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몰락(2)

편집자주
인도 전문가 이병진 교수의 중동, 중앙아시아 정세에 대한 글을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복잡한 중동. 중앙아시아 정세를 개괄하고 인도문제까지 조명하며 미국의 패권몰락양상과 동북아정세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한다.

중동·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몰락

-차 례-

1. 시작 글
2. 초 강대국 미제국주의 단일 패권과 중동정책의 모순
(1) 미국의 ‘신질서(New Order)’
(2) 냉전시기, 반공주의 전선에서 미제국과 이슬람 전사들과 동맹
(3) 무자헤딘 전사들의 탄생과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붕괴
(4) 미 제국 독점자본의 탐욕과 이슬람 전사들의 반미주의
3.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패배와 미 제국의 몰락
(1) 미 제국의 중앙아시아 지배전략
(2) 러시아의 반격과 중앙아시아 인민의 반발
(3) 시리아 내전 그리고 이슬람국가(Islam State)
(4)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미제국의 패배와 몰락
4. 나오늘 글: 미 제국주의 세력 몰락은 필연

3.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패배와 미 제국의 몰락

냉전 종식 직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미 제국주의는 “팍스아메리카나”를 꿈꾸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2021년 미국은 저물고 있는 대영제국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의 부상이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를 깨는 것처럼 묘사되지만21) 그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21) 파이낸셜 타임지의 베이징 국장을 지낸 리처드 맥그레거는 그의 저서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 미·중·일 3국 패권전쟁 70년』에서 중국의 부상을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로 규정한다. (리처드 맥그레거 지음, 송예슬 옮김, 2019,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미중일 3국 패권전쟁 70년』 메디치미디어)

미국 몰락의 근본적인 요인은 미국 자신에게 있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우두머리 미국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반적 위기의 극한 지점에 서 있다. 미국의 경제 공황은 만성적이며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 내어 살려 보려 하지만, 개선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파멸적인 그들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쟁을 강요했다. 그에 따른 천문학적인 군사비 지출로 오히려 미 제국주의의 경제적 복원성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국은 안간힘을 써서 제국주의 체제를 유지해 보려 하지만 미국의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의 몰락에서 보듯이 미 제국주의 체제의 몰락은 결정적이다.

그런 미국 독점자본주의 지배체제에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구호를 들고 미국에 맞서 싸우며 반미 자주의 흐름을 견인하는 북의 영향력이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 뿐만 아니라 국제정세에 결정적인 균열을 낳았다.

(1) 미 제국의 중앙아시아 지배전략

냉전 종식 후 1990년대에 들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원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고 국제 에너지 시장은 새로운 에너지 공급원으로 중앙아시아를 주목하였다.22) 겉으로 미국은 9.11 테러 직후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전쟁을 위한 명분일 뿐 미국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였다.

22) 중앙아시아는 풍부한 자원의 보고이다.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세계 석유 매장량의 1/4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매장되어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거대한 천연가스 매장지역이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은 금광맥이 있고 타지키스탄에는 은광맥이 있다. 키르키스스탄에는 우랴늄 광맥이 존재한다(中堂辛政, 오희연 번역, 2002, 19쪽). 1994년 9월 국제안전보장회의의 성원 국가인 미국 관리는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입수한 석유개발조사보고서의 추정을 토대로 영국의 가디언지에 중앙아시아가 21세기 세기 에너지의 주요 공급지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中堂辛政, 오희연 번역, 2002, 21쪽).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랍바니 대통령과 마스드 장군이 이끄는 정부를 부정하였다. 그러면서 1994년 10월에 주 파키스탄 미국 대사를 아프가니스탄 서부의 탈레반 지역에 파견하였고 탈레반이 카불에 진격하자마자 미국의 공식 대표단을 카불에 보냈다. 이런 미국의 적극적인 관여 정책은 이미 미국은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계획을 세워 카스피해 유전과 천연가스를 빼 내 오기 위함이었다(中堂辛政, 오희연 번역, 2002, 22쪽).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미군은 자신들이 훈련시킨 텔레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과 경쟁하던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the United Islamic National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n)과 손을 잡았다. 미국은 그들을 지원하면서 안정화 작전을 전개하였다.23)

23) 텔레반 정권의 붕괴 이후 4개의 주요 부족 세력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우즈베크인 군벌 도스툼 세력, 타지크족을 이끌던 아흐메드 샤 마수드(Ahmed Sha Masoud)와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ani) 세력, 테헤란의 시아파 세력의 지원을 받는 이스마일 한(Ismail Khan)세력이 서로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태생적으로 부족과 파벌에 의존하는 취약한 정치체제였다 (이웅현, 2010, 94쪽).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임시정부는 태생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는 주요 군벌들의 허약한 연합체 정치조직이었으며 미국이 내세운 카르자이(Hamid Karzai)와 할릴자드(Zalmay Khalizad)는 미국 석유가스기업의 이익을 대표해서 내세운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24)

24) 미국 아프가니스탄 특사 찰메이 할릴자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구상하던 겐트가스(GentGas)의 고문이었고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유노칼(Unocal)의 고문이었다(이웅현, 2010, 96쪽).

미국이 중앙아시아의 중요성을 인식한 계기는 냉전 이후 카스피해 유전을 둘러싼 이권 다툼이었다. 카스피해는 소련 시기에 테지츠(Tengiz)을 통과하여 러시아의 노보로시스크(Novorossiysk)를 지나는 송유관(CPC 송유관)이 이미 건설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를 경유하지 않는 BTC 송유관25)을 건설하여 카스피해의 원유를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25)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i)-조지아의 트빌리시(Tbilisi)-터키의 세이한(Ceyhan)을 연결하는 송유관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조지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해졌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러시아와 조지아의 영토 분쟁에 개입하여 군사 고문단과 무기를 공급하였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은 터키, 조지아,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시키고 루마니아에 지대함 미사일을 배치하여 흑해에서 러시아 함대의 기동을 봉쇄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 동유럽의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미국은 동유럽의 색깔혁명 공작에 개입하였다.

미국은 2004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에 개입하여 친미 성향의 빅토르 유스첸코(Viktor Yushchenko)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그녀를 통해서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려 하였다. 결정적으로 미국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함으로써 카스피해 유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아시아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원대한 작전을 펼쳤다.

아프가니스탄의 지배는 그런 미국의 전략적 이해와 요구에 잘 맞아떨어졌다.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미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소국들에게 자유화 바람을 집어넣었고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공격적으로 친미국가 건설을 다그쳤다.

(2) 러시아의 반격과 중앙아시아 인민의 반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은 러시아의 안보 위기를 통째로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해상 진출로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6) 러시아는 미국의 중앙아시아 지배전략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반미전선으로 돌아섰다.

26) 러시아의 주력 함대는 흑해와 극동함대이다. 왜냐하면 북유럽의 해안선은 좁고 복잡해서 러시아 해군이 안정적인 해상 작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동함대가 유럽 지역까지 기동하는 것은 군사 전략상 의미가 없다. 따라서 러시아가 지중해를 통해서 유럽 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흑해가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국은 터키를 미국에 끌어들여 러시아를 제압하려하고 그런 미국의 해상 봉쇄 전략에 맞서기 위해서 러시아는 시리아에 군사 항구를 건설하였다.

러시아는 미국 독점자본가들이 독점하고 있는 원유 시장에 적극 개입 하면서 미국에 반격하였다. 러시아는 카스피해산 원유를 국제시장 가격으로 매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하였다.27) 카스피해 원유 가격이 유럽의 시장 가격으로 조정되면서 중동 산유 국가들도 카스피해 원유 가격을 참고하여 가격과 생산량을 조절하면서 큰 폭의 이익을 얻었다.28)

27) 당시 미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국제 시장 가격 이하의 싼 가격으로 매입하였다. 러시아가 국제시장 가격으로 원유를 매입하자 미국도 어쩔 수 없이 국제 시장 가격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원유를 매입해야 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육로의 송유관을 통해서 곧 바로 유럽 시장에 원유를 공급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지중해를 지나서 해상으로 원유를 수송해야 했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에서 러시아와 경쟁 할 수는 없었다.

28) 당시 석유수출기구(OPEC)에 속한 13개 나라들이 카스피해 유전가격이 오르면서 추가로 벌어들이는 돈이 1조 달러가 넘었다(M.K Bhadrakumar, "Conflict in Caucasus : A Turning Point in the Post-Cold War Era", The Marxist, XXIV3, July-September 2008, P.17).

중동지역의 유전을 장악하여 독점이익을 누려 온 미국은 카스피해산 유전의 원유가 시장에 풀리자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미 제국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군사·정치적 지배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인민의 생활 안정과 행복보다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패권 장악에만 관심 있었다.

미 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부족민의 갈등과 발전에는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안정은 요원한 일이었다. 미군이 선량한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을 무인항공기로 무차별 폭격하고 살해하였다. 그렇게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되고 생존권이 존중받지 못하자 인민들이 반발하였고 그런 저항은 필연적이었다.29)

29)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관을 전통적 삶의 방식을 고수하여 온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려는 미국의 공작은 대중들의 반발을 샀다. 그 한 사례로 2005년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Ferghana) 계곡의 안디자한(Andizhan)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미국은 2001년부터 키르기스탄과 우주베키스탄에 미군 기지를 건설하였는데 2006년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미군이 키르기스 트럭 운전사를 총으로 쏴 죽인 일이 발생하였다. 그동안 미 제국의 폭력에 불만이 쌓인 인민들이 이 일을 계기로 인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30)

30)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2009년 미군 기지 폐쇄를 결정하였다(황보연 기자, “키르기스, 미군기지 폐쇄결정 미 아프간전략 타격 예상” 한겨레신문, 2009-02-04, http://hani.co.kr 검색일: 2021년 9월)

또한 우주베키스탄에서는 인민들 사이에서 미 제국에 대한 반미 의식이 높아지면서 ‘카르쉬-한바드(K2)’ 공군기지를 폐쇄하고 미군을 철수하라는 요구가 높아졌다. 그러자 미 제국은 우주베키스탄의 독재정권에게 거액의 돈을 주어 매수하여 공군기지 사용을 연장하는 일까지 벌였다(조복래 기자, 2005).

31) 우주베키스탄이 자국내 미 공군 철수를 요구하자 니컬러스 번스 미 국무부차관은 2005년 7월 30일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매우 중요한 인권 문제를 간과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였다(손제민 기자, 2005)

그러나 미국의 중앙아시아 지배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색깔혁명으로 조지아에 들어선 친미 정권이 2012년 선거에서 패배하였고, 체첸 반군을 이용하여 코카서스(Caucasus) 지역을 분쟁 지역으로 만들려 했던 미국의 계획도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미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인민들의 저항과 반발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3) 시리아 내전 그리고 이슬람국가(Islam State)

중앙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하지도 못한 미국은 2003년에 제2차 걸프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억지 주장을 하며 이라크를 공격하였다. 그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사살하였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2006년에 이라크에서 제2차 걸프전쟁은 끝났지만, 이라크의 바트당이 완전히 와해 됨으로써 이라크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 미 제국의 군사력에 의존한 억압적 통치로 이라크의 치안유지를 할 수 없었다.32) 이라크의 내부 사정이 복잡해지자 결국 미국은 일방적으로 2010년 8월 20일부터 미군 철수를 시작하였다. 미국은 2011년 4월 30일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고 2011년 12월 18일에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32) 이슬람 무장단체인 알 카에다는 2006년에 알 카에다 이라크 지부를 ‘이라크이슬람국가(ISI)’로 바꾸고 미군이 철수한 틈을 타 이라크에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이란과 핵 협상을 하면서 이라크 시아파인 누리 알 말리키(Nouri al Maliki)에게 정권을 물려 주고 철수하였다. 이것은 이라크 내 수니파 과격분자와 옛 바트당 군벌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이것은 이라크 알 카에다를 중심으로 이라크 이슬람국가(IS) 건국을 추동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은 이라크 인민의 반미 감정과 불만을 시리아 내전으로 치환하는 ‘분리지배(divide and rule)’ 전술로 작전을 변경하였다. 미국은 친러 성향의 시리아아랍공화국을 흔들어 러시아의 해상 진출로를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것은 또 다른 중동지역의 화약고를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따라서 2011년 시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라크 내부의 ‘누스라전선(Jabhat al-Nusra)’의 전사들이 시리아의 알레포 등, 시리아 동북부를 지배하였을 때까지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3년 4월에 이라크이슬람국가 지도자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드(Abu Bakr al-Baghdadi)가 누스라전선은 이라크이슬람국가의 하부조직이라 발표하고 2014년 6월에 시리아와 이라크 이슬람세력을 통합하여 이슬람국가(ISIS)를 선포하였다.

그 동안 미국은 누스라전선이 자유 시리아군과 연합하여 시리아를 공격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누스라전선이 이슬람국가의 하부조직이고 이슬람국가가 이라크 바그다드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미 제국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세계 최강의 미 제국이 이렇게 중동지역에서 패배에 직면한 이유는 미국이 중동지역 인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서이다. 미국은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과 파괴와 폭력을 행하였다. 미 제국은 그들이 벌인 파괴와 폭력에 대해서 책임지지도 않고 조롱하였다.

전쟁은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이슬람 민중들의 반미 성향만 결속시켰다. 미 제국은 그들의 작전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고 2014년 이슬람국가를 공습하였다. 그 틈을 이용해서 시리아 정부군이 이슬람국가에 반격하여 알레포를 재탈환하였다. 미 제국은 러시아와 가까운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붕괴시키려 쿠르드족에게 독립을 미끼로 그들을 시리아 전쟁에 끌어들였다.33) 이것은 쿠르드족과 적대 관계인 터키를 자극하여 터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 정부군과 서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리아 반군 그리고 이슬람국가 전사 이렇게 세 진영이 얽히고설킨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33) 이라크 북부 쿠루드족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여 시리아 정부군과 싸우게 하였다. 쿠루드 민족의 지치권 요구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터키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2017년 12월 9일 하이데르 알 아바디(Haider al Abadi) 총리는 이슬람국가 세력을 모술과 명목상 수도인 시리아 북부 도시 락까( الرقة )에서 이슬람국가 세력을 소탕했다고 발표하면서 이라크에서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터키를 끌어들여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게 하였다. 이라크의 내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지만, 이슬람국가 세력이 물러난 지역을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시리아 반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러시아는 지중해로 곧바로 진출할 수 있는 해군기지를 시리아에 확보하기 위해서 바사르 알 아사드 정권을 도와주었고 미국은 반정부군을 도와 시리아를 공습하였다. 그러나 확전을 원하지않던 러시아와 미국의 휴전합의로 2018년 시리아의 안전지대(긴장완화지대·안정화 지역)를 설치하여 휴전인 상태이다.

(4)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미 제국의 패배와 몰락

미국은 냉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을 붕괴시키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다고 자부하면서 미 제국주의 중심의 단일 질서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힘의 통치를 하였다. 냉전 종식 초기에는 미국 힘이 먹혔지만, 미국이 반공주의 전사들로 키운 이슬람 전사들은 사회주의 유령이 사라지자 그들의 정치적 자주화를 위해서 전사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과 한편이었던 이슬람 전사들의 정치적 요구를 부정하고 미국 독점자본주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책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미국은 그들과 한때 동지였던 이슬람 전사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그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 반사회주의 전선에서는 미국과 이슬람 전사들이 동지의 관계였지만 오늘날 미국이 벌이는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전사들은 반미 전쟁의 선봉에 서 있다. 미 제국은 그들이 키워 낸 이슬람 전사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34)

34) 미국은 냉전 시기 이슬람 인민들의 존중하고 그들의 민족 자주화 요구를 배척하면서 오로지 독점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이슬람 테러 조직을 키웠다. 냉전이 끝나고 사회주의 유령이 사라지면서 이슬람 지도자들은 그들의 종교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거부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슬람 인민들의 억눌림이 반공주의와 사회주의 유령으로 통제당했지만, 냉전이 종식되었는데도 서구 지배의 속박과 약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슬람 인민은 미국의 모순된 중동정책에 반발하였다. 그런 거대한 흐름이 이슬람의 반미운동에 배태되어있다.

그런 본질을 꽤 뚫어 보지 못한 미 제국주의는 그들의 군사력만 믿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미국은 최신식 무기와 강력한 무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한순간에 초토화하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패배하고 쫓겨난 쪽은 미 제국이다. 미 제국주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중앙아시아에 군사 기지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안간힘을 섰지만 거부당했다(유철종 기자, 2021.05-11).

미 제국은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종족 갈등과 분열을 더욱 증폭시킴으로서 인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미 제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무수한 민간인들을 살해하였다.35) 미국의 힘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 인민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서 미국의 앞잡이를 자임하며 정치를 하였다.

35) 2017년 11월 3일 아프가니스탄 북부 툰두즈 주 차르다라에서 미군 공습으로 민간인 50~60명이 숨졌다. 또한 2016년 11월에 쿤두즈 주에서 미군의 공습으로 민간이 33명이 숨지고 27명 부상하였다. 2015년 10월에는 쿤두즈에서 미군이 병원을 폭격하여 환자 24명을 포함해 42명이 숨졌다(나확진 기자, 2017-11-06). 2010년 2월 21일 아프가니스탄 중부 다이쿤디주(州)에서 미군의 오폭으로 27명의 민간이이 숨졌다. 2010년 2월 14일 미군이 잘못 발사한 로켓 2발로 민간인 12명이 사망하였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시작되면서 2010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고한 민간이 2412명이 사망하였다(김신영 기자, 2010-02-23). 2001년 10월부터 2021년 4월까지 숨진 민간인은 47,245명, 국제구호단체 직원 444명, 언론인 72명이 숨졌다(박대한 기자, 2021-08-17).

그 과정에서 부정과 부패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지도자들은 미국이 몰래 떠나자 살아남으려고 제 살길 찾기에 바빴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중동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벌인 기나긴 전쟁 속에서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36) 미 제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아프가니스탄 양민을 죽이면서 어떠한 보상이나 사과도 하지 않고 오히려 “면책특권(legal immunity)”을 요구하였다.37)

36) 소련의 붕괴로 무기 재고가 쌓여 수익이 줄어 힘들었던 미국 군산복합체는 9.11 테러와의 전쟁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1999년 미국의 국방비는 3,000억 달러 수준이었고 2010년 국방비는 7,000억 달러였다.(김봉규 기자, 2011-09-21)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년 동안 2조 달러(약 2,340조원)의 돈을 쏟아 부었다(윤창수 기자, 2021-08-23).

37) 2014년 아프가니스탄과 미국 사이에 안보협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난 12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미군의 ’야간 순찰대(Nights raids)'에 무참히 유린당해 왔다. 의심 지역을 수색한다며 가정집에 난입해 부녀자들을 강간, 폭행하고 무참하게 사살하였다. 또한 무인폭격기를 활용하여 무고한 양민들을 살해하였다. 그런 미군의 만행에 대해서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부족장들이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국무장관 존 케리(John Kerry)는 지난 12년 동안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면서 행했던 실수나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해서 전혀 사과할 생각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Hamid Shalizi, Arshad Mohammed, 2013-11-22) 그러면서 안보협약 서명을 내년으로 미루면 아프가니스탄에 불이익이 있을 거라며 협박하였다.

이런 미국의 오만하고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을 무시하는 미국의 행동에 아프가니스탄 부족장들 불만이 커지자 친미 사대주의자 하미르 카라자이(Hamid Karzai) 대통령은 미국과의 안보협정을 2014년 4월 이후로 미루겠다고 하면서 부족장 원로 대회의에서 미국을 비난하였다.

“나와 미국 사이에서 모든 것은 신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좋은 신뢰가 없습니다. 나는 그들을(미국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도 나를 믿지 않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내가 보아온 일입니다. 나는 그들과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적대하여 선동하고 있습니다(AP, 2013-11-23).”

과거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 제국주의자들도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1838~1841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하였다. 이것이 제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였지만 자주 의식이 강한 대중들의 반란으로 1만 6천 명의 영국군이 전멸하였다. 이때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엄청난 혼란과 공포에 빠졌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여 지도자들을 매수하고 기회를 보다가 1878년 11월 아프가니스탄을 또다시 침공하였다. 이것이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간다 마크(Gandamak)’ 조약을 맺고 아프가니스탄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제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교훈 삼아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무자비하게 통치하였는데,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대중들의 반란과 폭동을 더욱 확산시켰다. 결국 영국군 장교들이 무참히 살해되고 통제 불능에 빠지자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2021년 8월 15일 미국 제국주의는 영국 제국주의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당했던 굴욕을 똑같이 당하고 철수하였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보면 지배계급은 외세에 쉽게 타협하였지만, 대중들의 ‘자주독립’ 의식은 매우 강하였다. 처음에는 외국 군대가 승리하는 듯 보였지만 나중에는 대중들의 강고한 투쟁과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외국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보고 철수하였다.

4. 나오는 글 : 미 제국주의 세력의 몰락은 필연

미국은 냉전이 종식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 이란이슬람공화국(이란), 쿠바공화국(쿠바)을 불량국가로 지칭하면서 ‘2개 전장(戰場) 동시 승리 전략’을 수립하였다. 미 제국은 중동 지역과 동북아시아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중동 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 실패는 두 개 전장에서 동시에 승리할 수 있다는 미국의 전략이 유효하지 않음을 입증한다. 미 제국은 냉전 종식 이후 22년만인 2012년 미국은 ‘2개의 전쟁’ 전략을 폐기하였다(이우탁 기자, 2012-01-06). 이것은 미국의 패권이 빠르게 쇠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이 중동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하는 동안 북은 3차례의 핵 실험에 성공하였고 2017년 11월 29일 신형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였다(박병수 기자, 2017-11-29).

북은 전략 국가로서의 위상을 강화하면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력 균형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북한(조선)-이란-시리아로 연결되는 전략적 연대를 북이 핵 무력으로 담보하고 강력한 반미전선을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모든 군사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북을 주저앉히려 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북을 아주 강도 높게 봉쇄하고 선제 타격까지 검토한 바 있다(중앙일보 사설, 2017-12-05).38)

38) 트럼트 전 대통령은 오바마 정권에서는 북과의 전쟁까지 갈 수 있었지만,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전쟁을 피했다고 주장했다.

북이 미국을 반미전선을 구축하자 냉전 시기 중·소 이념분쟁으로 갈등하였던 중국과 러시아가 상하이 협력기구를 중심으로 미국 제국주의와 대항할 수 있는 전선이 형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핵무장이 북-중-러 연대를 만들어 주는 토대가 되었다.39)

39) 그렇게 보는 이유는 북의 핵 실험 이후 6자회담을 통해서 미국의 일방적이고 무리한 요구가 확인되면서 자연스럽게 북-중-러의 연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북-중-러의 연대를 깨기 위해서 미국은 미 7함대(태평양 함대)를 “인도-태평양함대”로 이름까지 바꾸어 가면서 인도와 호주를 끌어들여 미국의 태평양 지역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미국은 인도-일본-호주를 묶어서 인도-태평양 안보공동체를 만들려 하지만 지난 3월에 열린 첫 4개국(쿼드) 정상회담에서 별 진전은 없었다.40) 거기에는 인도의 소극적 참여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40) 4개국(QUAD) 정상회담이 안보협력까지 발전하려면 인도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겠는데 인도는 러시아와의 국방협력 관계 때문에 한계가 있다.

전통적으로 제3세계 국가에서 정치적 위상이 높았던 인도는 북이 핵 전략국가로 올라서고 중국의 부상을 보면서 정치·군사적으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인도가 대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핵에너지 자원 확보가 결정적이다.

그런데 인도는 2008년 미국과 불평등한 핵 협정을 맺었다.41) 따라서 인도는 사실상 핵 주권이 없는 상태이므로 북이 핵 주권을 행사하며 핵전략 국가로 미국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정치·군사적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인도는 따밀나두 주(州) 칼라파크캄(Kalpakkam) 지역에 있는 인디라 간디 핵중심연구원(The Indira Gandhi Centre For Atomic Research)에 고속증식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한다고 2011년 9월 발표하였다.42)

41) 인도가 미국과 맺은 핵 협정에는 미국의 국내법에 불과한 1954년 원자력 법안 123조항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매년 미국 대통령에게 핵시설, 개발과 운영을 보증받아야 한다(샤밈 파이즈, 2009)

42) 인도의 1948년 원자 에너지법에 따르면 1단계 가압중수로원자로(Pressurised Heavy Water Reactor), 2단계는 고속증식로원자로(Fast Breeder Reator), 3단계는 향상된 핵발전시스템(Advanced Nuclear Power System/핵융합)에 따른 핵 계발 프로그램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발표에 대해서 미국이 발칵 뒤 집어졌다(Ashwin Kumar, M V Ramana, 2011). 미국은 겉으로는 고속증식로의 안정성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고속증식로에서 프로토늄-239를 재처리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핵무기를 제조하는 고농축 방사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곧바로 호주 다윈 지역의 폐쇄되었던 옛 미국의 군사기지를 제 정비하여 미군을 재배치하였고 호주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인도로 우라늄 수출을 막았다(이경욱 기자, 2011).43) 21세기에는 주요 에너지가 전기로 대체 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는 우랴늄 확보가 중요하다.

43) 미국은 인도가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핵물질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원자력에너지부(the Department of Atomic Energy) 인도는 천연우라늄 자원이 부족하여 고속증식로원자력 발전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미국이 2021년 9월 15일 인도·태평양 지역의 새로운 안보동맹인 ‘오커스(AUKUS)’를 출범시키기로 하였다(유신모, 2021). 특히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호주에 핵잠수함 기술을 이전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이란 핵 문제뿐만이 아니라 인도의 핵개발 전략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그동안 인도양에서 인도의 해상 패권을 인정해 주었다. 그 대신 인도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묵인해 주었다. 그런데 미국이 호주에 핵잠수함 기술을 이전하여 사실상 인도양의 주인으로 내세워 준다면 인도의 인도양 지배권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인도는 조선과 아프가니스탄의 핵물질에 접근하기 위한 대담한 결정을 할 수도 있다.

미국이 매우 특이하게 오커스 같은 불안정한 안보동맹 체제를 불쑥 꺼냈는지는 잘 이해가 안되지만, 이것은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처럼 매우 어리석은 결정으로 보인다.44) 인도는 미국이 호주에 핵잠수함 기술이전을 지켜보면서 러시아와 프랑스와 잠수함 현대화 계획을 더욱 속도 높여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Dinakar Peri, 2021).45) 그렇게 되면 인도의 쿼드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44) 프랑스는 오커스 동맹 결성에 매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정의길, 2021). 중국은 핵확산 노력에 피해를 주었다며 호주의 핵잠수함 건조 계획을 비판하였다(임소연, 2021).

45) 인도 해군은 러시아 킬로급 잠수함 8척, 독일 HDW 4척, 스콜펜 3척, 핵탄도미사일 잠수함(SSBN) INS Arihant 등 15척의 재래식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두 번째 핵탄도미사일잠수함(SSBN Arighat)는 내년에 항공모함 Vikrant와 함께 취역할 예정이다. 또한 인도는 러시아로부터 새로운 잠수함 임대 계약을 맺어 2025년경에 받을 예정이다(Dinakar Peri, 2021).

냉전 종식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이 중동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 쫓겨남으로써 미국 제국주의의 패권은 저물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북으로 핵으로 무장한 전략 국가 지위로 올라 섬으로써 미국의 핵 패권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미국의 경제 사정도 어려워지고 있는데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미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풀어서 겨우 경제 공황을 겨우 버티어 내고 있다.

미국의 바이든 정권은 2021년 한 해 동안에만 6조 달러의 종이지폐를 찍어서 시장에 공급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의 달러 가치를 하락 떨어뜨리고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것이다. 너무 많은 돈이 시장에서 유통되어 발생 되는 상품 가격의 상승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독점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세계 경제의 불안정은 사회불안을 일으켜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에 이런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미국은 전쟁 같은 위기 국면을 창조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끊임없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과잉 생산된 상품들을 강제로 소비시킴으로써 독점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미국은 태생적으로 전쟁을 기획하고 일으킬 것이다.

중동 지역과 중앙아시아에서 패배한 미국이 이제 마지막 명운을 걸고 싸울 결전의 지역이 동북아시아 지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현실사회주의 진영과 독점자본주의 진영의 마지막 총대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고 있다. 인류의 진보적 승리와 전진은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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