을 접수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무늬만 공화당’ 후보이다. '반(反) 트럼프'를 선언한 공화당 지도자급 인사가 최소 110명을 넘었고, 전 부시(아버지) 대통령과 일부 공화당 지지자들은 힐러리를 지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또한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Wall street)가 지지하는 대표가 아니다. 월가는 반(反)세계화 신고립주의 슬로건을 표방하는 트럼프가 아니라 민주당의 힐러리를 지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주류언론이 지지하는 대표가 아니다. 그는 미국 주류언론과도 싸우고 있다.
그렇다고 트럼프는 케네디처럼 미국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호감 후보도 아니다. 힐러리와 마찬가지로 역대 최악의 비호감 후보이다. 그런데도 힐러리는 트럼프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대선 최종 결과와 관계없이 미국의 기성 정치세력은 이미 이 선거에서 완전히 졌다. 지금 미국 대선은 과연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미국의 정계, 재계, 언론 등 역대 ‘정권제조’ 세력들이 어쩌다가 하잘 것 없어 보이던 정치 아웃사이더, 한낱 부동산 갑부와의 한 판 싸움에서 이렇게 완전히 밀려났을까?

둘째, 이번 미국 대선에서는 공화 민주 양당 선거구도와 전통적인 지지층을 둘러싼 기존의 공식이 깨지고 있다. 현재 미국 정치의 기둥인 백인 중산층이 양당의 기성 엘리트 정치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있다. 특히, 백인 중하층 블루칼라 계층이 민주당을 떠나고 있다. 민주당의 정책이 자신들의 불안과 위기감을 해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의 신세대인 ‘밀러니엄 세대’(1980~2000년 출생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 강하다. 대체로 한국의 20~30대와 유사한 정치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이 변하고 있다. 그들이 최근 트럼프 지지로 서서히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들 신세대가 미국이 건국 이래 유지해 온 오랜 전통적 양당의 체제와 가치를 더는 신뢰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셋째, 미국인들은 이번 선거를 ‘차악’을 뽑는 선거로 느끼고 있다. 누가 더 악마가 아닌가를 고르는 게임에 동원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본질적으로 사악하며 망가진 기득권 정치에 속하는가를 판단해야 하는 선거로 받아들인다. 트럼프의 정책은 이슬람을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이민 문제에서 인종주의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반면 최저임금 인상을 지지하는 정책은 처음부터 민주당보다 더 앞서고 있었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백인 중하층 노동자를 자극하고 있었다. 자유무역과 개방적 이민정책의 누적으로 이제 백인 중하층이 몰락하고 있다는 그의 메시지가 막말에도 불구하고 먹히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는 글이 있다. ‘식코’, ‘화씨 911’등으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 감독이 쓴 ‘트럼프가 승리할 이유 5가지’ 중의 두 구절이다: 1)“도널드 트럼프는 11월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다. 이 비참하고 무지하며 위험한, 파트타임 광대이자 풀타임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인 트럼프가 우리의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다”, 2)“ 망가진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품은 사람(유권자)들은 정말 많다. 그러므로 트럼프에 동의하지도 않고 그의 편견과 자아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냥 그에게 투표를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투표를 할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냥 깽판을 치고 엄마 아빠를(기성정치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2. 미국, 날개 없는 추락
트럼프 현상은 늙고 추락하는 미국과 깊은 연관이 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외교적 위기는 우리가 아는 상식보다 더 심각하다.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급성장하며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대국으로 등장해 전후 세계 자본주의 총생산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국으로 성장한다. (현재는 GDP 규모가 세계 총생산의 23%(2011년) 정도를 차지하는 비중으로 줄었다.) 2차 대전 이후 미소 양극 체제 경쟁 속에서 유럽과 일본의 부흥과 함께 60년대까지 자본주의의 안정적 성장기를 누린다.

그러나 이미 70년대부터 무역, 재정 적자가 시작되어 달러와 금의 교환을 정지하는 이른바 ‘닉슨쇼크’(금태환 정지)가 시작된다. 달러위기의 시작이자 미국의 성장기가 끝나고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는 징조의 서막이었다. 미국 경제는 이미 70년대에 1,2차 오일쇼크와 불황과 공황을 피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으로 만성적 스태그플래이션에 시달렸다. 이후 레이건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새로운 처방전으로 들고 나왔다. 만약 1991년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라는 외부로부터의 큰 호재가 없었다면 미국의 공황과 모순은 아마도 1990년대에 발현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와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자본주의는 다시 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영원한 제도로 추앙되었으며 영미 액글로 색슨 금융자본은 때를 만난 물고기마냥 세계 경제구조를 파격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제3세계 국가들의 금융 주권과 높은 규제 장벽을 허물고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이 흐름에 반기를 드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세계 도처에서 쿠데타, 내전 유발, 전쟁도 불사하였다. 미국은 과거처럼 소련과 비동맹국가들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었다. 이라크 전쟁이 개시되었고, 이어 1994년 북한(조선)과 전쟁위기가 조성되었다. 남한도 중남미 국가들처럼 예외 없이 1997년 IMF 사태를 맞아 자본, 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하게 된다. 더불어 미국은 적기에 ‘정보통신산업’을 선도하며 새로운 세계 시장을 개척해 미국과 세계 경제에 다시 활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소련 붕괴 이후 불과 17년 만에 세계자본주의를 위기로 몰고 간 2008년 미국발 대공황(금융위기)이 다시 발생한다. 이는 1930년 공황 이래 최악의 세계 공황이었으며 냉전체제 붕괴 후 질주하던 미국식 앵글로 색슨 자본주의의 시대가 다시 내리막길로 힘없이 곤두박질치는 순간이었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여전히 글로벌 경기침체는 근본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고, 구조적이고 필연적으로 유사한 공황이 재현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공황과 장기 경기침체의 여파로 한국과 마찬가지로 지금 미국 중산층 몰락문제는 심각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수백만의 중산층 백인들이 하층 서민층으로 추락해 70년대에 60% 이상을 차지하던 미국 중산층의 비율은 최근 50% 이하로까지 내려갔다. 생계유지가 곤란한 극빈층도 6천만이 넘어, 전체 미국 인구의 20%에 달한다.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
미국의 야심찬 경제부흥 계획 중 하나는 신에너지 산업인 이른바 ‘셰일가스 혁명’이었다. 새로운 가스와 유전의 기술개발로 제2의 미국시대를 열려는 꿈이었다. 실제로 셰일에너지 개발로 미국의 일일 석유 생산량은 2008년 500만 배럴에서 2014년 867만 배럴로 70% 이상 급증했으며 무역과 재정적자도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바닥을 쳤던 미국의 경기가 조금씩 상승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셰일에너지 개발 업체들은 줄 파산 했다. 세일혁명은 과장임이 증명되고 있고 미국의 제2부흥론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추락하는 미국에 날개가 없다.
3. 트럼프 현상의 본질

트럼프의 막말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힐러리나 기존 공화당 유력주자처럼 득표를 위해 정제되고 포장된 정책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길거리나 주점에서 할 수 있는 말을 여과 없이 선거전에서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것이 그의 선거유세 방식이었다. 기존 공화당 주자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종교차별, 인종차별, 친푸틴 러시아 발언 등 금기시되어 온 정치언어를 쏟아내며 좌충우돌했다.
미국은 트럼프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의 막말보다 못한 기득권 양당 정치권과 E메일 스캔들과 자신의 건강문제조차 거짓으로 변명하는 듯 보이는 진부한 후보 힐러리에 지쳤다. 트럼프에 열광하는 미국인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반면 힐러리와 미국 엘리트 기득권 정치권에 지친 미국인은 대단히 광범위하다. 현재 미국의 문제는 트럼프의 언행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미국 민중의 불만을 기존 정치권에서 거의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이 처한 전반적인 정치경제적 위기와 이에 따른 중산층의 붕괴와 서민들의 생활 불안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트럼프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된다.
미국 대선의 이변인 버니 샌더스의 부상과 트럼프 현상은 사실 본질상 유사한데, 그들의 인기는 미국 중산층의 몰락을 공통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트럼프의 막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현에는 일관된 지지층 지향과 대내외 정책 방향이 있다. 그의 정책이 무정부적이거나 비이성적이고 기본 방향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은 저학력·저소득 백인 보수층이다. 미국 주류 사회를 이끌어오던 전통적인 엘리트 백인 보수층이 아니다.
조지 레이코프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교수의 트럼프 현상 분석을 인용해 보자. “수천만 명에 달하는 미국 내 보수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중산층 이하의 백인 남성이다. 자신이 이민자·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 한다. 트럼프는 금기였던 이런 생각을 큰 소리로, 그것도 수치심 없이 외치고 있다.”
버니 샌더스가 미국의 위기 극복 방안으로 부자 증세, 복지확대, 무상 등록금, 금융자본 제재 등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복지 정책을 내세워 화이트칼라-백인을 자극했다면, 트럼프는 몰락하는 저학력 백인 중하층을 자극했다. 그는 세계화가 아닌 경제 국수주의(the economic nationalism)를 말한다. “미국이 먼저다(Put America first)”는 그의 선거 구호는 백인 중하층 노동자들을 겨냥하는 것이다. 트럼프 현상을 확대해석하여 미국 주류 정치의 반동적 파시즘의 부활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무언가 현상 타파를 원하는 대중의 바람이 그의 우파적, 국수주의적인 흐름과 결합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회에 계속)

이정훈 위원은 1985년 고려대 광주학살원흉 처단투쟁위원회 위원장, 삼민투 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3년 옥고를 치른 뒤 오산과 수원에서 노동자회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런던대 아시아태평양 지역학 석사과정,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통합진보당 교육위원, 경실련 하이텔정보교육원 이사, 사람과 사상 소리클럽 출판사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민플러스 편집기획위원으로 국제팀장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