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계단 오르기]첫 번째 계단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 14

언젠가 경주마의 눈가리개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말은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도 약 350도 정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넓은 화각에 비해 식별능력은 바닥이라 사물을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고 어른거리는 모습으로만 인식한다는 것이다. 대상이 불투명할 때 불안감이나 공포감은 더 심해지는 것이겠지. 그래서 말이 체구에 비해 겁이 많은 것일까. 특히 경주마의 경우 다른 말이 뒤나 옆에서 따라 붙는 모습이 보이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자꾸 한쪽으로 피하려 해, 차안대를 씌워 앞만 보고 질주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책상 앞에 쏟은 코피처럼

그해 가을, 나는 차안대를 쓴 경주마와 다를 바 없었다. 좌우가 막힌 독서실 책상은 그야말로 내 차안대였다. 나는 잠시 아기의 울음소리도 빠징고에 빠진 아버지도 잊었다. 그저 흔들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세계사나 국사교과서만 정면응시할 뿐이었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리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 목표에 도달하면 과연 인생이 달라질까. 그런 생각도 잠시, 국정교과서에 코를 박은 채 책상에 엎드려 잠들기 일쑤였다.

그런 날 새벽노을은 코피 같은 붉은 색으로 번져왔다. 나는 밤새도록 책상에 앉아 있어서 퉁퉁 부은 다리로 독서실을 나왔다. 희붐한 새벽에는 낮에 들리지 않는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넓은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낙하하는 소리. 차바퀴 구르는 소리. 헤드라이트에 비친 부윰한 아침 안개가 먼지처럼 흩날리는 소리. 청소부 아저씨가 보도블록을 쓰는 비질 소리, 그리고 멀리서 우유배달부의 자전거 끄는 소리가 들리면 비로소 가로등이 하나 둘 꺼졌다. 나는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밟으며 비탈길을 올랐다. 그리고는 엄마가 준비해 놓은 도시락을 들고 다시 학교로 가곤 했다.

알레그로 알레그로, 세월은 가고

한 친구는 시험이 임박해지면서 고개가 9시 50분 방향으로 기울어져 돌아오지 않았다. 고3 병이라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수업이 끝나는 벨이 울리면 가장 먼저 매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먹기만 하면 음식이 식도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친구, 수시로 복통을 호소하는 친구, 또 어떤 친구는 째째파리에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머리를 주억거리며 끝없이 졸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불안할 뿐이었고 닳아빠진 책상 모서리처럼 윤기를 잃은 채 꺼칠해질 뿐이었다.

그 즈음 유일한 즐거움이 있다면 경윤이가 피아노 연습을 하는 연습실에서 그녀의 연주를 훔쳐 듣는 일이었다. 그녀는 야간 자율학습 대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피아노 연습을 했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으면, 참을 수 없이 멜랑꼴리해져 라인 강에 투신해버린다는 로렐라이 전설처럼 한없이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아가미로 숨을 쉬다 허파로 숨을 쉬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것은 충만함인지도 몰랐다. 시간은 없어지고 소리의 파장만이 있는…. 경윤이는 그날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사방은 망망대해. 배가 한 척 떠 있다. 갑판 위의 하얀 그랜드 피아노. 달빛이 금가루처럼 쏟아지고 하얀 파도가 배 안쪽으로 튀어 들어온다. 건반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물거품이 갑판에서 하얀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건반이 파도처럼 하얗게 일어난다. 알레그로 알레그로….

그때 갑자기 건반을 쾅, 하고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엉겁결에 연습실의 문을 확 열었다. 그녀가 건반 위에 이마를 묻고 있었다. 하관이 빠른 세모진 턱뼈. 날카로운 얼굴 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을 감히 고독이라 말할 수 있을까. 흘러내리는 고독을 마치 석고로 응고시켜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 그 이야기 들어봤니?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이란 곡에 얽힌 얘기. 그 작곡가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자기 영혼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악마와 계약을 맺었대. 악마에게 자기 바이올린을 넘겨주었는데 모든 상상을 초월할 만큼 절묘한 연주를 하더라는 거야. 그 작곡가가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들은 대로 그 소리를 재현해보았대. 그 곡이 바로 ‘악마의 트릴’ 이고. 물론 자기가 최고 명작으로 꼽는 곡이긴 하지만 꿈에서 들은 것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고 해.”

그녀는 7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웠다고 했다. 모 대학 교수에게 레슨을 받았는데 그 교수는 달걀을 쥔 손 모양을 해보라고 하고선 손등 위에 동전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한 순간 힘을 빼면 손목이 건반 아래로 처지면서 동전이 떨어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손등 위로 사정없이 회초리를 내리쳤다는 것이다. 그녀는 시험이 임박한 요즈음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며 손가락이 마비되는 악몽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나도 요즘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내 머리 속에 마녀가 만든 메토로놈이 있어서 자꾸 딱딱 소리를 내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 박자에 기계적으로 맞추게 돼.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계적으로 말이야.”

왼손과 오른손의 불화

한때 나도 잠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피아노엔 재능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특히 왼손은 반주를, 오른손은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내 진도는 늘 제자리였다. 그러던 중 존경하던 선생님이 내게 특별히 결혼식 반주를 부탁했다. 그 선생님의 결혼식은 불행하게도 4월이었다. 꽃샘추위가 닥친 그날 내 손은 살얼음이 박힌 듯 차갑고 뻣뻣했다. 주먹을 쥐었다 펼 때마다 살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급하게 손을 호호 불어 녹였지만 곱은 손은 펴지질 않았다. 그 상태에서 신랑 입장이 있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유모레스크를 연주했다.

그러나 신부가 입장하는 결혼행진곡에서는 반주와 멜로디가 분리되는 불협화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더욱이 늦게 도착한 행사요원이 반짝이 리본을 잘못 뿌려대는 바람에 결혼식은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내 잘못된 연주가 결혼식을 망치기라고 한 것처럼 그날 이후 난 선생님을 만나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특히 피아노 소리만 들으면 그때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에서 땀이 났다. 내 오른손과 왼손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걸은 것 같았다. 그래서 피아노만 보면 누구보다 좌절했고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심과 동경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황금빛 음표

나는 경윤이의 절망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우리의 젊음이 이렇게 막막해도 되는 것일까. 어둠이 깔린 도시처럼 이렇게 윤곽을 잃어도 되는 것일까.

그곳은 바닷가야. 밤인데 월광 때문에 환해. 배가 한 척 떠 있는데 그 위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어. 누군가 피아노 앞에 앉지. 그리고 가만히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아. 주위에는 하얀 새들이 날아다녀. 달빛을 한 모금씩 입에 문 새들은 그에게로 날아가는데 그 앞에서 입을 열면 황금빛 음표로 변해버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지.

경윤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넌 시인 같아….”

우리는 연주실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연주실 앞에는 조그만 복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의 알 수 없는 미래가 물에 얼비친 불빛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허리가 휘어진 복개천 뒤로 직선으로 뻗은 고가도로가 보였고 그 뒤로 수직으로 곧게 솟아오른 아파트가 보였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경주마처럼 차안대를 쓴 채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속력의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여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 시간이 바로 저 직선의 세계에 편입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직선의 도시 곳곳엔 곡선이 숨어 있다. 이념서적을 파는 고서점이나 우체국, 그리고 우리가 종아리를 드러낸 채 서서 먹던 떡볶이 가게나 포장마차, 직선에서 이탈한 것들이 곳곳에서 시간의 속도를 꺾고 있었다. 그날 난, 아니 우리는 도심 속을 내려다보며 우리의 미래를 이미 예감한 것은 아니었을까….

 

강의 허리가 굽은 것은

오랜 세월 보이지 않는 길을 돌아온 탓이다.

산비탈 숨어 있던 길이

신작로로 흘러나와 최단거리를 꿈꿀 때도

강은 여울목에서 또 한 번 제 속도를 꺾었다.

물살을 잡아당기는 이끼들

어쩌면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들이 흘러가는 것이어서

강의 어귀엔 그토록 많은 갈대나 부들

모래알들이 서성대는 것일까.

강물 위로 직선의 포장도로가 달려가도

그리운 것들의 옆구리엔 삼각주가 있다고

강은 몸을 틀어 제 생의 굽이를 만들어 보였다.

한 번씩 몸을 비틀 때마다

쉼표 같은 물방울들이 무수히 태어났다.

저 강은 알고 있을까.

밤마다 내가 한줄기 샛강이 되어

탯줄 끊듯 허리 꺾는 이유를

 

-졸시 ‘샛강’ 전문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야매미장원에서'가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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